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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화길의 영화-다른 이야기] 얼어붙은 꿈
강화길(소설가) 2020-10-26

영화 <양들의 침묵>

사진제공 SHUTTERSTOCK

“클라리스, 양들의 비명은 멈췄나?” 나는 오랫동안 이 질문을 기억했다. FBI 교육생인 ‘클라리스 스털링’은 상사인 ‘크로포드’에게 명령 하나를 받는다. 식인 살인마 ‘한니발 렉터’와 인터뷰를 하고 오라는 것. 사람의 가죽을 벗기는 연쇄살인마 ‘버팔로 빌’에 대한 정신감정과 정보를 구하기 위해서였다. 희생자는 계속 등장하는데, 수사는 난관에 봉착했기에 한 선택이었다. 왜냐하면 살인마의 마음은 누구보다 살인마가 잘 아니까. 야심찬 교육생 클라리스는 명령대로 한니발 렉터에게 접근하고, 그와 점점 가까워지며 사건의 진상에도 접근한다. 이것이 바로 유명하고도 유명한 영화 <양들의 침묵>의 스토리.

나는 이 영화의 장면 대부분을 좋아한다. 고딕성의 지하감옥 같은 한니발 렉터의 독방, 버려진 무덤 같은 버팔로 빌의 지하실, 꿀을 먹고 통통하게 자란 나방의 누에고치, 날개를 펄럭이며 밝은 곳을 향해 날아가는 나방들, 한니발 렉터의 수집품들. 그리고 ‘작품들’. 무엇보다 이 모든 은밀한 비밀들을 똑바로 바라보는 클라리스 스털링의 단단한 표정을 좋아한다.

하지만 이 영화를 볼 때마다 나는 그 질문을 이해할 수 없었다. 양들의 비명? 한니발은 대체 이런 질문을 왜 하는 거지? 하긴 뭔들 이해할 수 있었을까. <양들의 침묵>을 처음 봤을 때 나는 꽤 어렸고, 모르는 것 투성이었다. 전날까지 사이가 좋았던 친구와 오늘 갑자기 왜 틀어진 건지, 내가 좋아하는 사람은 왜 나를 좋아하지 않는 건지, 미운 사람은 왜 이토록 많은지, 왜 날이면 날마다 속에서 천불이 나는 것처럼 온갖 감정이 끓어오르는 건지 나는 이해할 수 없었다. 지금도 마찬가지다. 덕분에 나는 사는 게 지긋지긋하고 원망스러우며, 자주 견딜 수 없다고 느끼곤 한다. 하지만 자라면서 달라진 점이 하나 있다. 이런 마음을 묵혀둬서는 안된다는 걸 배웠다는 것이다. 과거로 만들면 안된다는 것. 그런 감정은 흘려보내야 한다는 것. 그래야 내가 살 수 있다는 것. <양들의 침묵> 원작 소설에는 이런 구절이 나온다.

“난 자네가 그런 식으로 마음의 쓸데없는 감정을 얼려버리길 바라. 칠턴과의 일을 얼려버려. 렉터에게 받은 정보만 취하고 감정은 얼려. 목표를 똑바로 봐 스털링.”

칠턴 박사(영화에서 온갖 혐오스러운 언행을 일삼던 바로 그 작자가 맞다)가 FBI의 뒤통수를 쳤을 때, 화가 난 클라리스가 그의 면상을 두들겨 패고 싶다고 말하자 크로포드가 한 말이다. 이 구절은 영화에 등장하지 않는다. 그녀가 칠턴을 바라보며 속으로 욕하는 장면도 나오지 않는다. 대신 표정이 등장한다. 인내하는 표정. 견디는 표정. 그러면서 목표로 전진하는 얼굴. 그녀는 이미 차갑게 얼어붙어 있다. (정말이지 조디 포스터는 그 느낌을 너무나도 기막히게 표현한다!) 그녀는 칠턴 박사가 주목을 가로채고 언론 앞에서 ‘쇼’를 하는 순간, 몰래 한니발 렉터를 찾아간다. 그리고 묻는다. 버팔로 빌은 누구죠. 그는 어디에 있죠. 그는 뭘 원하죠. 어떻게 해야 그를 잡을 수 있죠. 한니발 렉터는 되묻는다. “클라리스, 그를 잡으면 양들의 울부짖음이 멈출 것 같나?” (정확히는 피해자의 이름을 말하며 묻는다. “그녀를 구하면 끝날 것 같나?”)

이해하기에 어려운 질문은 아니었다. 사실 영화의 플롯만큼이나 명확한 질문이었다. 클라리스는 어린 시절 부모를 잃고 목장을 운영하는 친척에게 맡겨졌는데, 거기서 도살당하는 양들의 비명을 듣는다. 몰래 문을 열었지만 양들은 달아나지 않는다. 클라리스는 말한다. “한 마리라도 구하고 싶었지만….” 대체 한니발은 굳이 이 이야기를 왜 듣고 싶어 했던걸까. 이게 버팔로 빌의 사건과 무슨 관계가 있기에? 널리 알려진 대로 한니발의 병적인 호기심 때문에? 지배욕 때문에? 나이를 먹으면서, 나는 클라리스의 그 고백이 어떤 폭력에 대한 메타포일 수 있다는 걸 어렴풋이 깨달았다. 과거와 트라우마에 대한 이야기라는 것도. 그리하여 말할 수 없는 것을 말하는, 클라리스만의 방식일 수도 있다는 것을. 물론 은유가 아닐 수도 있다. 있는 그대로 일어날 일일 수도 있다.

그러나 내용은 똑같다. 클라리스는 누군가를 구하지 못했고, 자신 역시 돌보지 못했으며, 그것으로 고통을 받았다. 그래서 그녀는 과거에서 달아나려 노력한다. 애쓴다. 이번에 이 영화를 다시 보면서 나는 바로 그 때문에 클라리스가 FBI에 지원한 것이 아닐까 생각했다. 자신의 과거에서 벗어나기 위해, 반대로 누군가의 사연을 들여다보고 그걸 돕는 사람이 되고 싶었던 건 아닐까. 왜냐하면 그녀는 자신의 과거를 이미 얼려버렸기 때문이다. 기억하고 싶지 않기 때문이다. 하지만 공교롭게도 사건을 해결하려 하자 한니발은 그녀의 과거를 요구한다. “클라리스, 네게는 무슨 일이 있었지?”

한니발이 살인마이기 이전에 정신분석 상담의라는 사실은 사실 이 영화의 가장 소름끼치는 설정이다. 클라리스가 그에게 자신의 이야기를 털어놓는 순간, 그녀는 그에게 분석당할 수밖에 없으니까. 내가 이해할 수 없었던 건 바로 이것이었다. 그는 왜 타인의 과거를 궁금해할까. 누군가를 사랑하지도, 미워하지도, 분노하지도 않으면서. 필사적으로 얼려야 할 만큼 뜨거운 감정을 가지고 있지도 않으면서, 양들의 울음소리를 들으며 맨발로 거리를 달려본 적도 없으면서, 분명 그랬을 거면서, 왜 누군가의 과거를 탐내는 걸까. 영화는 그에 대해 설명하지 않는다. 소설에서도 마찬가지다. 하지만 그 갈망에 대해서는 이야기한다.

“버팔로 빌은 살인을 통해 뭘 보상받으려 했을까? 바로 탐욕이지.”

이 대목을 여러 번 돌려보고서야 나는 조금 깨달았다. 타인의 사연을 들여다보려 한다는 점에서 사실 클라리스와 한니발은 크게 다르지 않다. 타인의 육체를 원하는 버팔로 빌 역시 마찬가지다. 그들은 모두 어딘가에 갇혀 있고, 거기서 벗어나고 싶어 한다. 탐한다. 갈망한다. 나는 한니발의 동기는 알 수 없었지만, 그가 클라리스의 과거를 집요하게 캐묻는 이유는 이제 조금 알 것 같았다. 클라리스가 누군가를 구하는 방식으로, 비명에서 벗어나려 한다면 그는 누군가의 삶을 삼키는 방식으로 자신을 온전하게 만들려 한다. 정말로 그는 상대를 먹어치웠다. 삶과 생명이 깃든 육체를 요리해서 그 자신의 몸 안에 집어넣었다. 그는 클라리스를 먹고 싶어 하나? 나는 그렇다고 생각한다. 누군가의 맹렬한 감정을 집어삼킬 때만, 그는 살아 있다고 느낄 수 있을 테니까. 때문에 그는 클라리스의 악몽이 멈추는 걸 결코 원하지 않을 것이다. 그러니 묻는 거겠지. “끝날 것 같나?” 그녀는 대답한다. “모르겠어요.”

맞다. 악몽은 끝나지 않을 것이다. 삶은 지리멸렬하고 때로는 지독한 악의로 가득 차 있으니까. 하지만 그런 생각이 든다. 클라리스가 차갑게 얼린 마음을 하나 더 쌓아올리는 날, 감정을 흘려보내는 날은, 적어도 꿈을 꾸지 않는 날이다. 소설의 마지막 구절처럼 “그녀는 양들의 침묵 속에 곤하고 달콤하게” 잠들 것이다. 그리고 그런 날들은 더 많아질 것이다. 그리고 그 순간마다 한니발이 매번 그녀를 깨울 수는 없는 일이다. 왜냐하면 그는 얼어붙은 과거, 실패한 갈망이니까. 그녀의 무수한 과거, 그중 하나. 오직 침묵만이 가득한 얼어붙은 꿈. 한니발, 당신도 꿈을 꾸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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