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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영엽 편집장] 창작 윤리에 대한 고찰
장영엽 2020-07-31

부산국제영화제(이하 부산영화제)가 다큐멘터리 <본명선언>을 만든 홍형숙 감독의 <흔들리는 마음> 무단 도용 논란에 대한 공식 입장을 발표했다. <흔들리는 마음>을 연출한 재일 동포 양영희 감독이 문제를 제기한 지 6개월 만의 일이다. 양영희 감독은 올해 1월 <씨네21>을 통해 22년 전 홍형숙 감독이 <본명선언>을 연출하며 <흔들리는 마음>의 9분40초 분량을 자신의 허락 없이 무단 도용했다는 문제를 제기했고, 홍형숙 감독은 사전에 합의가 있었다고 주장하며 논란을 빚었다. 2월에는 서울기록원에서 <흔들리는 마음>과 <본명선언>의 비교상영회가 열렸으며, 4월에는 양영희 감독이 부산영화제측에 1998년 당시 <본명선언>으로 홍형숙 감독에게 수여한 운파상 수상을 철회할 것을 요청하기도 했다. 양측 감독의 증언과 소명자료를 검토한 부산영화제는 “법적 시효가 만료되어” 운파상을 철회하기 어렵다면서도“출처를 표기하지 않은 영상의 인용과 독립된 작품의 감독을 ‘8mm 취재 양영희’로 소개한 크레딧은 창작자간의 신뢰를 저버리는 적절치 않은 사용으로 판단된다”는 입장을 밝히고 양영희 감독에게 사과의 뜻을 전했다. 김소미 기자가 쓴 포커스 기사(16쪽)에 더 자세한 내용을 담았다.

지난 6개월간 <본명선언>의 <흔들리는 마음> 무단 도용 논란을 지켜보며 가장 놀라웠던 점은 22년 전의 논란과 직간접적으로 관련된 이들의 기이한 침묵이었다. 양영희 감독이 제기한 무단 도용 의혹을 22년 전 ‘개인적인 상호 의사소통의 문제’라 치부한 부산영화제뿐 아니라 해당 의혹이 한국 독립다큐멘터리의 성장에 악영향을 미칠 거라는 이유로 양영희 감독의 목소리를 외면한 한국독립영화협회 및 평론가, 언론 모두에 일말의 책임이 있음에도 다시금 공론화된이 문제에 대해 책임 있는 발언을 하는 이는 여전히 손에 꼽을 정도다. 김봉곤 작가의 단편 <그런 생활>의 사적 대화 무단 전재가 문화예술계 전반에 큰 파문을 일으키며 창작자의 윤리에 대한 고찰이 어느 때보다 활발하게 일어나고 있는 요즘, 공론화된 무단 도용 논란에 대해 놀라울 정도로 말을 아끼는 영화계의 풍경을 보며 갈 길이 멀다고 느낀다.

다행스러운 점은 최근 젊은 다큐멘터리 창작자들 사이에서 <본명선언>의 <흔들리는 마음> 무단 도용 논란을 계기로 다큐멘터리 저작권의 개념을 공부하고 창작의 윤리를 고찰하고자 하는 움직임이 생겨났다는 것이다. 포커스 기사에 소개한 ‘다큐포럼2020’의 멤버인 김동령 감독은 “문제가 있다면 더욱 자세히 들여다보고 더 엄격하게 말하는 훈련을해야 한다. 폭로와 공론화 이후에 우리가 배우는 것이 있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이런 문제는 또 반복되거나 그냥 퇴행하게 된다”며 창작 윤리를 둘러싼 문제에 대해 앞으로 더 많이 발화해야 하는 이유를 전했다. 단순히 창작 윤리를 어긴 개인과 침묵하는 공동체를 질타하고자 만든 자리가 아닌, 윤리의 역할을 고찰하고 개인과 집단을 침묵하게 만드는 시스템의 문제를 논하자는 취지로 마련된 자리라는 점에서 ‘다큐포럼2020’은 독립 다큐신에 새로운 자극이 될 거라 생각한다. 공정한 창작 환경을 위해 어렵게 목소리를 낸 젊은 창작자들의 용기가 헛되지 않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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