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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에게 <작은 것들의 세계>를 권한다
2001-03-22

정윤수의 이창

문학에의 열병을 앓던 무렵, 고1때던가, 어느 헌책방에서 계간 <세계의 문학> 창간호를 읽다가 유종호, 백낙청 선생 등과 함께 좌담을

나누던 김우창 선생의 낡은 흑백 사진에 잠깐 매혹된 적이 있다. 시든 꽃잎조차, 서툴지만 강렬한 시심을 작렬시키던 나이였으므로, 시인 황지우의

표현대로 ‘한 마리 고고한 학’과 같은 선생의 풍모에서 나는 언뜻 선지자의 인상을 받았는지 모른다. 곧바로 선생의 책을 구하러 나섰다.

당시만 해도 보기 힘든 하드커버 양장본이라서 꽤 값이 나갔는데, 오직 그 이유만으로 <궁핍한 시대의 시인>은 헌책방에서 사고 <지상의 척도>는

교보문고에서 훔쳤던 것으로 기억한다. 그때부터 지금까지 나는, 틈 나면, 경전을 보듯 두 책을 펼치거니와 기억하건대 그때의 인상이 뚜렷해서

언제나 ‘궁핍한 시대의 척도’를 밝히는 중후한 주제와 그 장려한 문체를 특히 가려 읽었음이 틀림없다. 두 책에는 실리지 않았지만 시인 황동규의

지식산업사판 선집의 해설 또한 내게는 길없는 시대의 지도와 같았는데 특히 황동규의 시를 제대로 말하기 위하여 서론 격으로 쓴 매슈 아놀드의

이야기는 지금도 거듭 낡은 페이지를 뒤적이게 만드는 명문으로 기억한다.

더욱이 1984년 겨울, 당시 김영춘, 허인회 등이 주도하던 고려대학교 총학생회에서 ‘학생의 날 기념 전국고등학생 무슨 어쩌구 저쩌구 대회’를

했는데, 물론 거창한 제목과 달리 서울 동북부 쪽의 몇개 고등학교의 고작 스물댓명이 천여명의 경찰이 진을 친 정문을 피해 그 학교 뒷산을

넘어 학생회관으로 들어간 경우였다. 거길 갔었다. 뒷산까지 넘어 찾아온 스물댓명을 수백명의 고려대 학생들이 맞이했는데 이를 장엄한 비장미

속의 작은 아이러니라고 해도 좋을지…. 하여간 그날 내 인생의 감격적인 사건은 또한 김우창 선생이었다. 낡은 잡지 속의 선지자 같은 분이

격려사를 하셨는데, 내용은 ‘뭐 제가 고려대학교를 대표하는 것은 아니고…”로 시작되었으나 그 뒷말은 기억나지 않는다. 그후 나는 그런 일의

연장으로 결국 몇 개월 뒤 학교를 그만두게 되었는데, 훗날 글쓰는 선배들 얘기로는 김우창 선생이야말로 그 자리에 딱 어울리는 분이지만 그런

공식적 ‘대회’에 참여한 예가 거의 없는 분이라는 얘기를 듣고 또 한번 감격을 얻은 일이 있다. 이상의 얘기를 ‘사숙’이라고 해도 좋을지

모르지만, 이 정도면 오늘 해야할 얘기의 기반은 닦았으므로 원래 마음먹은 얘기를 이제 꺼내기로 한다.

<한겨레21>의 인기 토크쇼 ‘쾌도난담’식으로 말해서 오늘의 결론 : 일상성에 주목하는 젊은 감독들이여. 김우창 선생의 ‘작은 것들의 세계’를

필독하라!!!

경우부터 말하자면, 며칠 전, 무료한 김에 다시 <궁핍한 시대의 시인>을 읽었다. 과연 이 책을 일찍부터 읽기를 잘 했다는 생각을 거듭

했다. 이를테면 한용운의 시세계를 다룬 같은 제목의 평론을 읽지 않았다면 어쩌면 나는 시오노 나나미 같은 책마저도 좋아하는 삼류 독자가

되었을지 모른다는 경계를 다시 한번 다졌던 것이다. 그러다가 <작은 것들의 세계>를 읽었는데 아차, 그러고 보니 이 글은 이 책을 산 뒤로

무려 이십년이 가깝지만 한번도 읽지 않은 글이 아닌가. 헤아려 보니 과연 이 작은 글은 선생이 주로 다루는, ‘지상의 척도’를 구하는 글과는

조금 거리가 멀고 80년대를 자기 시대로 생각했던 사람들에게는 다소 성이 차지 않는 제목이기도 했다. 눈을 비비고 읽으니 이 글은 그 시절의

조건에서도 흡족한 당대성을 가졌을 뿐 아니라 쓰여진 지 이십여년이 넘는 지금에도, 아니 오히려 지금처럼 일상의 아름다움에 주목해도 되는

시대에 이르러 더욱 깨우치는 바가 있으니 무릇 일상의 작은 기미에서 어떤 미감을 추출하려는 젊은 감독이 있다면 등을 곧추세우고 읽을 필요가

있다고 하겠다.

이 지면에서 도스토예프스키를 빌어 젊은 영화 감독의 윤리적 상실을 다룬 적 있지만, 아마 그 무렵 영화평론가 박평식의, 참으로 지지할 만한,

최근 영화에 대한 단상을 더불어 기억한다면 선생의 글은 말 그대로 명심해야할 보감이다. 박평식이 제기한 문제의식, 그러니까 일상에 대한

불성실한 접근과 그것의 윤리적 퇴행이 과연 무엇 때문에 빚어지고 있으며 그 허약한 관찰의 해악을 어떻게 극복할 수 있는가에 대한 도덕적

열쇠를 구하려는 감독이 있다면 말이다. 이는 얼마 전, 이 잡지의 특집에서, 오기민 프로듀서가 ‘퇴행적인 일상성’을 극복한 제대로된 영화를

제작하고 싶다는 소망과도 같은 맥락의 길찾기가 되지 않을까. 작은 것들의 세계, 그 아름다움이란 무엇인가. 세계와의 불화에서 야기되는 이

긴장된 일상 속에서 어떻게 행복과 구원의 메시지를 찾을까. 만일 누군가 그 고민을 한다면 김우창의 ‘작은 것들의 세계’를 읽기 바란다.

선생은 말한다. “모든 인간의 운명은 제한된 것이며 그러니만치 운명에 대한 사랑은 모든 사람의 운명이다.”

정윤수/ 문화평론가 prague@naver.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