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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주한 얼굴 사이에 놓인, 우리는 모르는 것: '당신얼굴 앞에서' 영화를 성립시키는 얼룩에 관하여

[김소희 평론가의 프런트 라인]

한때 홍상수 감독의 영화가 누군가의 일기처럼 보이고 들린 적이 있다. 이제는 아니다. 일기를 써야 하는 이는 관객이다. 그의 영화는 하루의 파편들이며, 파편은 흔한 감탄조차 허락하지 않는다.

영화가 시작되면 안경을 쓴 상옥(이혜영)이 소파에 앉아 작은 노트에 무언가를 끄적인다. 그 후 아파트 단지의 전경을 보여주는 타이틀 시퀀스가 잠시 등장한 뒤, 이번에는 침대에서 이불을 덮은 채 누워 잠든 상옥의 얼굴이 보인다. 그런데 화면 밖에 앉은 누군가의 손이 상옥이 누운 침대 곁에 가만히 놓인다. 카메라가 천천히 오른쪽으로 패닝하면 상옥의 옆얼굴이 보인다. 상옥은 분명 바로 옆에서 잠들어 있는데 어떻게 상옥이 여기에 앉아 있을 수 있나. 기억하는 한 홍상수 감독의 영화에서 이런 방식으로 인물의 분화를 새기는 트릭을 사용한 적은 없다. 그의 영화가 꿈처럼 분화된 시간을 그릴 때도 숏 내부에서만은 현실적인 조건과 한계를 벗어나지 않았다. 잠시 후 잠든 인물이 깨어 처음에 상옥이 있던 소파에 나타났을 때, 그는 상옥이 아닌 상옥의 동생 정옥(조윤희)이 되어 있다.

이는 영화를 본 어떤 관객(나)의 착각을 재구성한 것이다. 누워 있던 인물은 애초에 상옥의 동생 정옥이었다. 관객이 일반적으로 두 사람의 얼굴을 혼동하도록 유도된 것은 아니다. 배우 조윤희가 홍상수 영화에 출연한 것은 처음이 아니며, 두 사람은 이목구비가 뚜렷하다는 것 외에는 별로 닮지 않았다. 실내가 얼굴을 식별하기에 어두운 편이긴 하나 그렇다고 보이지 않을 정도는 아니다. 이러한 착각에 그럴듯한 의미 부여를 해볼 수도 있다. 안경을 쓰고 등장한 첫 장면부터 영화는 실로 배우 이혜영의 새로운 얼굴을 보여준다. 다른 이의 얼굴에서 이혜영의 얼굴을 발견하는 것은 얼마간은 자연스러운 일처럼 여겨진다. 단지 배우의 새로운 모습을 보여주었다는 말로는 부족하다. 배우 이혜영의 얼굴은 매 순간 고정된 것으로 드러나는 게 아니라 시시각각 보는 사람의 심상을 반영하며 변하는 다면체의 거울처럼 보인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우리가 무언가를 볼 수 있다는 사실이 아닌, 볼 수 없다는 사실이다. <당신얼굴 앞에서>는 홍상수의 다른 영화에 비해 인물의 얼굴을 가까이 보여주는 데 인색하다. 얼굴 클로즈업이 등장하지 않는 것은 아니지만, 처음부터 얼굴 근처로 과도하게 당겨 찍은 다리 위의 대화 숏을 제외하면 대화 장면에 등장하곤 했던 인물의 얼굴 줌인은 배제된다.

마주한 둘의 대화를 보여주는 방식

영화에서 두 사람이 서로 마주 보고 앉아 대화하는 장면을 보여주는 방법은 몇 가지일까. 가장 흔한 방법은 일단 두 사람이 서로를 마주 보고 앉은 장면을 측면 풀숏으로 보여준 뒤, 오버 더 숄더 숏으로 맞은편 사람의 어깨 너머로 두 사람의 얼굴을 교대로 보여주는 것이다. 반면 홍상수 감독의 영화 속 대화 장면에서 이와 같은 방식으로 카메라 위치를 바꾼 오버 더 숄더 숏이 등장하는 경우는 거의 없다. 일단 위치가 정해지면 카메라는 찍는 장소가 변화하지 않는 한 위치를 옮기지 않는다. 감독은 카메라의 위치를 이동하지 않는 조건에서 줌인이나 줌아웃, 패닝을 통해 대화 장면을 끊지 않고 기록한다. 카메라는 마주 앉은 두 사람의 측면에 위치해 있고, 대화 도중 둘 중 한 인물의 얼굴로 줌인한 뒤 패닝으로 마주한 사람의 얼굴로 이동하는 방식을 얼마간 반복한 뒤 줌아웃을 통해 원래의 구도로 돌아와 장면을 마무리하는 것이 보통이다.

홍상수의 영화에서 일반적으로 말하는 오버 더 숄더 숏이 등장하지 않는 대신 오버 더 숄더 숏을 연상시키는 구도가 변형되어 사용된 적은 있다. 이때 누군가는 내내 정면 얼굴로, 다른 누군가는 내내 뒤통수로만 등장한다. <풀잎들>(2017)에서 배우 이유영과 김명수가 연기한 순영과 재명의 대화 장면에서 카메라는 재명의 등 뒤에 있다. 두 사람은 약간 비스듬히 앉아 서로의 얼굴을 가리지 않는다. 재명은 가끔 고개를 옆으로 돌릴 때를 제외하고는 내내 뒷모습인 채로 있다. 카메라는 줌인하는 대신 초점 이동을 통해 각각의 얼굴과 뒤통수를 흐릿하게 잡았다가 선명하게 보여주기를 반복한다. 딱 한번 카메라는 패닝해 측면 그림자를 보여주는 기이하고도 이례적인 움직임을 그린다. 대화 장면의 목적이 배우들의 대사에 있으며, 중요한 것은 대사를 분명히 하는 것이라는 기존 인식 반대편에서 홍상수 감독의 영화는 배우들의 대사에 반응하듯, 대화를 보여주는 형식에 사로잡히도록 유도해왔다.

<풀잎들>의 재명이 그랬듯, 뒷모습으로 등장하는 인물들은 대개 극에 부정적인 그림자를 드리운다. <도망친 여자>(2019)의 고양이 먹이를 주는 이웃에게 항의하는 남자(신석호)가 등장하는 숏에서 카메라는 초인종을 누르는 남자 뒤에 위치한다. 남자의 큰 키는 카메라 가까이에서 더욱 과장되어 보이고, 그의 맞은편에 차례로 등장해 나란히 선 영지(이은미)와 영순(서영화), 감희(김민희)는 실제보다 축소되어 보인다. 수영(송선미)의 집에 스토커처럼 불쑥 찾아오곤 하는 젊은 시인(하성국) 역시 거의 뒷모습으로 등장한다. 딱 한번 현관문 인터폰 화면을 통해 이들을 바라보는 감희의 시선에서 두 사람을 비추는 카메라 구도가 역전된 리버스숏이 등장한다. 여기에는 수영의 뒷모습과 젊은 시인의 얼굴이 보인다.

뒷모습으로 등장하는 인물의 기원을 따라가보면 <밤의 해변에서 혼자>(2016)의 검은 옷 남자의 형상과 연결된다. 박홍열 촬영감독이 연기한 검은 옷 남자는 영희(김민희)와 지영(서영화)이 함께 있을 때 공원에서 시간을 물으며 다가오던 뒷모습으로, 영희와 준희(송선미)가 머물던 호텔 발코니의 창을 닦던 검은 얼룩으로 화면 위에 등장했다. 검은 옷 남자는 기본적으로 재현될 수 없는 존재의 출현으로 인식되는 가운데, 카메라 내부에 들어올 수 없다고 인식되었던 프레임 밖 존재들의 직접적인 기입처럼 여겨지기도 했다.

<당신얼굴 앞에서>는 어느 때보다 많은 인물이 얼굴을 식별할 수 없는 상태로 스쳐 지나간다. 상옥이 동생 정옥과 조카 승원(신석호)이 운영하는 떡볶이 가게를 방문한 장면에서 승원 대신 그의 여자 친구(강이서)가 두 사람을 맞는다. 창가쪽에 자리한 둘을 응대하기 위해 카메라와 두 사람 사이에 선 승원의 여자 친구는 얼굴을 식별할 수 없는 뒷모습이나 옆모습의 상태로 화면 위에 어른거린다. 조금 더 결정적인 것은 상옥이 옛집을 방문한 장면이다. 재원(권해효)과의 저녁 약속 전에 잠시 자신이 살던 옛집을 찾아온 상옥은 옛집 주인(김새벽)의 배려로 매실차 한잔을 손에 들고 창고처럼 보이는 2층에 잠시 머문다. 이때 한 여자아이가 불쑥 상옥의 얼굴 앞에 나타난다. 그 아이는 상옥이 2층에서 아래쪽을 내려다보던 장면에서 집주인과 대화하는 목소리로만 등장했던 그의 딸인 것 같지만 불분명하다. 크레딧에서 확인되는 바에 의하면 목소리로만 등장한 아이와 상옥 앞에 나타난 아이는 서로 다르다. 아이가 나타나기 전 상옥은 혼자 좁은 공간의 의자에 앉아 있다. 그의 모습 위로 ‘제 얼굴 앞을 보게 해달라’는 상옥의 속다짐 혹은 기도가 보이스오버로 들린다. 아이의 출현은 마치 이에 대한 응답처럼 보인다. 아이와의 대화는 선문답 같다. 아이는 언뜻 모순된 이야기를 한다. 인천에 산다던 아이는 여기(이태원)가 우리 집이라고 말한다. 인천에도 집이 있냐는 물음에도 아니라며 여기가 우리 집이라는 말을 반복한다. 상옥은 아이에게 예쁘다고 말하며 그를 가만히 안아준다. 접촉할 수 없거나 반목하는 존재였던 뒷모습의 등장인물이 그의 맞은편에 앉은 인물과 정서적으로 교류하고 접촉하는 드문 순간이다.

얼룩들, 스크린들

아이 역의 배우 김시하는 내내 반듯하게 상옥을 바라보고 있기에 뒤통수 상태로만 영화에 등장할 뿐, 한번도 그의 얼굴이 화면 위에 노출되지 않는다. 누군가를 바라보고 선 배우의 뒷모습은 영화 속 인물과 관객이 서로 다른 것을 본다는 사실을 명시적으로 드러낸다. 인물이 볼 수 있는 것이 관객에게 제한된다. 한편 주인공과 카메라 사이에 끼어든 누군가로 인해 대상이 겹쳐서 가려진 형상은 오늘날 익숙한 풍경을 연상시킨다. 우리는 누군가의 얼굴을 가린 얼룩으로서의 휴대폰의 형상을 종종 목격한다. 수많은 얼굴과 마주 보는 곳에 각자의 휴대폰이 놓여 있다. 각자가 들여다보고 있는 것이 무엇인지는 알 수 없다. 상옥이 여러 번 강조하고 욕망한 ‘자기 얼굴 앞을 보는 것’은 휴대폰을 바라보는 행위와 반대되는 것으로 읽히는 동시에 휴대폰을 마주한 상태를 있는 그대로 표현한 것으로도 읽힌다.

<도망친 여자>에는 휴대폰을 사용하는 인물을 보여주는 인상적인 장면이 있다. 영순의 기척에 잠을 깬 감희가 창문을 열어 잠시 바깥을 바라본 뒤 근처에 있던 휴대폰을 집어 들고는 한참 들여다본다. 그가 무엇을 보고 있는지는 화면에 잡히거나 소리 등을 통해 암시되지 않는다. 그저 자다 깬 몽롱한 상태로 휴대폰에서 나온 얕은 불빛이 감희의 얼굴을 비추는 형상을 바라보게 된다. 일상에서 너무나 익숙한 모습이지만, 영화에서는 낯선 것이다. 이 장면은 감희가 극장에서 영화를 보는 장면과 연결된다. 감희가 극장에 진입하는 모습을 보여주기 전에 카메라는 화면 가득 현재 영화가 상영 중인 스크린을 담는다. 처음에는 스크린이라는 표식이 전혀 드러나지 않기에 이것이 간접 재생되는 장면인지, 촬영된 장면인지 분간되지 않는다. 그것이 재생 중인 화면을 재촬영한 것이라는 사실은 마치 스크린 위 얼룩처럼 감희가 스크린과 카메라 사이를 지나칠 때에야 드러난다. 극장에 숨어든 감희의 얼굴에는 스크린에서 반사된 빛 혹은 영사기에서 나온 빛이 비친다. 이후 극장을 나와 길 위에 선 감희는 다시 발길을 돌려 극장 안으로 들어간다. 감희의 얼굴이 그 자체로 필름이자 빛인양 카메라는 감희의 얼굴에서 출발해 수평 패닝을 통해 영사 중인 스크린으로 이동한다. 스크린에는 아까와 같은 바다와 파도 소리가 여전히 보이고 들리는데, 이번에는 흑백이 컬러로 뒤바뀐다. 영화는 마치 감희라는 존재에 반응하듯 자신의 색을 바꾼다. 그와 같은 방식으로 배우는 일종의 영사기로서 영화를 가능케 하는 존재임을 보여주었다.

<당신얼굴 앞에서>에서 스크린은 그보다 더 일상화되고 분화된 방식으로 드러난다. 상옥과 정옥의 카페 대화 장면에서, 카메라는 마주 앉은 두 사람을 줌인이나 패닝하지 않고 고정한 채 대화 장면을 바라본다. 줌인을 자주 활용하던 기존의 대화 장면 촬영 방식에 비해 누군가의 얼굴을 가까이서 관찰하거나 카메라가 실시간으로 반응하는 느낌은 덜하다. 그렇다고 고정된 숏이 대화 내용에 집중하도록 유도하는 것 같지는 않다. 이들의 대화보다 눈길을 끄는 건 영화의 배경에 놓인 온통 녹색인 공원 풍경이다. 공원의 색은 인공적인 것처럼 느껴질 정도로 쨍하다. 마치 후반작업을 위해 인물의 배경에 남겨둔 그린 스크린처럼 보인다. 고정숏은 배경이 지닌, 어딘가 인공적인 느낌을 강화한다. 가끔 화면을 가로지르며 지나가는 산책자의 움직임이 드러날 때에야 녹색 배경은 그림이 아닌 실제임이 증명된다. 그린 스크린은 단지 인물들의 배경에 놓인 것이 아니라, 대화하는 인물들을 스크린 위 얼룩으로 만든다.

상옥이 입은 연분홍색의 블라우스가 일종의 스크린처럼 보이는 순간은 그 위에 관객은 식별할 수 없는 작은 얼룩이 묻었을 때다. 상옥은 승원이 운영하던 가게에서 떡볶이를 먹다가 블라우스에 얼룩을 묻힌다. 상옥은 약속 장소에 가기 전 옷을 갈아입기 위해 급히 집으로 향하던 중, 길에서 승원을 만나 지갑을 선물로 받은 뒤 별안간 마음을 바꿔 바로 약속 장소로 향한다. 택시 안에서 상옥은 옷을 열어 얼룩이 묻은 부분을 확인한다. 마치 휴대폰을 확인하는 것처럼 상옥은 몰래 자신만의 스크린을 들여다보고는 닫는다. 어느 순간 얼룩이 묻은 부분이 보이지 않도록 매듭을 지어 묶는다. (그런데 블라우스 한쪽을 매듭지은 채로 다니는 장면이 두 사람이 떡볶이 집을 방문하기 이전에 정옥과 공원을 산책하던 장면에서 등장한 것은 왜일까.) 관객의 눈에는 옷에 묻은 얼룩이 단 한번도 보이지 않는다.영화에서 거의 유일하게 줌인이 쓰인 순간은 재원과 상옥이 파란 우산을 함께 쓴 채 인사동 소설을 나서 골목으로 빠져나가는 장면이다. 골목 한쪽에서 두 사람이 우산을 쓴 채 담배를 나눠 피우는 장면을 바라보던 카메라는 큰길로 꺾어들기 전 골목에 잠시 선 두 사람의 뒷모습을 향해 줌인한다. 둘은 어깨를 토닥이고, 서로 마주 보며 웃기도 한다. 이들의 대화와 순간은 카메라에 온전히 담길 수 없고, 관객은 알 수 없다. 이들이 선 배경으로 보이는 푸른색 셔터 위에서 두 사람은 얼굴을 드러내지 않은 일종의 얼룩이다. 관객에게는 알 수 없는 그 얼룩들이 영화를 성립시키는 결정적인 요건처럼 보인다.

접촉과 깨어남

휴대폰은 관객과 영화 속 인물이 함께 볼 수 있거나 볼 수 없는 이미지로 존재하는 대신, 시차를 담은 분명한 말로서 존재한다. 상옥이 휴대폰으로 연락을 주고받는 유일한 인물은 영화감독 재원이다. 재원은 상옥에게 전화를 걸거나 문자를 남기는 대신 음성 메시지를 남긴다. 음성 메시지는 녹음한 시점과 재생한 시점이 다르다는 점에서 촬영 시점과 상영 시점이 다를 수밖에 없는 영상 매체의 속성과 어느 정도 연결된다. 음성 메시지가 반복 재생이 가능하다는 점 역시 반복해서 똑같이 재생 가능한 디지털 영상 매체의 속성과 통한다.

재원이 상옥에게 보낸 두개의 음성 메시지는 약속과 그것의 변경에 관한 것이다. 첫 번째 메시지에서 재원은 약속 장소를 인사동으로 변경한다. 장소와 시간이 변경되면서 상옥은 변경된 장소로 이동하는 대신 제3의 공간인 옛집이 있는 이태원으로 방향을 바꾼다. 두 번째 메시지에서 재원은 영화 촬영 여행을 떠나기로 한 어제의 약속이 유효한지를 물은 뒤 그 약속을 이행할 수 없음을 말한다. 그의 음성 메시지를 확인한 상옥은 참을 수 없다는 듯 길고 큰 웃음을 터뜨린다. 메시지가 반복 재생되면서 웃음은 더 커진다. 이루지 못한 내일의 약속과 죽음의 그림자가 드리운 상념은 이미 지나갔거나 아직 오지 않았을 뿐이며, 말로서 따라잡을 수 없는 것이다.

얼굴 앞을 보기를 소망하는 상옥의 상태는 홍상수 감독의 영화를 보는 가장 좋은 관객의 태도를 보여주는 것 같다. 상옥은 홍상수 영화 속 다른 어떤 인물보다 무언가를 제대로 보려고 하는 인물이다. 무엇보다 상옥은 관객에게 보이는 얼굴로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누군가를 보는 얼굴로 존재한다. 첫 장면의 장소와 상황은 마지막 장면에서 고스란히 반복된다. 여전히 정옥은 잠들어 있고, 상옥은 깨어 있다. 상옥이 정옥의 손을 가만히 터치하는데 정옥은 깨어나지 않은 채 뒤척여 카메라로부터 고개를 돌린 채 눕는다. 상옥은 정옥의 얼굴이 보이는 곳으로 자리를 옮긴 뒤 그의 잠든 얼굴을 향해 속으로 다정히 말을 건다. 그 순간 상옥에게는 정옥의 얼굴만이 스크린이자, 영화다. 홍상수 감독은 영화의 존재를 지탱하는 배우에 대한 탐색을 넘어 도처에 존재하는 영화 아닌 영화의 조건들과 영화가 존재하지 않는 곳에서 인간이 어떻게 이미 영화를 사는지를 보여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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