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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오산 탱고' 김범삼 감독 - 영화가 끝나면 또 다른 여행이 시작된다
배동미 사진 오계옥 2020-08-06

김범삼 감독은 방콕을 배경으로 한 영화를 준비하기 위해 약 6년간 방콕의 뜨거운 거리를 수없이 오갔다. 평범한 직장인이었던 그는 박준 작가의 책 <On the Road: 카오산 로드에서 만난 사람들>(이하 <On the Road>)을 읽고 카오산 로드에 매료됐다. 그를 닮은 <카오산 탱고>는 영화의 시나리오를 위해 방콕을 찾은 영화감독 지망생 지하(홍완표)가 가방과 여권을 잃어버리면서 시작하는 이야기다. 지하는 겨울이면 방콕의 게스트하우스에서 일하고, 봄이 되면 한국으로 돌아가는 하영(현리)의 짐을 들어주는 대신 돈을 벌면서 여행자 생활을 이어간다. “수많은 사람이 거쳐간 여행길에 잠시 무임승차해 <카오산 탱고>라는 이야기를 만들었다. 영화를 본 관객이 또 다른 여행을 써내려갈 것 같다”라는 김범삼 감독은 코로나19 시대에 스크린으로나마 관객을 여행자의 거리로 이끈다. 눅눅한 방콕의 공기가 떠오르는 장마철에 만난 김범삼 감독과의 대화를 전한다.

-타이 올 로케이션 영화를 찍어야겠다고 마음먹은 이유는 무엇인가.

=2006년 <On the Road>를 읽고 카오산 로드를 배경으로 한 영화를 구상하기 시작했다. 타이에 직접 가보지 못한 채 상상만으로 시나리오를 썼고 2009년에 이르러 시나리오 초고를 완성한 뒤 타이에 갔다. 도착해보니 상상 속의 카오산 로드와 실제 카오산 로드는 판이하게 달랐다. 도떼기시장 같았다. 무슨 이야기를 할 수 있을까 싶어 헤매고 또 헤매다 람부트리 로드에 도착했는데 조용하고 너무 좋았다. 그길로 영화 속 지하처럼 비행기 티켓을 버리고 일주일을 더 머무르면서 여행자들을 취재하기 시작했다. 돌아와서 최초의 시나리오를 다 뒤집어엎고 여행자들을 만나면서 인상 깊었던 순간들을 떠올리며 시나리오를 쓰기 시작했다.

-데뷔작인데 오래 준비한 것 같다.

=중간에 한번 영화가 엎어졌다. 2015년에 박석영 감독(<바람의 언덕>)이 부산국제영화제가 끝난 뒤 우리 집에 머물다가 우연히 굴러다니던 내 시나리오를 봤다. 박석영 감독은 왜 카오산 로드에서 벌어진 이야기가 멈춰졌을까 의구심을 나타내면서 다시 영화를 해보자고 제안했다. 박석영 감독이 추진력이 강한 스타일이라 일주일간 나는 구술하고 박석영 감독이 타이핑하면서 10장 분량의 새로운 트리트먼트를 완성했다. 시나리오가 완성되기도 전인 2015년 11월에 배우 오디션을 진행했고 2016년 3월에서 4월까지 한달 보름 동안 타이 현지에서 촬영했다.

-시나리오가 완성되기 전에 캐스팅된 탓인지 배우 홍완표와 현리가 캐릭터를 만들어가는 데 많은 도움을 줬다고 들었다.

=홍완표 배우는 호탕한 성격이라 내면에 상처를 가진 지하를 답답해하면서 내게 계속 질문해왔다. 그의 질문에 답하면서 내가 만들어 낸 지하와 홍완표 배우가 연기하는 지하 사이에서 합의점을 찾았다.홍완표 배우는 아버지 사업상의 이유로 인도네시아에서 태어나 동남아에 대한 이해도 깊다. 재일 교포인 현리 배우의 경우, <물의 목소리를 듣다>에서 처음 봤는데 20대 시절의 장만옥 같았다. 영화 속 하영이 고아라는 전사는 <물의 목소리를 듣다>를 볼 때 그가 마치 고아 같다는 느낌이 들었기 때문에 덧붙인 설정이다. 하영은 일본어를 자유자재로 하고 영어도 잘하는 인물인데, 중학생 때 영국 옥스퍼드로 어학연수를 다녀온 덕분에 영어를 잘하는 현리 배우 본인의 이야기에서 출발한 설정이다.

-송크란 축제 기간 동안 워낙 인파가 많이 몰려서 촬영이 어려웠을 것 같다. 그래서인지 송크란 신의 화질도 떨어져 보인다.

=가져간 카메라에 방수 기능이 없었다. 현지에서 방수포를 조달하려고 했으나 실패했다. 대신 방수 액션캠으로 촬영했다. 송크란 신은 촬영 일정 마지막에 찍었고, 모든 제작진이 모여서 배우들이 놀 수 있는 공간을 확보해 최대한 자연스럽게 담으려고 했다.

-과거를 사는 남자 지하를 표현하기 위해 실사로 촬영한 플래시백 장면이 빈번하게 등장한다. 그런데 게스트하우스 주인인 동현(오창경)이 인도에 서 여자친구를 잃어버린 순간을 회상하는 장면은 웹툰으로 표현했다.

=인도 로케를 진행할 수 없는 상태였고 타이에서 인도같이 보이는 장소를 찾으려고 했으나 실패했다. 그래서 전주국제영화제에서 상영할 당시에는 웹툰 플래시백 장면이 없었다. 전주국제영화제와 몬트리올국제영화제에서 상영이 끝나고 난 뒤 영화 초반에 언급되는 동현의 여행 괴담이 도대체 무슨 이야기인지 의문을 표하는 관객이 많았다. 그래서 영화감독을 꿈꾸면서도 웹툰 작가로 일하고 있는 지하가 그림을 그렸다는 식으로 풀어냈다.

-엔딩 크레딧 마지막에 형과 형수의 이름이 뜬다.

=주인공 지하는 내가 아는 두 사람의 경험을 녹여 만들었다. 실제 지인 중에 이지하란 친구가 있다. 5년 전 약혼자를 암으로 잃고 더이상 사랑할 사람을 찾지 않고 살아가는 친구다. 살면서 더이상 그같은 사랑을 할 수 없다는 확신 때문이다. 지하에 녹아 있는 또 다른 인물은 내 형수다. 형수는 형이 죽고 난 뒤로 20년째 혼자 살고 있다. 젊은 시절 나는 형님 댁에서 더부살이를 했는데 세 식구를 이루고 살았던 형수의 삶에서 어느 날 두 사람이 빠져버렸다. 어떻게 보면 <카오산 탱고>는 미망인이 된 형수를 어떻게든 위로해주고 싶어 시작한 영화다. 형수가 놓치지 않았던 사랑의 자산을 아름답게 기억할 수 있게 만들어주고 싶었다.

-지하가 배에서 만난 묘령의 백인 중년 여성은 어떤 의도에서 만들었나.

=취재차 방콕을 여행할 당시 짜오프라야강을 건너는 배에서 한 프랑스 할머니를 만났다. 옆구리에 끼고 있던 타이 여행 책자를 떨어뜨렸는데 홀로 여행 온 70대의 할머니가 주워주셨고 자연스럽게 20분 가량 이야기를 나누었다. 그분의 눈빛에서 형수가 만약에 세월이 지나서 노파가 된다면 홀로 여행하면서 형과 여행했던 순간들을 이렇게 기억하겠구나 하고 느꼈다.

-영화의 마지막에 한국으로 떠나는 건 지하인데 마치 하영이 지하를 떠나는 것처럼 연출했다. 하영을 택시에 태워 보내고 지하가 그를 바라본다.

=<카오산 탱고>는 멜로드라마가 아니다. 애초에 시나리오 쓸 때부터 어른이 됐지만 트라우마에 갇혀 지내는 어리숙한 어른 지하를 성장시켜야 한다고 생각했다. 이때의 성장이란 개인적인 성장일 수도 있고 하영을 통한 성장일 수도 있다. <8월의 크리스마스>도 남성 캐릭터가 떠나는 멜로드라마다. 이런 공식을 바꿔봐야겠다고 생각해서 지하가 남고 하영이 떠나는 것처럼 연출했다.

-직장인으로 살다가 어떻게 감독으로 데뷔하게 됐나.

=직장인으로서 영화를 준비하기 위해 10여년 동안 휴가가 5일 이상 모이면 무조건 타이로 달려갔다. 일을 마치면 퇴근하고 카페에 앉아서 계속 시나리오를 썼고, 주말도 반납했다. 그래서 조금 오래 걸렸는지도 모르겠다. 세월과 생활 때문에 꿈을 내려놓는 사람이 많다. 나 또한 그런 사람이었다. 그러다 막상 만들려고 하니까 영화가 엎어질 뻔한 상황을 무수히 많이 겪었다. 영화를 못해내면 생활인으로서 직장인으로서 가족의 한 구성원으로서 내 존재 자체가 지워질 거란 생각이 들었다. 촬영 현장에서는 태어나서 한번도 경험해보지 못한 지옥을 맛봤지만 해냈을 때 느낀 감정은 말로 표현할 수 없다. 꿈을 접고 있는 모든 사람들과 이 감정을 공유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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