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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모] 현실을 연기한 배우

김지영(1938~2017)

<마파도2>(2007) 개봉 당시 배우 김지영을 인터뷰한 적 있다. 아마도 지금의 젊은 관객에겐 주로 감초 캐릭터 같은 ‘엄마’로 기억될 것이다. <라이터를 켜라>(2002)의 봉구(김승우) 엄마, <나의 결혼원정기>(2005)의 만택(정재영) 엄마, <아들>(2007)의 강식(차승원) 엄마, <해운대>(2009)의 만식(설경구) 엄마, <도가니>(2011)의 인호(공유) 엄마, <서부전선>(2015)의 영광(여진구) 엄마가 바로 그다. 그처럼 오래도록 화려한 주연으로서의 삶을 살아온 것은 아니지만, 그 이전 1970~90년대에 이르기까지 주로 임권택, 김수용 감독의 작품들에서 사실감 넘치는 연기를 선보이는 인상적인 조역으로 작품을 빛냈다. 요즘 배우로 예를 들자면, 거침없고 개성 넘치는 라미란 배우 같은 느낌이랄까. 거의 모든 영화가 후시녹음으로 만들어지던 당시 환경으로 보자면, ‘대사’가 아닌 ‘말’을 하는 진정 보기 드문 사실주의 스타일의 배우였다.

1938년생인 김지영은 초등학교 2학년 때 광복을 맞았고, 그때 고향인 함경도를 떠나 서울로 왔다. 어렸을 때는 할아버지가 ‘넌 성격도 곧고 거짓말도 못하니까 법조인이 돼야 한다’고 해서 꼭 법관이 되겠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한국전쟁이 발발하면서 다 무산됐다. 어쨌건 그렇게 어려서부터 유랑극단이니 영화 같은 것을 구경 간 적도 한번 없고 이른바 ‘딴따라’라는 세상과는 완전히 담을 쌓고 살았다. 그런데 아버지가 옛날 그 유명한 배우 김승호와 형님, 동생하던 사이였다. 그러던 중 전쟁이 끝나고 고등학교 졸업반이 되니까 집에서는 시집보낼 생각만 했다. “그게 너무 싫은데 암만 해도 가만있으면 시집가게 생겼더라. (웃음) 그래서 피신할 요량으로 김승호 아저씨한테 쫓아가서 일을 시켜달라고 했다. 그래서 작은 역할이나마 연기생활을 시작하게 됐다.”

<길소뜸>

배우로 데뷔해 인정받기까지

자신의 말에 따르면 “결혼하기 싫어서 시작한 일”이 바로 배우였다. 그렇게 주연 김승호 외에 신성일, 엄앵란도 출연했던 김수용 감독의 <상속자> (1965)로 데뷔하게 된다. 그때부터 김수용 감독의 이른바 ‘문예영화’에 거의 대부분 출연하게 됐고, 주변에서 칭찬을 많이 해주니까 ‘내 속에 이런 끼가 있었던 건가?’ 하고 본격적으로 배우라는 직업에 호기심을 갖게 됐다. 이후 스스로 “거의 ‘전속’으로 한 작품도 빠지지 않고 출연했다”고 말하는 임권택 감독과 많은 작품을 함께했다. “배우로서도 인정받고, 나 스스로 처음 자부심을 갖게 해준 임권택 감독님의 영화들이 기억에 많이 남는다”라는 게 그녀의 회고다. 임권택 감독 또한 “(김)지영씨처럼 대사를 맛깔나고 실감나게 구사하는 배우는 드물었다. 그래서 대사를 많이 줬다”고 회고했다.

이후 최하원 감독의 <초대받은 사람들>(1981)로 대종상시상식에서 특별연기상을 받으며 배우로서 첫 번째 결실을 맺게 된다. 하지만 거기에는 남다른 사연이 있다. “천주교 신자로서 자식들이 죽어가는 모습을 보면서 하나님을 배교할 거냐 말거냐 하는 극한 상황에 놓인 인물이었다. 매 맞아서 얼굴 깨지고, 입술 부르튼 분장도 나 혼자 다 했다. 또 눈이 충혈되어야 하는 장면이 있어서 미친 척하고 호랑이기름을 구해다 발랐다가 정말 눈알 빠지는 줄 알았다. 해외에는 눈 충혈되게 하는 안약이 있다는데 그때만 해도 우리나라에 그런 게 있었나 뭐. (웃음)” 이 작품으로 많은 사람들이 ‘대종상 여우조연상감’이라고 치켜세웠지만, 그때만 해도 외화 쿼터를 비롯해 수상 결과에 이런저런 ‘비리’가 있던 때였다. “당시 많은 사람들이 만장일치로 나를 대종상 여우조연상감이라고 했다. 그런데 어떤 미친 사람이 그걸 뺏어서 자기 작품에 줬다. <초대받은 사람들>에 함께 출연했던 원미경과 내가 그렇게 나란히 주연, 조연상을 놓친 거다. 오죽하면 심사위원들이 너무 아깝다고, 말도 안 되는 일이라고 합의를 해서 특별연기상을 줬다.”

연기 인생에서 기억에 남는 작품들을 물었더니 한치의 망설임도 없이 <길소뜸>(1985)이라고 했다. <신궁>(1979), <짝코>(1980), <안개마을>(1982) 등 당시 임권택 감독의 거의 모든 영화에 출연하던 때였다. 신성일과 김지미가 주연인 이 영화에서 김지영은 두 사람이 낳은 아들의 아내 역을 맡아 <길소뜸>으로 대종상 여우조연상 후보로 올랐는데 앞서와 비슷한 경우로 “뺏겨”버렸다. 두번 연달아 상을 뺏겼다고 생각하니 너무 분해서 임권택 감독을 찾아가 “다른 감독님 작품 말고 정말 임권택 감독님 작품으로 연기상 한번 받아보고 싶다”고 하소연을 했고, 임권택 감독은 <아다다>(1987)의 시어머니라는 제법 큰 역할을 맡겼다. 역시나 뛰어난 연기를 선보였지만 같은 해에 한 감독의 작품 2개가 나란히 후보로 오를 수 없다는(임권택 감독은 같은 해 <연산일기>도 연출했고, 김지영 역시 두 작품 모두 출연했다) 이상한 규정에 발목이 잡혀 여우조연상 후보로도 오르지 못했다. 그 기억을 떠올리며 “유독 그해에만 그런 규정을 들먹여 상을 못 받게 한 사람이 전에 내 상을 빼앗아간 사람이기도 했다. 그래서 그 사람 집에 불 지르려고 휘발유통 들고 찾아가기도 했다”고 농담 섞어 말할 때는 배우로서의 단단한 자부심이 느껴졌다.

<아라한 장풍대작전>

극의 사실성을 높인 사투리 구사력

김지영의 탁월한 사실적 연기 스타일의 바탕이 된 것은 사투리였다. 영화나 드라마에서 경상도, 전라도 사투리는 물론 각 지방 욕까지 차지게 구사했다. 연기자로서 살아남기 위한 방편으로 사투리를 ‘배운’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지방 촬영 가서 시간이 남으면 논이든 밭이든 시장이든 찾아가서 사투리를 익혔다. 내 머리 속에 녹음테이프가 있다면 아마 수천통은 될 거다. 그렇게 세상일이란 게 공짜가 없다. 나중에 주변 사람들이 내 고향이 어딘가를 두고 내기도 하더라. (웃음) 사투리 하나로 극의 사실성이 확 살기도 하고 떨어지기도 한다.” 그를 바탕으로 이후 배창호의 <꼬방동네 사람들>(1982), <황진이>(1986), 이장호의 <무릎과 무릎 사이>(1984), <이장호의 외인구단2>(1988), 박광수의 <칠수와 만수>(1988), 강우석의 <달콤한 신부들>(1988), 곽재용의 <비오는 날의 수채화>(1989), 장선우의 <우묵배미의 사랑>(1990), 정지영의 <남부군>(1990) 등 당대 젊은 감독들의 작품에 비중 따질 것 없이 꾸준히 출연하며 관록을 뽐냈다. 이런 부지런함에도 사연이 있다. 두 아이의 엄마였고 남편이 간경화로 오래도록 병원 신세를 지면서 결국 세상을 떠서 “배운 게 도둑질이라 당장 먹고살아야 해서 다시 연기를 해야 했기 때문”이었다. 아이러니하게도 결혼하라는 말이 듣기 싫어서 배우 생활을 시작했던 그녀가 그것 때문에 다시 카메라 앞에 선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불륜>

최근까지도 꾸준히 작품 활동을 해왔지만, 특별히 기억에 남는 작품은 제17회 부산국제영화제에 초청된 단편 <불륜>(2012)이다. 거동이 불편한 두 노인 이 여사(김지영)와 김 노인(신구)이 서로 사랑하며 살아간다. ‘불륜’은 역설적 제목으로, 불합리한 부양의무자 기준으로 두 노인은 위장이혼을 한 채 몰래 살아간다. 현재의 기준으로는 수급희망자가 부양의무자의 능력이 없거나, 부양받지 못한다는 사실을 입증해야만 지원을 받을 수 있기 때문이다. 자신의 경험이 떠올라서인지, 영화의 취지에 공감한 김지영은 선뜻 출연에 응했다고 한다. 신구와 김지영, 두 배우가 보여준 연기는 그 무엇으로도 흉내낼 수 없는 연륜의 깊이였다. 그렇게 또 한명의 대배우가 우리 곁을 떠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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