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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망의 붉은낙인 <수취인불명>
2001-05-26

국내에서 상대적으로 저평가된 감독을 뽑으라면 단연 김기덕 감독(41)이 첫번째 후보다. 그는 영화에 관한 정규 교육이나 충무로 도제 방식을 거친 적이 없지만, <악어> <야생동물보호구역> <파란대문> 등 일련의 저예산영화에 인간의 거친 본성을 날 것 그대로 담은 `불편한 영화`를 만들며 자기만의 작품세계를 만들어왔다. 그리고 지난해 <섬>이 “시적인 영화”라는 평가를 얻으며 베니스영화제의 경쟁작 대열에 서면서 국내보다 해외에서 더 지명도가 높은 감독이 됐다.

6월2일 개봉을 앞둔 <수취인불명> 역시 마찬가지다. 칸영화제 폐막 직전, 현지에서 열린 시사회장에는 베니스영화제 집행위원장 등 국제영화제 관계자들이 빼곡히 들어찼고, 이후 산세바스찬영화제의 경쟁부문 초청을 시작으로 토리노·헬싱키·스톡홀름·함부르크 등의 국제영화제가 잇따라 출품을 요청하고 있다. 일찌감치 국내에서 시사회를 가졌지만 언론과 평단에서 이렇다할 반응을 보이지 않고 있는 것과 대조적이다.

“유명 배우도 없고, 제작비를 10억 이상 들이는 영화도 아닌 내 작품을 관객들이 많이 찾기는 어려운데, 국내 비평가들도 관객의 눈높이 정도에서 바라보고 있는 것 같다. 반면 해외에서는 영화 100년사 안에 없는 새로운 전형, 새로운 표현주의를 찾아내려고 애쓰고 있다. 외국인은 한석규, 최민식 같은 배우를 모른다. 다만 작품 그 자체로 평가할 뿐이다.”

<야생동물보호구역>에서 남북한의 두 청년이 이국의 거리에서 처절하게 스러져가는 모습을 그린 바 있지만 <수취인불명>처럼 작정하고 만든 사회적 발언은 아니었다. <수취인불명>은 미군기지 주변의 질척거리는 풍경에서 누구도 헤어나지 못하는 비극을 그렸다. 잃어버린 한쪽 눈을 되찾기 위해 미군과 몸거래를 해야하는 17살 은옥(반민정)이나 미국으로 훌쩍 가버린 흑인병사를 아버지로 두고 툭하면 어머니(방은진)에게 뭇매를 가하는 혼혈아 창국(양동근)이 그렇듯 이번 영화의 캐릭터들도 모두 터질듯한 절망과 폭력에 휩싸여있다.

“<수취인불명>은 지금까지 나온 김기덕의 영화 가운데 가장 강력한 것으로, 한국 현대사의 어두운 진실들 위에 구축된 풍부하고 복합적인 멜로드라마이다. 김기덕의 작품은 언제나 강력하게 시각적인데, 여기서도 고통과 분노를 표현하는 선명한 이미지들이 연이어 등장한다.” 영국의 영화평론가 토니 레인즈의 평가다.

김 감독은 “영화의 80%는 실화”라며 “27살에 자살한 혼혈아 친구를 창국으로, 지금도 만나고 있는 애꾸눈인 또 다른 친구를 은옥으로 묘사했고, 이들이 나의 화자”라고 말했다. 제작중에 흘러나온 소문 가운데 `압권`은 인육을 먹는 장면이 있다는 것이었다. 영화에서는 숨진 창국의 몸을 그의 어머니가 먹는 게 은유적으로 표현됐다.

“창국의 어머니로서는 아들을 이 땅에 묻는 것조차 치욕스러웠을 것이다. 이 땅이 그들에게 매어놓은 죄의식은 그런 것이다. 어머니가 아들을 다시 자기 몸 속으로 집어넣어 환원하려는 이미지다.”

<수취인불명>이 개봉을 앞두고 있지만 김 감독은 벌써 차기작 <나쁜 남자>의 제작에 들어갔다. 7월이면 촬영이 끝나는데, 그 어느 때보다 인간에 대한 회의가 짙어보인다. “깡패 두목이 순수하게 바라봤던 여대생을 매춘부로 만들어가는 과정을 그린다. 몇백만원에 육체포기각서를 써주는 현실에서 과장된 얘기도 아니다. 이전 영화들의 인물은 위악적이지만 인간이기에 용서하고 용서받을 수 있었다. 하지만 이번에는 인간이란 누군가에게 피해를 주는 게 피할 수 없는 운명이라는 걸 보여준다. 비관적이라기보다 현실적인 접근이다.”

이성욱 기자 lewook@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