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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라마 <허준>의 아버지?
2001-03-22

심산의 충무로작가열전 10 이은성(1936-1988)

지난해 방송가에서 최고의 시청률을 기록한 프로는 단연 MBC 창사특집 드라마 <허준>이었다.

민족의학에 대한 허준의 우직하고 곧은 집념과 병들어 고통받고 있는 민초들에 대한 무한한 애정이 엄청난 반향을 불러일으켜 시청자들을 TV

앞에 꽁꽁 묶어두었던 것이다. TV로 방영되는 허준을 보면서 1990년의 밀리언셀러 장편소설 <동의보감>(창작과 비평사)을 떠올린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다. 그렇다면 <동의보감>이야말로 <허준>의 원작인가? 그렇지 않다. 1976년에도 동일한 스토리라인의 영화가 만들어진 적이

있다. 이순재와 김창숙이 열연을 펼쳤던 최인현 감독의 영화 <집념>이다. 작품상과 각본상을 비롯하여 그해의 대종상을 거의 싹쓸이했던 이

작품은 그러나 같은 해 MBC TV의 일일드라마로 크게 히트했던 <집념>의 영화적 축약판이라고 볼 수 있다. 그렇다면 도대체 뭐가 오리지널이야?

헷갈릴 것 없다. <동의보감>의 소설가이자 <집념>의 시나리오작가 겸 방송작가는 동일인물이다.

경북 예천 출신의 이은성은 서른살이 되던 해인 1967년 <동아일보>

신춘문예에 <녹슨 선>이라는 시나리오가 당선되면서 영화일을 시작한 정통 충무로작가다. 데뷔작은 같은 해에 발표된 유현목의 <막차로 온 손님들>인데,

비인간화한 사회 속에서 시한부 인생들이 겪는 절망감을 탁월한 심리묘사로 그려냈다는 호평을 받았다. <칼맑스의 제자들>은 신영균이 연합군

포로수용소를 지키다가 이념의 회의를 느끼는 북한군 군관으로 나온 반공영화. 이 작품 이외에도 <암살자> <분노> 등이

이른바 ‘반공영화’라는 지극히 한국적인 장르(!)에 속하는데, 이 장르의 탄생과 소멸을 이해하자면 당시 시대상황에 대한 고찰이 필수적이다.

1965년에 만들어진 이만희의 는 반공영화를 표방했음에도 불구하고 북한군의 복장이 준수하고 구두가 너무 반짝거린다는 이유로

반공법의 ‘고무찬양’혐의가 적용되어 감독이 구속되기까지 한다. 지금의 시점에서 보자면 코미디 같은 사건이지만 그만큼 숨 막혔던 시대가 박정희시대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1968년 무장공비가 청와대를 향하여 쳐들어오자(김신조사건) 국시는 반공을 넘어 멸공으로까지 치닫는다. 결국 천하의

이만희도 <암살자>나 같은 반공영화를 만들 수 밖에 없었던 시대였던 것이다.

이은성은 <나무들 비탈에 서다> 같은 문예영화나 <당신> <집을 나온 여자>

같은 멜로영화에서도 두각을 나타냈지만 역시 그의 주특기는 사극 내지 시대물이다. 임권택의 <왜 그랬던가>는 일제시대를 배경으로 밀정노릇을

했던 한 집안의 몰락기를 그리고 있고, 정진우의 <심봤다> 역시 두메산골의 심마니를 내세워 한 시대를 증언한다. 특히 이대근과 유지인의

토속적인 연기가 돋보였던 <심봤다>는 오대산의 수려한 자연경관을 배경으로 제작되었는데 한국 최초의 동시녹음영화로 기록된다. 새로운 해석과

분방한 상상력을 동원해 역사 속의 인물들을 스크린 안으로 옮겨놓은 <집념>이 정통사극이라면, 당대 최고의 섹스심벌이었던 이보희를 주인공으로

내세운 <깜동>은 사극의 형식 속에 에로영화의 요소들을 버무려넣은 변형사극이다. 1970년을 넘어서면서 한국영화는 침체기로 빠져든다. TV가

본격적으로 보급되면서 그 이전까지 한국영화의 주관객이었던 30∼40대의 주부층을 안방극장에 뺏기고, 멜로영화나 반공영화 같은 당대의 장르들이

돌이킬 수 없는 매너리즘에 빠져드는 등 복합적인 요인들이 작용된 결과다. 한국영화 제작편수가 급격하게 줄어들기 시작한 1970년대는 곧

충무로작가들이 먹고 살 길을 찾아 대거 방송국으로 빠져나가는 서글픈 엑소더스의 시기였다. 이은성 역시 예외는 아니어서 70년대 이후 방송극본을

쓰는 데 전력을 기울여 <세종대왕> <충의> <집념> <개국> 등 대하사극의 인기작가로 이름을 떨쳤다. 그는 1984년부터 <부산일보>에서

발행하는 <일요건강>(후에 <주간부산>)에 장편소설 <동의보감>을 연재해오다가 그 대미를 완성하지 못한 채 1988년 급작스러운 심장마비로

세상을 떠났다. 사후 2년만에 출간된 <동의보감>은 미완의 상태임에도 불구하고 엄청난 판매부수를 기록하여 그의 문명을 천하에 떨쳤다. 집념의

작가가 이루어낸 인간승리로서 마땅히 경하할 만한 일이다. 그러나 이은성이 시나리오작가로서가 아니라 소설가 내지 방송작가로 사람들에게 기억된다는

사실에 대해서만은 뭔가 억울한 느낌이다.

심산|시나리오 작가 besmart@netsgo.com

◆시나리오 필모그래피

1967년 유현목의 <막차로 온 손님들>★

1968년 강범구의 <칼맑스의 제자들>

1968년 최하원의 <나무들 비탈에 서다>

1969년 이만희의 <암살자> 이성구의 <당신>★

1970년 조문진의 <분노> 71년 정소영의 <집을 나온 여자>

1972년 이만희의

1975년 임권택의 <왜 그랬던가>

1976년 최인현의 <집념>★

1978년 정진우의 <율곡과 신사임당>

1979년 정진우의 <심봤다>ⓥ★

1988년 유영진의 <깜동>ⓥ

ⓥ는 비디오출시작 ★는 자(타)선 대표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