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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일란 감독, 이반지하 작가, 백현주 배우가 말하는 한국 최초 퀴어 시트콤 '으랏파파' ①
남선우 사진 오계옥 2021-04-08

나와 다른 이들이 전하는, 나의 이야기

이반지하(김소윤) 작가, 김일란 감독, 백현주 배우(왼쪽부터).

한국 최초의 퀴어 가족 시트콤이 온다. 다큐멘터리 <종로의 기적> <두 개의 문> <공동정범> 등을 제작한 성적소수문화인권연대 연분홍치마는 지난 2019년, 퀴어 미디어 운동을 새롭고 재밌게 해보자는 취지로 유튜브 채널 <연분홍TV>를 개설했다. 이후 토크쇼 <퀴서비스>를 찍으면서 장르의 다변화를 꿈꾸기 시작한 그들은 텀블벅에서 펀딩을 진행, 총 208명의 후원을 받아 2020년 10월부터 첫 시트콤 <으랏파파> 제작에 돌입했다.

이반지하(김소윤) 작가가 집필하고 김일란 감독이 연출한 <으랏파파>에는 퀴어들의 유쾌한 고민이 넘실댄다. 새로운 형태의 가정을 꾸려 각자의 퀴어성을 향해 가는 이들의 이야기는 3월 26일 금요일 오후 8시, <연분홍TV>에서 최초 공개됐다. 이에 김일란 감독, 이반지하 작가와 함께 <으랏파파>에서 ‘파파’ 고현미를 연기한 백현주 배우를 만났다. 그들이 전한 <으랏파파> 제작기와 더불어 시트콤에 녹아 있는 질문들에 대한 이반지하 작가의 일문일답을 전한다. 이들이 추천한, <으랏파파>와 같이 보면 좋을 퀴어영화도 덧붙인다.

김일란 감독, 이반지하(김소윤) 작가, 백현주 배우(왼쪽부터).

‘다큐만 하던 애들이 뭘 할 수 있을까?’ 김일란 감독을 포함한 연분홍치마 활동가들이 어떤 형태로든 영상물을 함께 만들어보자고 제안했을 때 이반지하 작가는 자문했다. 퀴어 퍼포먼스 아티스트이자 싱어송라이터, 에세이스트이자 시각예술 작업을 하는 현대미술가인 그에겐 그만의 코미디 감각이 중요하기 때문이다. <우리가족 LGBT>를 노래하며 <바이처럼> 살자고 외쳐온 이반지하 작가는 <두 개의 문> <공동정범>을 내리 연출한 김일란 감독이 “유머를 잘 따라올 수 있을까 걱정”했지만 그럼에도 ‘다큐 하던 애들’과 함께해보기로 했다. “뭐든 해도 된다”는 연분홍치마의 선언에 그는 시트콤을 만들자고 했다. “퀴어 버전의 <순풍산부인과>를 상상했다. 촌스러움 혹은 정겨움이라는 시트콤 특유의 전형성 안에 퀴어 코드를 넣고 빚어보고 싶었다.”

성적소수문화인권연대 연분홍치마가 판을 깔고 이반지하 작가가 집필한 <으랏파파>에는 세명의 하우스메이트가 등장한다. 레즈비언 체육 교사 고현미(백현주)의 집에 어디로 튈지 모르는 청소년 혀크(강다현)와 미스터리한 택배 기사 쌀차비(문혜인)가 들어오면서 퀴어성(queerness)과 세대 갈등이 이리저리 얽힌다. 고현미는 여자 친구와 남자 친구를 오가는 혀크의 만남에 어리둥절하고, 쌀차비는 자신이 무성애자일지 모른다는 물음표를 처음으로 띄워본다.

파일럿으로 제작된 세 에피소드의 마지막 장이자 극의 하이라이트라고 할 수 있는 3부는 아예 이런 갈등과 질문의 무대를 ‘퀴어 선배가 알려주는 직업 탐방’ 강연장으로 옮겨온다. 축구를 좋아했던 학창 시절에서부터 부상 후 교사의 길을 걷기까지 자신의 진로를 소개한 현미에게 한 청중이 묻다. “아까부터 계속 여자라는 어휘를 사용하셨는데, 지금 말씀하시는 여자 혹은 여성의 범주가 어떤 것인지 궁금합니다.” 고민도 잠시, 현미는 “여자라는 건 그야말로 책임”이라며 자신이 지키지 못했던 한 여자를 향한 속내를 술술 털어놓는다. “여기 다 우리 퀴어 식구들인데 무슨 말인지 다 알지 않나” 눙치며 말이다. 그러나 청중은 또 한번 나선다. “여기 있는 사람들을 다 퀴어라고 짐작하시면 안되죠.” 살짝 당황한 현미는 입술을 매만지다 고개를 숙인다. “그건… 미안하게 됐습니다!”

<으랏파파>는 이런 식으로 이슈에 웃음이 끼어들 구멍을 낸다. 인물들은 모두 자신의 퀴어성에 대한 고민을 품고 있는 와중에 타인과 엮이고 과거와 부딪히며 끊임없이 생각의 빈틈을 발견해나간다. 시트콤은 그 틈새로 고민의 숨통을 틔운다. 낄낄 웃어버린 후 다음 단계의 대화를 이어나갈 수 있도록 우리를 자극한다. 이반지하 작가가 바란 지점도 거기에 있다. “<으랏파파>는 이것이 퀴어 문화라고 보여주려 만든 시트콤이 아니다. 관객이 이 작품을 보며 요새 10대 안 저렇다, 요새 부치 안 저렇다 토론하며 또 다른 이야기를 생산하길 원한다.”

한 사람으로 받아들인 부치 캐릭터

고현미를 연기한 백현주 배우도 <으랏파파> 대본을 보며 ‘이런 이야기 하나쯤 있어야지’ 생각했다. “너희들이 보기엔 세상이 온통 남자야? 여자는 엄마 아니면 소녀와 창녀밖에 없나?” 연극 무대를 필두로 영화 <여행자> <오늘> <들꽃>, 드라마 <동백꽃 필 무렵> <더 킹: 영원의 군주> 등에서 활약해온 그는 이전부터 극을 쓰는 이들에게 이런 물음을 자주 던졌다고 한다.

의문을 지속하다 그가 택한 연극이 바로 <비평가>. 남성 극작가와 남성 비평가의 첨예한 논쟁을 그린 2인극 <비평가>는 2018년과 2019년, 백현주 배우와 김신록 배우에 의해 여성 예술인들의 대립으로 재창조된 바 있다. 이때 비평가 볼로디아 역으로 관객의 뇌리에 박힌 백현주는 당초 풍채가 큰 부치 캐릭터로 고현미를 만들고자 했던 이반지하 작가와 김일란 감독의 계획과는 거리가 있었지만 이들을 설득하기에 더없이 훌륭한 배우였다. 백현주 배우가 기존에 찾던 캐릭터 이미지와 전혀 다른 모습이었던 것과 달리 연극 무대에 주로 섰던 혀크 역의 강다현 배우, 독립영화계에서 주목받고 있는 쌀차비 역의 문혜인 배우는 이반지하 작가가 집필하며 그려둔 인물들의 캐리커처와 꼭 닮은 모습이었다고.

새로운 플랫폼에서 새로운 이야기를 해보자고 의기투합한 세 배우 중에서도 백현주 배우는 구심점 그 자체였다. 그 무게감을 안고 첫 레즈비언 캐릭터를 받아든 백현주 배우는 ‘내가 고현미를 연기해도 되나’ 고뇌한 끝에 김일란 감독에게 주선을 부탁했다. “현미를 연기하기 위해 목에 힘을 주고 톤을 낮게 만들었다. 근데 첫 리딩 때 내 톤을 참을 수 없었다. 장르는 시트콤인데 내 목소리가 너무 무겁고 답답했다. 그래서 감독님의 소개로 <연분홍TV> 레즈비언 특집에 출연했던 동갑내기 친구를 만났다.”

하지만 그는 만남을 약속한 순간부터 다시 전전긍긍했다고 한다. “내가 내 일을 한다는 핑계로 누군가에게 실례되는 질문을 해도 될까 싶었다. 내가 직접적이고도 조악한 질문들을 던졌을 때 서로가 곤혹스러워지지는 않을까 걱정됐다. 조심스러울 수밖에 없었다. 그럼에도 만나러 갈 수밖에 없었다. 대신 나도 나의 많은 부분을 내려놓고 그의 이야기를 청하겠다고 다짐했다.”

그런 태도 때문이었을까. 김일란 감독에 따르면 그 만남 이후 백현주 배우의 연기가 훨씬 훌륭해져 놀랐다고 한다. 이반지하 작가도 그에게서 “이론적인 이해를 떠나 한 사람의 삶을 통합적으로 흡수해 연기하는 예술가의 아름다움”을 보았다고 동조했다. 그들은 배우에게 무엇을 어떻게 배웠기에 연기를 더 잘하게 된 건지 여러 번 물었지만 백현주 배우는 이를 말로 설명하기 힘들었다고 한다.

“그분을 만나고 오히려 내가 굳이 뭘 더 하지 않아도 고현미를 연기하는 것이 가능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사람마다 그 안에 여러 가지 색깔이 있다. <으랏파파>에서의 현미도 부치라는 것이 중요한 부분이긴 하지만 그 안에 어느새 기성세대가 되어버린 꼰대 같은 모습, 그럼에도 허둥대는 구멍투성이의 모습, 로맨티시스트의 모습, 답답한 모습 등 여러 색이 있다. 그렇게 고현미라는 캐릭터를 한 사람으로 받아들이는 게 되게 중요하다는 걸 깨달았다. 물론 나의 연기를 보고 실제 레즈비언 분들이 그거 아니라고도 얘기할 수 있겠지만, 부치 이미지에 대한 생각은 사람마다, 연령마다 다를 것이다. 그렇다면 나는 이런 부치가 되자, 생각하게 되었다. 내가 본 고현미는 겉은 딱딱할지언정 속이 딱딱한 사람은 아니다. 자신의 선택들로 인해 힘들어본 경험이 있기 때문에 후배들에게는 그런 일이 생기지 않았으면 하는 바람이 있지 않나. 고현미의 그런 마음에 공감이 갔다.”

나 자신을 돌아보고 알아가기를

<으랏파파> 현장에는 레즈비언 연기가 처음인 배우뿐 아니라 픽션 연출이 처음인 감독과 제작진 또한 있었다. 김일란 감독은 “모두가 처음이라는 상황에 위축되지 않고 일했으면 좋겠다는 마음”으로 현장을 꾸렸다. 연분홍치마 활동가들도 기꺼이 엑스트라로 참여해 극을 채워줬다. 연분홍치마는 퀴어가 안전한 미디어 제작 환경을 조성하기 위해 한빛미디어노동인권센터와 ‘스탠바이 큐’ 프로젝트를 함께하고 있기도 한데, <으랏파파> 현장도 ‘스탠바이 큐’ 정신을 이어받아 평화롭고 안정적인 분위기에서 촬영을 이어갔다고 한다.

김일란 감독은 그럴 수 있었던 이유로 백현주 배우의 존재를 꼽았다. “다큐를 해와서 그런가, 선배님이 움직이는 걸 볼 때마다 저걸 찍으면 되겠다고 생각하곤 했다.” 경험 많은 스탭들의 존재도 힘이 되었다. 김일란 감독은 고민하고 있으면 다가와 농담을 건네곤 했다는 그들 덕에 덜 위축되고 일할 수 있었다고. 서로를 기다려주고 다독여주는 시트콤 촬영 현장을 경험하며 김일란 감독은 “큰 소리를 내는 사람이 있는 거지 큰 소리가 나와야 하는 상황이 있는 건 아니”라는 사실을 느꼈다고 한다. 각양각색의 연극, 드라마, 영화 현장을 모두 경험해본 백현주 배우와 그의 매니저도 입을 모았다. “서로 경쟁하기보다 도와주려는 분위기가 무척 좋아 보였다. 선한 기운이 느껴졌다.”

텀블벅 후원 등을 거쳐 총 3화까지 파일럿 제작을 마친 <으랏파파>팀은 다음 이야기도 계속해서 만들어가고 싶어 한다. <으랏파파>가 이들에게 소중한 감각을 선물했기 때문이다. “머리로 이해하고 있던 다큐멘터리와 픽션 작업 방식의 차이를 직접 체감할 수 있어 재밌고 좋았는데, 그것보다 큰 걸 얻었다. 이혁상 감독이 <으랏파파>를 보더니 내게 ‘일란이 드디어 (용산의) 망루에서 내려왔다’고 하는 거다. <두 개의 문>부터 <공동정범>까지 개봉하는 데 10년 정도의 세월이 걸렸는데, 그 10년을 어떻게 정리해야 하나 싶었다. 나 혼자 마음으로 여러 일을 하고 있었는데 그 결과물로 <으랏파파>가 나온 것 같다. 나에게 유머가 필요했다는 걸 알게 되었다.”(김일란 감독)

“시트콤을 집필하며 내 마음대로 오롯이 하나의 세계를 구축해보는 전능감을 경험했다가 대본이 내 손을 떠난 뒤 외로움을 느끼기도 했다. 그런데 제작발표회에서 배우들의 캐릭터 해석을 듣고 굉장히 감동했다. 내가 쓸 때는 그저 글자였는데, 그걸 본인들의 이해를 거쳐 입체로 만들어준 거다. 문혜인 배우는 내가 생각한 쌀차비의 설정을 적극적으로 이해하고 있었고, 강다현 배우는 10대들이 말하는 속도를 분석해왔더라. 백현주 배우에 대해서는 말할 것도 없다. 무언가를 잃었다가 다시 얻은, 무척 흥미로운 경험이었다.” (이반지하 작가)

“<으랏파파>를 하면서 무성애를 말하는 포스터 앞에선 쌀차비처럼 질문과 마주했다. 내 욕망이나 정체성에 대해 얼마나 알아보고 돌봐왔을까? 어떤 이유로든 비껴가고 있던 질문들을 다시 생각하라고, 결국 나를 행복하게 하는 것이 무엇인지 찾아보라고 제안받은 기분이다. 고현미는 행복해지는 방법에 대해 한 가지 관문을 통과한 사람이 아닐까? 고현미를 연기하며 자유롭다고 느낀 순간이 있었다. 난 아직 자유롭지만은 않은 현실의 고현미들에게 조금의 자유를 주고 싶다. 생각하고 원하는 것을 머리와 몸에 가두지 않고 자유롭게 저질러보는 자유를 선물하고 싶다. <으랏파파>의 고현미라면 좌충우돌하면서라도 함께 행복해지기 위해 노력하는 어떤 자유를 담을 만한 그릇이 될 거라고 믿는다.”(백현주 배우) 백현주 배우의 말을 들은 이반지하 작가는 “고현미라는 인물을 이렇게 깊이 생각해주고 챙겨준 배우님의 얘기를 들으니 내가 챙김받는 기분”이라며 뭉클해했다.

3월 26일 연분홍치마의 유튜브 채널 <연분홍TV>에서 <으랏파파> 1화 공개를 앞둔 이들은 “누군가에게 <으랏파파>가 <파니 핑크> 같은 작품”(이반지하 작가)이 되기를, 그렇게 다음 시즌이 지속되기를 꿈꾼다. 지난 3월 18일 수어 통역과 함께 진행된 온라인 제작발표회에서 하이라이트 영상을 본 시청자들은 이미 ‘우리 이야기 같다’고, ‘내가 기다려온 이야기’가 여기 있다고 실시간으로 반응을 보여줬다. 그들을 포함해 <으랏파파>를 보게 될 이들을 향해 백현주 배우는 당부했다. “다른 나라 이야기처럼 마음 편히 시작하길 권한다. 그런데 그 거리감을 통해 내 인생 지도 속 나는 지금 어디쯤에 있는지 가늠해볼 수 있기를 바란다.”

*본 기사는 <김일란 감독, 이반지하 작가, 백현주 배우가 말하는 한국 최초 퀴어 시트콤 '으랏파파' ②>로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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