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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pecial] <레퀴엠> 감독 대런 아로노프스키의 영화세계
2001-07-12

한 감독이 지닌 재능의 진정한 밀도는 종종 그의 두 번째 영화로 가늠된다. 그런 의미에서 올해 개막작 <레퀴엠>은 대런 아로노프스키(32)에게 있어서 쿠엔틴 타란티노의 <펄프 픽션>같은 두 번째 영화로 기억될 만한 작품이다. 흑백의 검소한 외양과 화려한 재능으로 빚어진 6만 달러짜리 장편 데뷔작 <파이>가 보여준 여러 시도를 <레퀴엠>은 좀 더 넓은 캔버스와 풍성한 칼라로 업그레이드한다. 두 영화를 관통하는 것은 인간의 우스꽝스런 연약함과 집착에 집요한 관찰과 그 이면에 엷게 밴 아로노프스키의 도덕적 근심, 그리고 영화적 기교의 발명과 탐험이다.

수학을 소재로 한 흑백영화 <파이>가 스토아적인 정밀함과 세련된 화면구도를 탐구했다면, 중독을 다룬 <레퀴엠>은 고통과 희열을 감염시키는 칼라의 감각적 힘을 자랑하는가 하면 스크린을 쪼개는 파격까지 서슴지 않으며 입체파 화가들이 그랬듯이 전통적인 영화적 공간을 재구성하는 패기를 발휘한다.

<파이>로 미국 독립 영화의 신성으로 불리고 이어 골든 글로브와 오스카의 손짓을 받은 <레퀴엠>을 통해 주류영화 저널리즘의 주목까지 끌어낸 아로노프스키의 고향은 그의 영화들의 주소지인 브루클린. 최근 그가 영화화 중인 <배트맨>의 원작 만화를 탐독하고, <레퀴엠>의 원작자 허버트 셀비의 <브루클린으로 가는 마지막 비상구>에 감동하며 성장한 아로노프스키는 하버드에서 실사영화와 애니메이션을 공부한 후 졸업 과제로 만든 단편 <수퍼마켓 싹쓸이>로 몇 개의 영화상을 거머쥐면서 영화 영재의 이력을 쓰기 시작했다.

친구들에게 100달러씩 모금해 만든 첫 장편 <파이>에 배트맨 만화의 원작자 프랭크 밀러의 흑백 작품 <죄악의 도시>의 스타일이 원용되고, <레퀴엠>의 컷 분할과 자유자재의 리듬이 만화와 애니메이션에 근접하는 것도 우연은 아닌 셈.

선댄스에서 수상한 <파이>가 1998년 아티잔에 의해 극장 개봉되면서 아로노프스키의 재주는 이내 이목을 끌었다. 올리버 스톤이 그렇듯 이미지를 구사해 관객의 신경과 감성을 교묘히 주무를 수 있는 그의 재능은 충분히 상품화될 수 있는 종류의 것이었고 워너 브러더스는 최대 프랜차이즈 <배트맨>의 운명을 그의 손에 맡긴다. 숭배해 온 만화 작가 프랭크 밀러와 함께 배트맨 동굴에 칩거 중인 아로노프스키가 염두에 두고 있다고 알려진 또다른 신작은 ‘포스트-매트릭스’라는 별칭을 얻을 만한 형이상학적 내용의 SF영화이다.

그러나 아로노프스키는 ‘MTV식 영화’라는 표현을 최대 모욕으로 여길 만큼, 내러티브에 추진력을 주지 못하는 형식적인 장치를 싫어한다고 여러 인터뷰에서 밝혀왔다. 애니메이터에 스스로를 비유할 만큼 프레임 하나하나를 파고드는 일에 기쁨을 느끼긴 하지만 거기에 심리적 인과 관계나 지적 자극이 없다면 헛일이라는 믿음이, 언뜻 보기는 유행을 타는 서퍼 같아도 몸 속 어딘가에 모범생의 유전자를 품고 있는 듯한 아로노프스키 감독의 입장이다.

김혜리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