컨텐츠 바로가기[Skip to contents]
HOME > Magazine > 피플 > 씨네클래식
아버지의 반대를 무릅쓰고 메가폰을 잡다
2001-03-22

심우섭편 2 - 홍성기 감독의 어린시절, 그리고 감독이 되기까지

1924년 5월25일 서울 효자동에서 부친 홍한표와 모친 이기련의 3남2녀

가운데 막내로 태어난 홍성기는 충북 충주의 명문세도의 자손이다. 그는 철도국 설계부문 고위공무원이었던 아버지를 따라 서울, 부산 등지를

거쳐 일찍이 만주에서 성장했다. 어머니를 일찍 여읜 탓에 계모 밑에서 자란 그지만 남매간에 유달리 화목하고 경제적으로도 큰 어려움이 없어

대체로 유복한 어린 시절을 보냈다. 그에겐 두 형과 두 누나가 있었는데, 유난히 고집이 세고 사랑을 독차지하려는 막내를 오히려 가엽게 여겨

다정다감하게 감싸주고 떠받들어주었다. 그런 어린 시절이 있었기에 훗날 그의 작품세계를 관통하는 사랑의 메시지가 가능하지 않았나 생각한다.

부산에서 봉래초등학교를 졸업하고 아버지를 따라 만주에 간 그는 당시 한국인으로선

거의 입학이 불가능하던 중국 안동의 제일 고등보통학교(중학교)에 우수한 성적으로 입학했다. 재학 시절에는 수재라는 소리를 들을 정도로 학업

성적이 우수했고, 특히 글솜씨와 어학에 뛰어난 재능을 보였다고 한다. 그러나 학자가 되길 바라는 아버지의 엄한 반대에도 불구하고 그는 신징

건국대학교 정경학과 2년 과정 수료 뒤, 1943년 한국인으로서는 유일하게 만주영화제작소 내의 만주영화학교 연출과에 입학한다. 현재 창춘영화제작소(長春電影制片廠)라는

이름으로 남아 있는 이곳은, 일본이 만주국을 점령할 당시 설립한 중국 최초의 영화촬영소로, 인력 양성을 목적으로 영화학교를 함께 운영하고

있었다. 19살 때 쓴 <파문>이라는 시나리오가 일본영화 시나리오 현상모집에서 일본인을 제치고 당선되면서 자연스럽게 입학이 결정된 것이다.

당시 만영에서 시대극과 멜로물을 찍고 있던 일본감독 우치다 도무(內田 吐夢, 1898년생)의 연출부 퍼스트 기회도 그렇게 해서 주어진다.

당시 닛까쓰(日活)영화사에 몸담고 있던 우치다 감독은 방랑벽이 있어 가족과 떨어져 만주에서 외롭게 영화를 찍고 있었다. 그 무렵 일본은

전쟁의 영향으로 현실을 도피하고자 하는 분위기가 예술계에 만연했으며, 영화 역시 시대극이나 문예작품을 바탕으로 한 멜로영화가 주를 이루고

있었다. 우치다 감독의 작품 가운데 비교적 알려져 있는 <흙>(1947) 역시 농민을 소재로 한 자연주의 소설을 영화화한 문예영화이다.

우치다 감독 밑에서의 조감독 생활은 훗날, 그의 연출세계에 큰 영향을 준다. 그의 첫 번째 시대극이라 할 수 있는 <춘향전>이 이러한 사실을

반영해 준다. 비교적 영화적 제작여건을 충실히 갖추고 안정된 화면 구성과 이에 걸맞은 세련된 대사의 창출과 생략, 그리고 연기력의 절제를

보여주는 <춘향전>은 당시로서는 드문 영화 연출력이었고 이는 우치다 감독에게 배운 것이기도 했다. 또한 우치다 감독은 일찍이 진실한 영화적

표현만이 대중에게 공감을 줄 수 있다고 가르쳤는데 이후 홍성기가 롱테이크와 풀숏을 이용해 리얼리티를 강조한 사회적 경향의 드라마에서 이를

확인할 수 있다. 한마디로 홍성기는 그의 밑에서 인간됨과 영화 예술가로서의 기본 자세를 배운 것이다.

영화를 만들 수 있는 곳이라면 굳이 장소를 가릴 필요가 없다고 생각한

홍성기는 계속 만주에 머무를 예정이었으나, 막내의 안부를 걱정하는 누나의 설득으로 마지못해 고국에 돌아온다. 그리고 이듬해인 1946년

고려영화사(최인규의 형인 최완규가 28년에 설립) 산하 최인규 프로덕션의 최인규 감독 문하생으로 들어가 <자유만세>의 연출부로 일하게 된다.

국내외를 막론하고 한국의 영화인력 규모가 워낙에 작았던 터라 만영에서 공부하고 돌아온 홍성기에 대해서는 어느 정도 알려져 있었고, 홍성기

역시 최인규 감독 이야기를 익히 들었던 터라 망설임 없이 그의 문하생이 되기를 자처했고 그 청은 쉽게 받아들여졌다. 우치다 감독이 홍성기의

눈을 틔워주고 걸음마를 시켜주었다면 최인규 감독은 감독으로서의 자질을 홍성기에게 심어준 사람이었다. 그의 영원한 라이벌인 신상옥과의 만남도

이때 처음 이루어진다. 일본 도쿄제국미술학교에서 그림을 공부하다 중도 포기하고 한국에 귀국한 신상옥이 같은 해 입사, 미술부에서 근무하고

있었다. <자유만세>는 고려영화사의 첫 작품이었는데 제작비로는 당시 돈 20만원이 들었으며 전창근이 각본과 주연을, 한형모가 촬영을 맡았고

황려희, 유계선, 전택이 등이 출연했다. 광복운동을 주제로 한 이 영화는 개봉 당시 자유중국의 장제스 총통이 ‘자유만세! 한국만세’라는

휘호를 내렸다는 일화가 있을 정도로 화제가 되었다. 홍성기의 고된 고국 생활도 그렇게 안정을 되찾아가고 있었다.

구술 심우섭/ 영화감독·1927년생·<남자식모> <운수대통> 등 연출

정리 심지현/ 객원기자 simssisi@dreamx.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