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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라진 시간' 정진영 감독, “첫 영화이기에 거칠게 만들어야 한다”
김성훈 사진 오계옥 2020-06-23

-오랫동안 연기를 하다가 갑자기 연출을 하게 된 계기가 무엇인가.

=고등학교 시절 장래희망이 영화감독이었고, 연출부(<초록물고기>)를 했던 까닭에 배우로 활동하는 동안 연출에 대한 뜻이 있는지 질문을 많이 받았지만 그때마다 ‘없다’고 대답했다. 그게 솔직한 마음이었다. 감독은 능력이 안된다고 생각했었다. 그러다가 4~5년 전쯤 출연했던 드라마가 끝나고 아들이 고3이 되면서 가장으로서 임무가 다 끝난 것 같았다. 스스로에게 물었다. ‘원래 무엇을 하고 싶었지? 연출하고 싶었잖아.’ 그런 생각을 할 때쯤 홍상수, 장률 감독님의 영화에 연달아 출연했고, 그러면서 용기를 내기 시작했던 것 같다.

-곧바로 시나리오를 써내려갔나.

=지금 영화와 다른 시나리오 한편을 썼는데 깜짝 놀랐다. 스스로 작품을 관습적으로 보지 않는 사람인 줄 알았는데 시나리오가 대단히 관습적이었다. 그것은 버렸다. 뒤늦게 영화 한편을 만드는데 관습에 얽매일 필요가 있을까. 행복하기 위해 영화를 만드는 건데 자유롭게, 내 방식대로 해야 의미가 있지 않을까. 논리적인 압박감에 나를 가두지 말고 발상이 황당하더라도 마음 가는 대로 쓰자 생각했다.

-원래 제목은 <클로즈 투 유>였는데.

=카펜터스의 노래 <Close To You>를 들으며 시나리오를 썼다. 그때까지만 해도 제목이 없었다가 시나리오를 돌리려면 제목이 있어야 하니 임시로 ‘<클로즈 투 유>’(가제)라고 정한 거다.

-영화는 주인공인 형구(조진웅)가 아닌 수혁(배수빈)과 이영(차수연) 부부의 사연으로 시작된다.

=시놉시스를 쓸 때 이 부부를 먼저 떠올렸다. 이 부부의 이야기를 되게 좋아한다. 울면서 썼을 만큼 애정이 있다. 그들은 지고지순하고 누구에게도 폐를 끼치지 않고 살아가는 착한 사람들이다. 하지만 죄를 짓지 않았음에도 남들에게 말 못할 병 때문에 밤마다 숨어지내고, 비밀이 발각된 뒤로 마을 사람들에게 손가락질 당하는 슬픈 사연을 가졌다.

-부부가 서로를 끔찍이 아끼는 모습이 애틋하면서도 낯설더라. 유령처럼 느껴지기도 하고.

=영화를 시작할 때 정한 원칙 중 하나는, 밑도 끝도 없이 이야기를 시작해 끝내겠다는 거였다. 이 부부가 등장하는 영화의 초반부는 황당한 일의 연속이고, 두 사람이 주고받는 대화는 연극적인 동시에 1970년대 멜로영화 대사처럼 썼다. 뒤이어 등장하는 형구의 존재감이 크기 때문에 이들을 도드라지게 묘사하지 않으면 관객에게 금세 잊힐 수 있겠다고 판단했다. 배수빈, 차수연 두 배우가 현장에서 힘들어한 것도 그래서다. 그들의 사연이 낯설다는 의견이 있어 편집 과정에서 몇 장면을 걷어냈다.

-형구는 영화가 시작된 지 한참 지난 뒤에 등장해 부부에게 벌어진 화재사건을 수사한다. 이야기가 진행될수록 미스터리 장르의 외형을 따르는 듯하던 영화의 장르가 불현듯 바뀌는데.

=주인공이 영화가 시작되고 나서 한참 뒤에 등장하는 건 영화적 규칙에 어긋나지 않나. 형구가 전형적인 형사영화의 영웅처럼 등장하지만 잘 살펴보면 수사를 하진 않는다. (웃음) 그는 수사하는 척하다가 이상한 일에 휘말리는 사람이다. 그러면서 화재사건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지고, 형구의 탈출 이야기가 시작된다. 얘기가 완전히 바뀌는 거다. 시나리오를 쓰는 내내 사건을 그렇게 계속 바꾸고 싶었다.

-형구에게 연달아 벌어지는 일은 황당하지만, 관객 입장에서 형구와 같은 입장에서 이야기를 체험하는 느낌이 든다.

=형구를 따라가는 수밖에 없으니까. 살면서 내가 생각하는 나라는 존재가 있고, 다른 사람이 규정하는 내가 있지 않나. 그런데 어느 순간부터 사회적 관계에서 규정된 내가 더 커진다. 다른 사람들은 나더러 ‘당신은 그런 사람이니까 그렇게 살아야 한다’고 얘기하는 거다. 그렇다면 나는 뭐였지? 이 질문을 거창하거나 진지하지 않게 던지고 싶었다. 롤러코스터에 올라탄 것처럼 형구도 관객도 새로운 사건들을 계속 부딪히게 하고 싶었다.

-시나리오를 쓸 때 형구 역에 배우 조진웅을 염두에 두고 써내려갔다고 들었다.

=배우일 때 감독으로부터 ‘당신 생각하며 시나리오를 썼어요’라는 얘기를 들으면 거짓말인 줄 알았다. (웃음) 직접 써보니 그게 진짜더라. 인물이 가야 하는 행동은 머릿속에 있지만, 그 인물이 어떤 말투인지, 어떤 식으로 행동하는지, 어떤 특징을 가졌는지는 주변 인물을 떠올리며 쓸 수밖에 없었다. 그게 (조)진웅씨였고, 머릿속에서 진웅씨가 이미 연기를 하고 있더라. 사람들이 아는 조진웅은 강하고 우직한 면모를 가진 사람인데, 개인적으로 알고 있는 그는 부드러움과 여린 면모를 가지고 있다. 그의 그런 면모를 되게 좋아한다. 선배 배우로서 후배에게 시나리오를 주면 부담감을 느낄까봐 꺼려졌지만, 주고 거절 당하자는 마음으로 시나리오를 보냈고, 다음날 연락 와서 함께하기로 했다. 보통 시나리오를 쓰면 주변 사람들로부터 모니터링을 많이 받는데 이 영화는 모니터링을 거의 받지 않았다.

-왜 그랬나.

=되게 이상한 이야기인데 선수들에게 보여주면 시나리오가 달라질까봐. 진웅씨가 고마운 게, ‘어디를 고쳤으면 좋겠냐’고 물어보자 ‘뭘 고쳐요, 내 부분은 토씨 하나도 손대지 마세요’라고 대답해주었다는 거다. 나의 로망 1호 배우가 그렇게 얘기해줘서 얼마나 행복했는지 모른다. 그가 낯설고 이상한 형식인 이 이야기를 믿어주는구나 싶었다. 나중에 이준익, 김유진 감독 등 주변 사람들에게 보여주었다. 그들에게 ‘시나리오를 안 고칠 거니 일단 읽어보시라’는 전제를 두었다.

-그들의 반응이 어땠나.

=시나리오가 좋다, 이상한데 좋다, 고 하더라. 이야기를 믿고 가자는 결심을 점점 굳혔다. 아쉬운 점에 대해서도 들었지만 거의 귀담아듣지 않았다. 남의 말을 듣지 않는 건 되게 오만한 태도라고 생각할 수 있지만, 시나리오를 쓸 때부터 그런 생각뿐이었다. 첫 영화이기에 거칠게 만들어야 한다. 매끄럽게 만들면 안된다. 시나리오가 매끄러워지면 내가 없어질 것 같았다.

-영화는 형구에게 일어나는 미스터리한 일을 파헤치는 데 큰 관심이 없다. 오히려 형구가 원하든 원치 않든 그가 새로운 삶을 받아들이는 과정을 계속 보여준다.

=이 이야기를 쓰면서 논리적인 이유를 굳이 따지지 않았다. 인물이 행동하다보면 자연스럽게 다음 행동으로 이어지는 거지 어떤 결과가 일어나야 할 이유 때문에 움직이는 건 아니지 않나. 형구가 겪는 황당함에 대해 일일이 설명할 필요는 없는 거다.

-홍상수, 장률 감독과 작업한 경험이 연출하는 데 어떤 영향을 끼쳤나.

=배우로서 오랫동안 시스템 안에서 작업해왔다. 홍상수, 장률 감독은 이야기로 승부하는 사람이지 않나. 그들을 지켜보면서 이야기로 승부를 걸 수 있는 매체가 영화라는 사실을 그동안 왜 몰랐을까 싶었다. 그게 용기를 내고 연출을 하겠다고 마음먹게 된 계기였다.

-그렇게 출발한 이야기가 곧 개봉을 앞두고 있다고 생각하니 어떤가.

=겁난다. 내 깜냥으로 할 수 있는 일만 하고 말아야지. 이렇게 크게 떠들면서 개봉을 하려니… 형구와 같은 입장이다. 상상조차 못한 일에 툭 내던져졌으니 말이다. 인터뷰만 하더라도 배우일 때는 편하게 얘기했는데 감독이 된 지금은 신중하게 얘기해야 할 것 같고. 말 한마디 잘못하면 영화에 참여한 모든 사람들에게 피해를 줄 수 있으니까. 스탭, 배우, 제작자, 투자사 등 많은 사람들에게 마음의 빚을 졌다.

-앞으로 계속 연출을 할 건가.

=잘 모르겠다. 이 영화는 연출하고 싶어서 내놓은 이유가 되지만, 두 번째 영화는 그것만 해서는 안된다. 내 작업이 영화적 가치가 있다는 확신이 들어야 할 수 있을 것 같다. 관객, 언론, 영화 동네의 평가들을 신경 쓰지 않는다고 생각하고 시작했는데 이제는 그것들을 들을 수밖에 없다.

-만약에 그들의 반응과 평가가 좋다면 계속 찍을 것인가.

=연기와 달리 연출은 용기를 내야 하는 일인데 그렇다면 용기를 낼 수 있을 것 같다. 어떤 용기를 내야 할지는 다른 차원의 문제고, 또 용기를 내더라도 어떤 이야기가 다가올지 아직은 알 길이 없다. 개봉을 앞둔 지금으로선 다음 작품을 생각할 수 없다. 그게 창작자가 짊어진 숙명이 아닌가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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