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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인생의 영화] 김종민 프로그래머의 <트루먼 쇼>

내 삶의 연출자는 누구인가?

감독 피터 위어 / 출연 짐 캐리, 에드 해리스 / 제작연도 1998년

밀레니엄을 앞두고, 사람들은 묘한 기대와 불안을 끌어안고 있었다. 그 당시 영화쪽으로 진로를 변경하기로 마음먹고서 나도 매일 흔들리고 있었다. 미래를 불안하게 만드는 것도, 가라앉혀주는 것도 영화였다. 안정제를 먹듯 매일 닥치는 대로 영화를 보면서 현실과 이야기 속 가상 세계를 오가는 일상을 보내던 때가 있었다. 그때 그 시절을 회상하면 수많은 거장들의 작품보다 다가올 미래에 대한 근원적인 질문을 던진 영화 <트루먼 쇼>가 먼저 떠오른다.

누군가의 삶이 전세계에 생중계된다는 이 영화의 설정은 너무나 유명하다. 태어나서 30년 동안 부모, 친구, 이웃, 심지어 아내 역할로 고용된 배우들과 일상을 보내고 있었다는 사실을 몰랐던 트루먼(짐 캐리)은 우연한 몇몇 사건을 겪으면서 의심을 품기 시작한다. 나의 삶이 진정 나의 것이 아니었다는 것을 깨닫는 모든 순간들이 영화적으로는 코미디지만 그에게는 끔찍한 공포였을 것이다. 극중 <트루먼 쇼>의 연출자 크리스토프(에드 해리스)는 트루먼이 가상의 일상(Virtual Reality)을 유지하도록 여러 장치를 마련하지만 그럴수록 현실의 균열은 더욱 분명해진다. 트루먼이 목숨을 버릴 각오로 세계의 끝에 다다랐을 때의 전율은 잊을 수가 없다. 절대 벗어날 수 없을 것 같았던 세계의 끝은 뱃머리가 세트의 벽에 콕 박히는 ‘바스락’ 소리에 무너지고 만다. 영화 속 트루먼의 세계에서는 생중계를 위해 달에서도 보일 만큼의 거대한 세트장을 구축하고, 수많은 연기자도 동원한다. 그런데 2020년 현재, 우리 모두가 내 삶을 생중계하며 사는 시대가 되었다. 인스타그램에 업로드하는 내 일상이 실제 내 삶보다 더 중요한 가치를 갖게 되었다. 누가 연출자이고 누가 배우인지를 구분할 수 없는 강력한 가상 세계(Seahaven)가 구축됐다. 수많은 뉴스와 감정들이 여과되거나 정제되지 않은 채 서로의 삶에 침투한다. 이제는 그것이 사실인지 아닌지를 묻는 것보다, 즉 객관적인 외부 사실을 파악하는 것보다 내 삶에 즉각적으로 어떤 영향을 미치게 되는지, 주관적인 감정과 상태를 조절할 수 있는지가 더 중요한 시대가 되었다. 우리에게 ‘현실’이란 무엇일까. ‘현실’이라고 믿도록 연출하고 있는 것은 무엇일까.

2020년, 밀레니엄을 통과하고도 20년이 지난 지금의 미디어 환경은 SF영화처럼 급속도로 발전하고 있다. 북극의 빙하처럼 두껍고 단단했던 현실(Reality)이란 개념도 어느새 녹아내리고 있다. 한때 불안을 먹고살던 영화학도였던 나는 이제 현실의 삶을 복제하기 위한 뉴미디어 기술과 씨름하며 가상현실 콘텐츠를 만들고 전시하는 일을 하고 있다. 때문에 나는 늘 우리가 현실과 가상을 구분할 수 있는 감각을 가지고 있는지를 되묻고 있다. 우리 모두가 트루먼의 삶을 살고 있는 시대라면, 지금의 내 삶을 연출하고 있는 사람은 누구인가. 이 세계는 안락한가, 혹은 죽음으로 거듭날 각오가 필요한가, 나는 가상 세계를 탈출할 용기를 가지고 있는가.

“나중에 못 볼지도 모르니 미리 인사할게요. 굿 애프터눈, 굿 이브닝, 굿 나이트!”

●김종민. 부천국제판타스틱영화제 XR 프로그래머. 선댄스영화제 뉴프런티어 부문 초청작 <붉은 바람>(2017) 등 다수의 VR영화를 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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