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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종화의 충무로 클래식] 시네마스코프로 완성된 로맨틱 코미디 '여사장'

할리우드의 장르와 기술 어떻게 토착화할까

사장 요안나(조미령)는 수모를 갚기 위해 용호(이수련)를 입사시킨다.

<여사장> 제작 효성영화사 / 감독 한형모 / 상영시간 105분 / 제작연도 1959년

전후 한국영화는 장르적으로 또 기술적으로 나름의 방식을 모색해갔고, 비교적 신속하게 적절한 산업 규모를 형성할 수 있었다. 제작 시스템이 안정되다보니 영화편수도 크게 증가했는데, 1957년 37편이던 제작편수는 이듬해 74편으로 두배가 뛰었고, 1959년에는 111편을 기록하게 된다. 한국영화사상 처음으로 제작편수 100편대에 진입한 것이다. 이처럼 한국영화가 1950년대 후반 본격적인 산업화의 길로 들어서며 대중성과 상업성을 추구할 때, 그 최전선에 있던 이가 한형모이다. 사회적 센세이션을 일으킨 <자유부인>(1956)으로 영화산업의 새로운 변곡점을 만들어낸 그는, 1950년대 중후반 한국영화가 어떻게 할리우드영화의 장르 문법과 이에 조응하는 기술력을 받아들이고 토착화해냈는지를 살펴볼 때 가장 핵심적인 인물이라고 할 수 있다.

장르와 기술을 동시에 고민하다

일제 말기부터 1960년대까지 한형모(1917~99)는 한국영화가 현대성을 획득해가는 과정에서 가장 중심에 서 있었다. 만주의 신경미술학교에서 공부한 그는 <집없는 천사>(감독 최인규, 1941)의 미술팀에 합류하며 영화계에 입문했고, 일본으로 건너가 도호영화사에서 촬영기사 미야지마 요시오의 조수로 일했다. 이후 일본의 기능시험에 합격해 정식 촬영기사가 된 그는 조선으로 돌아와 일제 말기 국책영화 <태양의 아이들>(감독 최인규, 1944)에서 처음 촬영을 맡았다. <자유만세>(감독 최인규, 1946), <마음의 고향>(감독 윤용규, 1949) 등 해방기 영화계를 대표하는 촬영기사로 활약한 한형모는 반공영화 <성벽을 뚫고>(1949)로 성공적인 감독 데뷔까지 이룬다. 그의 데뷔작은 촬영기사 출신다운 기술적 완성도뿐만 아니라 여순 사건이라는 무거운 주제를 멜로드라마 장르로 풀어내 좋은 평가를 받았다. 1950년대 중반 이후 그는 <자유부인>이라는 대형 히트작을 기반으로 할리우드의 다양한 장르에 대한 시도와 영화기술적 관심을 결합한 필모그래피를 쌓아갈 수 있었다. 한국식 멜로드라마를 모색해간 <순애보>(1957), <남성 대 여성>(1959), <가난한 애인들>(1959>, 뮤지컬영화를 염두에 둔 <청춘쌍곡선>(1956), <나 혼자만이>(1958)뿐만 아니라 탐정 스릴러 <마인>(1957)까지 다양한 장르들을 섭렵했다. 그리고 <여사장>에서는 첫 만남부터 어긋난 여남 주인공들의 말다툼이 관전 포인트인 로맨틱 코미디 장르를 소화해낸다.

<여사장>은 현재 우리가 볼 수 있는 한국의 시네마스코프영화 중 가장 앞선 작품이다. 1950년대 후반 한국영화계는 안양스튜디오로 상징되는 기술 기반이 갖춰지면서 흑백 시네마스코프영화에 착수한다. 할리우드처럼 컬러 시네마스코프를 구현할 형편까지는 되지 않아 컬러와 와이드스크린이라는 흥행 요소 중 좀더 효과적이라 판단한 대형 화면을 먼저 채택한 것이다. 최초의 시네마스코프영화는 1958년 수도영화사가 제작한 <생명>(감독 이강천)이었고, 2회작으로 <낭만열차>(감독 박상호, 1959)가 이어졌다. 누구보다 영화기술에 관심이 많았던 한형모 역시 시네마스코프영화 대열에 합류했다. 북삼영화사가 제작한 <가난한 애인들>(1959)에서 처음 시네마스코프 화면을 연출한 후, 바로 이어진 <여사장>에서 촬영과 감독을 겸하며 안정된 미장센으로 완성시켰다. 시네마스코프는 이십세기 폭스사가 개발한 2.35:1 사이즈의 와이드스크린 방식인데, 1953년 <성의>(The Robe)에서 처음 사용됐다. 당시 한국식 시네마스코프가 이십세기 폭스의 기술 특허를 피해 ‘수도스코프’ , ‘북삼스코프’같은 명명으로 홍보된 것도 흥미로운 대목이다.

한국 대중영화의 초석을 놓은 감독으로 평가되는 한형모는 다음과 같은 관점들로 살펴볼 수 있다. 우선 그는 관객을 위한 오락성을 최우선으로 고려한 상업영화 감독이었다. 앞서 언급한 것처럼 할리우드 장르영화의 수용에 몰두한 이유다. 특히 그는 ‘음악영화’에 관심이 많았고, 무희와 가수의 공연 같은 어트랙션(실연 볼거리) 요소를 영화 속으로 끌어들였다. 그의 작품은 악극, 가요, 춤 등의 무대 공연이 결합된 이질적인(disjunctive) 영화였지만, 관객에게는 볼거리가 풍부해 더욱 매력적인(attractive) 영화였다. 마지막으로 그는 영화기술의 개척자였다. 여기서 말하는 기술은 기자재의 문제뿐만 아니라 영화언어와 문법의 영역까지 포함하는 것이다. 그가 제대로 된 크레인과 돌리를 직접 만들어 사용한 것은, 할리우드영화의 스타일이 한국영화의 것으로 흡수되는 데 지대한 역할을 했다.

현대 여성에 대한 동경과 가부장제 사이

“씨네마스코-프”라는 타이틀로 시작하는 <여사장>은 자동차와 인파가 바쁘게 오가는 서울 도심의 거리를 오프닝 크레딧의 배경으로 삼는다. 영화는 보도의 인파 속 한 남성의 다리를 포착하며 이야기를 시작하는데, 남성의 발이 멈춘 곳은 길거리의 공중전화 앞에서 차례를 기다리는 사람들의 모습이다. 이 첫 장면에서 주인공들의 구도가 설명된다. 카메라는 시네마스코프의 긴 화면을 효과적으로 사용하기 위해, 행렬의 앞에서 통화를 하는 화려한 복장의 여성에서부터 가장 말단에 서 있는 청년으로 이동한다. 바로 잡지사 ‘여사장’ 요안나(조미령)와 신입사원 모집에 응모한 용호(이수련)다. 감독은 기다리는 사람들에 대한 배려 없이 공중전화를 오래 쓰는 요안나의 모습을 통해 ‘현대 여성’에 관해 운을 뗀다. 자신의 생각을 단호하게 얘기하는 무뚝뚝한 성격의 용호는 당시 대부분의 한국 남성 혹은 감독 본인의 자리일 것이다.

영화의 주 무대는 시네마스코프 화면을 위해 공들여 설계된 ‘신여성사’ 세트다. 이 공간은 횡으로 길게 이어져 있는 동시에, 중경의 창문 프레임 너머 뒷공간까지 설정해 입체적 깊이감을 만들어낸다. 그 후경에서는 엑스트라들이 바쁘게 움직이며 활기찬 잡지사 풍경이 연출되는 것이다. 당시 여성 잡지가 만들어지는 과정을 지켜볼 수 있는 것은 분명 이 영화의 장점이다. 한형모 특유의 어트랙션 장면도 빼놓을 수 없다.

결국 영화는 사원 용호가 사장 자리에 올라 성공적으로 잡지사를 이끌고 주부가 된 요안나는 한복을 입고 남편을 기다리는 모습으로 끝을 맺는다. 여사장의 사무실에 걸려 있던 ‘여존남비’라는 붓글씨 액자가 ‘남존여비’로 바뀐 것을 당시 관객은 어떻게 받아들였을까. <자유부인>에서 <여사장>까지 한형모는 지위가 높아진 여성들의 화려한 외모, 그들의 욕망이 발현되는 소비 공간들을 ‘영화적 볼거리’ (spectacle)로 전시하지만, 결말은 그녀들이 벌을 받거나 현모양처로 돌변하는 모습으로 마무리 지으며 뿌리 깊은 가부장제 이데올로기를 반복한다. 영화 내내 현대 여성들의 모습과 상류층의 공간을 보여주며 관객을 매혹시킨 후 급속한 결말을 통해 남성 관객에게는 안도를, 여성 관객에게는 전통적인 여성상을 강요하는 것이다. 하지만 견고한 것처럼 보이던 가부장제도 서서히 균열을 드러내고 있었다. 이 영화가 개봉된 지 채 1년도 되지 않아 출현한 <하녀>(감독 김기영, 1960)는 한국 사회의 가부장제가 얼마나 허약한 것인지 그 실체를 보여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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