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체코 뉴웨이브의 거장, 이리 멘젤 감독 별세
김현수 2020-09-23

체코의 극작가, 배우이자 영화감독으로 1960년대 체코 뉴웨이브를 이끌었던 이리 멘젤 감독이 지난 9월 5일, 지병으로 세상을 떠났다. 향년 82세. 그의 사망 소식을 SNS로 전한 아내의 말에 따르면, 그는 2017년 뇌수술을 받은 이후 몇 년 동안 건강을 회복하지 못했다.

이리 멘젤 감독은 1960년대 체코 역사의 격변기에 태동한 ‘체코 뉴웨이브’의 주역이었다. 그는 프라하 공연예술 영화학교(FAMU) 출신으로서 밀로스 포먼, 베라 히틸로바, 야로밀 이레스, 얀 네메치 등의 감독들과 함께 체코슬로바키아 영화에 활기를 불어넣은 감독 중 한 사람이었다. 이리 멘젤 감독이 세계적인 주목을 받게 된 계기는 이탈리아 네오 리얼리즘 영화를 연상시키는 미학적 형식과 블랙코미디를 접목해 만든 첫 번째 장편 연출작 <가까이서 본 기차>(1966)이 1967년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외국어영화상을 수상하면서부터다. 그러나 곧이어 체코 역사의 격변기인 1968년 ‘프라하의 봄’이 찾아왔고, 바로 이어 검열과 탄압의 시대의 희생양이 되었다. 다른 체코 뉴웨이브의 동료들이 해외로 뿔뿔이 흩어지던 와중에도 그는 체코에 남아 영화를 계속 만들었다. 물론 정부의 탄압을 피할 길은 없었다. 당대의 문제적인 체코 부르주아 계급의 이야기를 소재로 삼아 공산주의 체제의 부조리함을 풍자한 이리 멘젤 감독의 1968년작 <줄 위의 종달새>가 당시 체코 정부로부터 상영금지처분을 받았다. 무려 21년이 흐른 1990년에 이르러서야 상영금지처분이 해제됐는데 이 영화는 그해 처음 공개된 제40회 베를린국제영화제에서 황금곰상을 수상했다.

정부의 탄압도 그의 왕성했던 창작욕을 누를 수는 없었다. 그는 자국에서의 영화 연출에만 그치지 않고 스위스 바젤, 독일 보훔 등지에서 연극 연출도 이어갔다. 1974년 즈음에 다시 체코로 돌아와 <황금을 찾는 사람>(1974), <숲 근처 오두막>(1976) 등 체코 영화 역사에 길이 남을 수작들을 계속 내놓았다. 이처럼 이리 멘젤 감독은 체코 영화 역사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는 감독이다. 그가 당시에 내놓은 많은 영화들은 당시 나치의 폭력적인 만행과 소련 통치 특유의 관료주의와 한계에 대해 직시하고 있었다. 국가 이데올로기에 사로잡힌 시대의 정서를 극복하기 위해 그가 내놓은 시네마틱한 묘책은 웃음과 멜로였다. 지난 2007년, 전주국제영화제 국제경쟁부문 심사위원으로 한국을 방문하기도 했던 이리 멘젤 감독은 씨네21과의 인터뷰에서 코미디 영화를 주로 만들어온 이유는 "모든 이들이 즐길 수 있"는 영화이기 때문이며 "또 사람들은 코미디를 필요로 한다"고 여겼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국내 개봉은 물론 다양한 기획전을 통해서도 소개됐던 그의 후기 영화 <거지의 오페라>(1991)는 <가까이서 본 기차>와 <줄 위의 종달새>와 함께 지금도 이리 멘젤의 대표적인 3부작처럼 묶여서 거론되는 영화다. 그의 초창기 대표작 <가까이서 본 기차>와 <줄 위의 종달새> 두 편이 모두 체코의 국민 작가인 보흐밀 흐라발의 소설을 원작으로 만들었는데 <거지의 오페라>는 극작가이자 체코의 정치인이었던 바츨라프 하벨의 희곡을 원작으로 하는 영화다. 바츨라프 하벨은 공산정권을 붕괴시킨 시민혁명이었던 1989년의 벨벳혁명을 주도했고 이후 체코공화국의 초대 대통령까지 역임한 인물. 그의 작품을 원작으로 한 이 영화에서 이리 멘젤 감독은 도둑과 권력자, 간신배들을 앞세워 유머와 풍자, 슬랩스틱 코미디의 향연을 스크린에 아로새긴다. “진정한 웃음은 단순한 지식보다 의미가 있다. 풍자를 통해 아이러니한 현실을 드러낼 수도 있고. 웃음은 건강을 위해서도 좋다. 웃으면 더 잘 숨을 쉴 수 있다. 호흡하기도 편하고. 웃음만이 사람을 자유롭게 한다고 본다”라고 생전에 그가 남긴 연출의 변을 다시 한번 되새겨본다. 어둠과 억압의 시대를 견뎌온 자신의 웃음이 그의 영화를 통해 더 많은 이들에게 전달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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