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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영화 100년⑤] 한국영화 100년 미래 어젠다 연구에 대한 소회

앞으로의 100년을 상상하며

<박화영>

단관 개봉으로 어렵게 6천여명의 관객과 만난 영화 <박화영>(감독 이환, 2018)은 사회적 약자의 처연한 쟁투를 하이퍼리얼리즘의 시선에서 포착했다는 평가와는 별개로 영화산업 생태계의 급격한 기울기를 증명하는 숱한 사례 중 하나로 잊히는 듯 보였다. 그런데 이 영화에 전혀 예상치 못한 사건이 들이닥쳤다. 극장 상영이 완전히 종료된 이후 느닷없이 ‘박화영’이라는 키워드가 각종 포털 사이트 실시간 검색어에 등재된 것이다. 발단은 비교적 단순해 보인다. 유력 유튜브 영화 채널 <고몽>에서 <박화영>을 바로 그즈음 소개했던 것이다. 하지만 이 역주행의 파장은 결코 단순해 보이지 않는다. 이전 시기 결코 상상할 수 없었던 플랫폼이 기성의 시스템을 완전히 능가한 사태이기 때문이다. 2차 가공이 1차 창작을 압도하는 이러한 미래형 사건 앞에서 한국영화는 과연 어떠한 제스처를 취해야 하는가.

한국영화 100주년을 맞이하여 우리가 수행한 과제는 미래 어젠다 연구였다. 이를 위해 애초에 착안했던 연구 필요성은 대략 다음과 같았다. 한국영화를 둘러싼 다양한 분야의 진화를 위한 미래 전략 수립의 필요성, 영화 환경의 전 지구적 변화 와중에 한국영화의 생존 전략 고안의 필요성, 한국영화를 중심에 둔 과거-현재-미래의 거시적 의제 도출의 필요성 등이 그것이다. 하지만 이런 딱딱하고 지루한 명분 외에 개인적으로 이 연구에 동참한 진짜 이유는 연구 과정에서 이른바 ‘<박화영> 사건’ 같은 전에 없는 이슈의 행간을 어느 정도 가늠할 수 있으리라는 기대감 때문이었다. 따지고 보면 이 사건 기저에는 영화담론의 다변화뿐만 아니라 스크린독과점, 영화 다양성 훼손, 소규모 영화의 열악한 창작 여건, 사회적 약자 테제 등 한국영화의 미래와 관련된 문제적 현재가 응축되어 있었다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하지만 이러한 기대감도 잠시, 연구를 위해 당장 시급히 마련해야 했던 것은 제한된 기간 안에 미래 어젠다라는 거대하고 막연하고 갈피를 잡을 수 없는 추상적 대상을 세밀하고 예상 가능하고 정리된 방향으로 구체화하기 위한 일련의 방법론이었다.

우리는 일단 단순하면서도 무모한 방식을 도입하기로 했다. 한국에 존재하는 거의 모든 영화단체의 협조를 받아 최대한 많은 수의 영화인 이메일 주소를 확보했다. 그런 후 확보한 주소들로 꼼꼼하게 설계한 설문조사 문항들을 대대적으로, 그리고 무작정 송부했다. 고맙게도 영화인 424명이 정성스럽게 답신을 보내왔고 이로써 나름의 대표성이 확보된 현황 조사를 꾸릴 수 있었다. 이렇게 구축된 연구 토대로 우리는 이번 연구의 핵심인 FGI(Focus Group Interview) 실행을 위한 사전 정지 작업에 들어갔다. 우선 효율적인 논의 진행을 위해 그룹을 영화창작, 영화산업, 영화담론, 영화와 사회적 소수자로 나눴다. 영화창작과 영화산업의 경우 범위가 넓어 다시 각각 세 분야로 쪼겠으니 총 8개의 그룹을 설정한 셈이다. FGI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각각의 그룹을 채울 논의 주체들의 전문성이다. 영화 현장에서 왕성하게 활동하고 있는 신진 전문가를 섭외하기 위해 대략 100여명의 영화인들에게 연락을 취했고, 최종적으로 뜻있는 40여명의 영화인들을 전문가 패널로 확정할 수 있었다. 심도 있고 가감 없는 토론을 위해 비공개 형식, 최소 2시간 최대 6시간 제공, 패널 익명성 보장 등의 원칙을 철저히 지키며 FGI를 진행했다. 이로써 상당수의 유의미한 미래 어젠다가 도출되었는데, 애석하게도 지면 한계상 이 자리에서 그 방대한 결과를 공유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다만 모든 과정을 설계, 진행, 관리한 입장에서 대개의 그룹이 공통적으로 거론한 몇 가지 지점을 스케치 수준으로 소개할 수는 있을 것 같다.

첫째, 한국영화계의 가장 첨예한 이슈인 스크린독과점 문제는 거의 모든 그룹에서 비판적인 문제의식을 공유하고 있었다. 의외의 지점은 외부에서 볼 때 독과점의 가장 큰 피해자로 상정되는 영화창작 그룹에서 예상과 달리 이와 관련된 위화감을 딱히 보이지 않았다는 사실이었다. 당장의 가시적 성과를 위해 분투하고 있는 입장에서 시장의 논리 자체와 대결한다는 것은 사치인지도 모른다. 대신 창작자들은 현재의 산업 논리 안에서 어떠한 차이를 만들어낼 것인가를 고민하고 있는 듯 보였다. 전언에 따르면 일부 창작자들은 스스로가 스크린독과점의 수혜자가 될지도 모른다는 희망을 품고 있기도 한다고 했다. 둘째, 모든 그룹에서 만장일치로 강조한 것은 이익 배분의 균등 이슈였다. 저작권 문제, ‘크레딧조정위원회’ 설립 필요성, 인건비 문제, 극장의 투명한 정산 시스템 확보 등의 구체적 의제가 논의되었으며, 특히 영화인들의 최소 생계를 위한 안전망도 확보되지 않은 상태에서 한국영화의 미래를 말한다는 것은 어불성설이라는 공통된 인식이 존재했다. 셋째, 한국영화의 미래에 가장 극적인 변화는 영화와 관객의 소통 방식에서 나타날 것이라는 의견이 많았다. 여기에 OTT(Over The Top) 서비스의 전면화 이슈가 결부되는데, 특히 극장 입장에서 이는 관객 감소라는 생존 문제와도 직결된다. 향후 극장은 단순히 영화를 상영하는 공간을 벗어나 다차원의 유희공간이자 복합적 문화공간으로 거듭나야 할 과제에 직면할 것이다. 넷째, 영화진흥위원회(이하 영진위)의 역할 개편에 대한 공통된 요구도 있었다. 주지하다시피 영진위는 한국영화와 영화산업의 진흥을 위해 설립된 국가기관이다. 패널들의 의견은 말하자면 영화산업의 진흥이 이미 거대 자본의 손으로 넘어간 마당에 굳이 국가기관까지 나서서 자원을 낭비할 필요가 있느냐는 것이다. 대신 영진위의 역할은 거대 자본이 주도하는 영화산업 진흥에서 철저히 소외된 분야에 대한 정책적, 재정적 지원에 집중되어야 한다는 의견이었다.

유튜브 <고몽> 채널의 <박화영> 리뷰

개인적으로 궁금했던 ‘<박화영> 사건’과 관련된 에피소드를 간단히 소개하며 마무리하는 게 좋을 것 같다. 이번 FGI 패널 중 미래 어젠다 측면에서 가장 상징적인 전문가는 새로운 플랫폼에서 이전 시기 존재하지 않았던 파장을 일으키고 있는 유튜브 영화 채널 <고몽>의 운영자일 것이다. 사실 처음에는 이 전문가를 기성의 영화인 범주에 포함시킬 수 있는지조차 모호했다. 그는 뜻밖에도 <박화영>의 역주행과 관련된 우리의 의미 부여에 크게 관심이 없는 듯 보였다. 어쩌면 이제야 그것에 의미를 부여라는 행위 자체가 이미 시대착오적인 것인지도 모르겠다. 대신 그는 디지털 네이티브(Digital Native)를 지속적으로 강조했다. 디지털 네트워크 안에서 그가 상대하고 있는 대중은 문자언어가 아닌 영상언어를 생득한 세대, 그러니까 태어나면서부터 디지털 세계의 속도, 유동성, 멀티태스킹 등을 체득한 세대다. 이제야 말하지만 사실 미래는 연구 대상으로 적절치 않다. 아무리 세밀하게 따져도 미래에 덧씌워진 불투명을 걷어내는 건 근본적으로 불가능하다. 우리는 예언가가 아닌 것이다. 하지만 그럼에도 투명하다 말할 수 있는 지점이 있다. 머지않아 영화라는 매체는 디지털 네이티브가 주도하는 미래 안으로 진입할 것이다. 한국영화의 미래는 어떻게 될 것인가. 참고로 지금까지 개괄적으로 소개한 미래 어젠다 연구의 상세한 결과는 조만간 영진위를 통해 공유될 예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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