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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경희의 SF를 좋아해] 워즈가 좋아요, 트렉이 좋아요?
이경희(SF 작가) 2021-12-02

<스타워즈>와 <스타트렉> 중 어느 쪽이 더 좋냐는 질문은 정말 난제 중의 난제다. 사진은 <스타워즈> 시리즈 중에서.

<스타워즈>와 <스타트렉> 중 어느 쪽이 더 좋냐는 질문은 정말 난제 중의 난제다. 엄마가 좋냐 아빠가 좋냐고 물으면 고민은 되겠지만 솔직히 엄마가 좀더 좋다고 말할 것 같은데, 이 질문만은 도저히 답을 내릴 수가 없다. 두 작품을 좋아하는 이유가 전혀 다르기 때문이다.‘워즈’와 ‘트렉’은 우주의 끝과 끝에 위치한 스페이스 오페라다. 전혀 다른 시공간을 점유하고 있는 두 우주는 도무지 공통점이라고는 찾아볼 수가 없다. 서로 너무 달라 접촉하면 쌍소멸하는 게 아닐까 싶을 정도다.

<스타워즈>는 신비주의 초능력 칼잡이와 카우보이가 수선을 떨며 전쟁을 벌이는 유머러스한 영웅담이다. 등장인물들도 대개 심부름꾼, 군인, 상인, 범죄자, 제다이 등 과학과는 조금도 인연이 없을 듯한 인상을 강하게 풍긴다. 반면 <스타트렉>의 우주 여행객들은 다들 조금씩 과학자다. 과학자들이 고상한 말투로 과학적인 척하며 별로 과학적이지도 않은 문제를 과학적으로 해결해나가는 것이 이 시리즈 전통의 미덕이다. 가끔, 아니, 솔직히 자주 전쟁을 벌이긴 하지만 어쨌든 엔터프라이즈호는 군함이 아니고 주인공들의 주 임무 역시 탐사와 모험이다.

그러다보니 한쪽만 좋아하고 다른 쪽은 배척하는 팬들의 수도 적지 않은 듯하다. 워즈 팬의 입장에서 <스타트렉>은 지나치게 점잖고, 트렉 팬의 입장에서 <스타워즈>는 지적이지 못하다. (헉헉… 표현의 수위 조절이 매우 힘들었다.) 물론 나처럼 둘 다 좋아하는 사람들도 꽤 많지 않을까? 전혀 다른 맛의 아이스크림이지만 둘 다 맛있는 건 사실이니까. 아마 나 같은 취향을 가진 누군가가 문득 이런 생각을 했던 것 같다. 워즈와 트렉의 장점만 쏙쏙 뽑아내 새로운 시리즈를 만든다면 얼마나 재미있을까. 쉴 새 없이 수다를 떠는 카우보이들의 앙상블과 거대한 스케일의 우주 전쟁, 무협지를 방불케 하는 무술 대결에 지적이고 과학적인 외계 행성 탐험과 모험까지 곁들여진 이야기를 말이다. 아, 물론 신비로운 제다이 마법도 빼놓을 수 없지.

<스타게이트 SG-1>이 딱 그런 작품이다. 워즈와 트렉의 규칙들을 적절히 가져다 섞어놓은 이종교배의 산물. 동명의 영화 <스타게이트>를 원작으로 독자적인 후속 스토리를 펼쳐나가는 이 TV시리즈는 그야말로 덕심의 결정체라 부를 만하다.

우선 간단히 줄거리를 소개하자면 이렇다. 먼 과거 은하계에 ‘고대인들’ 혹은 란티안(아틀란티스인)이라 불리는 초고도문명이 존재했고, 이들은 ‘스타게이트’라는 고리 모양의 웜홀 전송장치를 많이 만들어 은하 곳곳의 행성에 뿌려두었다. 고대인의 후손인 지구인들은 우연히 땅속에 파묻힌 스타게이트를 발견하게 되고, 우리의 주인공(당연히 미군이다. 할리우드영화니까)은 신비한 전송장치의 문을 열고 온 우주를 탐험하기 시작한다. 물론 이들의 모험은 순탄치 않고, 게이트를 땅속 깊은 곳에 묻어둔 데에는 다 그만한 이유가 있었다.

시리즈의 핵심 아이디어는 피라미드 외계인 음모론에 기반하고 있다. 먼 옛날 우리의 조상님들이 외계인의 지배를 받았고, 피라미드는 외계 과학의 산물이라는 것. 신화 속 신들의 이름이 사실은 외계인의 이름이라는 조금 뻔한 설정. 롤란트 에머리히가 감독한 원작 영화 <스타게이트>에서 주인공 오닐과 잭슨 박사는 이집트 신화의 최고신 ‘라’와 사투를 벌인다. 시리즈의 뼈대가 될 몇 가지 아이디어를 빼면 영화 자체는 썩 흥미롭진 않다. 백인 주인공이 아랍 사막 민족을 독재자로부터 구원하고 핵폭탄도 터뜨리고 초콜릿도 나눠주는 뻔한 액션영화니까. 응? 이거 얼마 전 개봉한 무슨 영화랑 좀 비슷한 것 같기도… 아, 아니다.

작중 악역으로 등장하는 이집트 신들은 인간의 몸을 숙주처럼 기생하며 조종하는 물뱀 같은 외양의 외계 종족으로, 스스로를 신으로 칭하며 우주 곳곳에서 폭군 행세를 하고 있다. 반면 토르와 로키를 비롯한 북유럽 계통의 신들은 흔히 말하는 ‘그레이’ 외계인의 모습을 하고 이들과 적대 중인 상황. 아무튼 뭐, 대충 이런 식이다.

주인공들이 팀을 이뤄 외계 행성을 탐험한다는 점에서, 이 시리즈는 <스타트렉>과 매우 닮았다. 엔터프라이즈호가 스타게이트 사령부로, 트랜스포터가 게이트로 바뀌었을 뿐 구조적으로 큰 차이가 없다. 어차피 <스타트렉>에서도 우주선이 행성에 직접 착륙하는 일은 거의 없으니까 말이다. 시리즈 후반에 이르면 더욱 노골적인 오마주가 이루어진다. 외계 기술을 습득한 주인공들은 직접 우주선을 타고 여행하기 시작하는데, 함교 디자인부터 CG 연출까지 <스타트렉>의 영향이 강하게 묻어난다. 심지어 공격받으면 사방에서 불꽃이 튀는 것까지 똑같다. 시리즈의 주적 중 하나인 ‘레플리케이터’는 전형적인 ‘보그’ 스타일 외계인이고.

군인, 과학자, 외계인, 인문학자. 전사 둘에 학자 둘로 구성된 탐사팀 멤버 역시 딱 워즈와 트렉을 반반 섞어놓은 느낌. 팀의 리더이자 군인인 오닐 대령은 누가 봐도 한 솔로의 군인 버전이고, 과학자 카터는 정확히 <스타트렉>의 과학장교의 역할을 수행한다. 다들 광선총을 쏴대는 와중에 홀로 봉을 휘두르는 외계인 틸크는 이리 보나 저리 보나 제다이를 수행 중인 털 없는 츄바카다. 아, 나중엔 진짜 제다이도 등장한다. 자세한 내용은 스포일러라 말하기 어렵지만. 이들이 수다스럽게 앙상블을 이루는 장면들 역시 <스타워즈>의 티격태격과 닮아 있다.

여기에 <스타트렉>식 과학 토론과 해답 풀이 과정이 베이스로 깔리게 되면 <스타게이트>만의 유니크한 분위기가 완성된다. 주인공들이 겪는 상황은 <스타트렉>과 비슷한데, 오직 이성과 과학으로만 상황을 헤쳐나가야 했던 <스타트렉>의 주인공들과 달리 이들에겐 <스타워즈>식 빈정거림과 무책임한 임기응변 같은 선택지가 추가로 주어지는 것이다. 알쏭달쏭한 이론을 늘어놓는 과학자들과 과학이라면 진절머리내는 군인들의 유머러스한 상황극 역시 꽤 독특한 재미를 만들어낸다.

요약하자면 이 시리즈는 트렉처럼 지적으로 탐험하면서도 워즈처럼 경쾌한 액션과 수다를 떠는 자신만의 절묘한 절충지대를 찾아내는 데 성공했다. 더불어 선배들을 패러디하고 오마주하는 진한 덕심까지 갖추고서. 나쁘게 말하면 이것저것 가져다 기워붙인 패치워크지만, 단지 이것저것 베낄 뿐이었다면 10년간 열개의 시즌과 두편의 스핀오프까지 이어지는 장수 프랜차이즈가 되진 못했으리라. 앞선 선배들을 재료로 이야기의 기반을 다진 <스타게이트>는 시즌을 거듭하며 점차 자신만의 캐릭터와 세계를 완성해간다. 모방도 예의를 갖춰 정성스레 하다보면 뭐라도 이루기는 하는 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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