컨텐츠 바로가기[Skip to contents]
HOME > Magazine > 칼럼 > 디스토피아로부터
송삼동, 무지개다리를 건너다
오혜진(문화연구자) 일러스트레이션 다나(일러스트레이션) 2020-07-08

지인의 집에 처음 방문하기로 했다. 그 집에 ‘송삼동’과 ‘장그래’, 두 고양이가 있다고 했다. 고양이에 대한 비합리적 공포가 있던 나는 삼동이 사진을 보며 심리적 장벽을 미리 없앴다. 드디어 ‘실견’. 크고 동그란 옥색 눈과 형형한 눈빛, 거대한 몸집. 삼동이는 엄청난 크기와 상대를 베어버릴 듯한 눈빛, 치밀하게 계산된 예민함으로 나를 압도했다. 낯선 존재와의 특별한 관계가 꼭 ‘점진적으로’ 형성되는 건 아님을 그날 알았다. 그 후 3년 남짓, 삼동이와 나는 늘 함께였다. 이제 나는 고양이 종(種) 일반과 구분되는 삼동이만의 표정, 목소리, 습관을 식별한다. 턱과 몸통을 기대기 좋아하는 삼동이는 내 책과 노트북, 손목, 종아리를 부드럽게 점령한다. 기골장대한 삼동이가 날 죽일 듯한 눈빛으로 쿵쿵쿵 다가와 내 겨드랑이에 털썩 주저앉을 때, ‘평화란 참 위태롭고도 벅차구나’ 생각했다.

삼동이를 모르고 지낸 세월이 야속하다. 내 발목을 지그시 누르는 7kg의 무게감 없이 어떻게 글을 쓰고 강의 준비를 할 수 있었나. 일진이 나쁜 날에는 삼동이에게 심경을 토로했고, 내가 앓던 날, 삼동이는 새하얀 오른팔로 내 이마를 짚었다. 하루는 ‘고양이어 통역기’라는 제품 광고를 보고 의아해졌다. ‘응? 삼동이랑 난 같은 언어를 쓰는데?’ 삼동이가 한국어를 구사하거나 내가 고양이어를 사용하는 건 아니지만, 우리는 분명 서로의 의사를 알아차린다. ‘감응, 소통, 공감’ 같은 말로 결코 설명되지 않는 이 상태를 지시하는 한국어가 없음에 개탄한다. 하지만 세상에는 이름 붙여지지 않은 수많은 형태의 앎과 감정이 있다는 걸, 이름이 없다고 해서 그 영역이 존재하지 않는 건 아니라는 걸, 이제 나는 안다.

그날 새벽, 불현듯 통증을 느낀 삼동이는 내가 처음 듣는 목소리로 울었다. 이어진 삼동이의 마지막 하루는 내 예상과는 전혀 다르게 흘렀다. 친구들의 예기치 않은 위로에 마음이 저렸고, 장례업체가 마련한 삼동이 사진의 조악한 포토숍에 상처받았다. 그러면서도 상술로만 여겼던 반려동물 장례과정이 내 생각만큼 천박하지는 않아서 안도했으며, 허례허식이라고 믿은 장례절차가 머릿속이 하얘진 유족에게는 잠시 심신을 기댈, 가파른 계단의 손잡이 같은 것일 수도 있겠다고 생각했다.

이제 나는 나와 같고도 다른 방식으로 이 상실을 경험하는 삼동이의 반려인간, 내 지인의 슬픔을 가늠해본다. 반면, 내가 삼동이와 보낸 3년어치의 슬픔은 얼마만큼이어야 꼴사납지 않을지 무의미한 측량을 반복한다. 다른 동거묘 ‘장그래’의 이름을 ‘송삼동’으로 잘못 부르지 않도록 주의한다. 삼동이를 생각하며 일주일 중 하루는 ‘비거니스트로 살기’ 를 실천한다. 친구들이 그려준 삼동이 그림을 보고 또 본다. 그리고 오늘, 삼동이의 ‘부재’를 조심스레 발음하고 언어화해보기로 한다. 언젠가는 이 상실에 무뎌질 테고, 나는 그런 나에게 꽤 배신감을 느끼겠지. 바로 그렇게, 삼동이가 알려준 이 아름답고도 무참한 세계를 천천히 여행할 것이다. 송삼동(2011. 9. 1~2020. 6. 22), 크고, 예민하고, 의리 있는 고양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