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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크니>의 데이비드 호크니에 대한 5가지
이주현 2019-08-07

당신이 호크니에 대해 아는 것 혹은 모르는 것

Self Portrait with Red Braces” 2003 Watercolour on paper 24" x 18 1/8" © David Hockney

데이비드 호크니 전시(서울시립미술관, 3월 22일~8월 4일)에 다녀와 SNS에 인증 숏을 남기는 게 ‘인싸’의 증명이 될 만큼 호크니 전시는 화제다. 지금까지 30만명 넘는 사람들이 전시회를 찾았다. 전시는 끝나가지만 데이비드 호크니의 삶을 더 깊숙이 들여다볼 수 있는 다큐멘터리 <호크니>가 개봉한다. 호크니 본인의 목소리는 물론 지인들의 이야기를 통해 현대미술의 거장 데이비드 호크니를 만날 수 있다. 당신이 데이비드 호크니에 대해 알아야 할 5가지를 정리했다.

데이비드 호크니

‘살아 있는 현대미술의 전설’, ‘가장 영향력 있고 인기 있는 예술가’, ‘세계에서 가장 비싼 작가’라는 말까지 모두 데이비드 호크니를 수식하는 말이다(참고로 2018년 호크니의 <예술가의 초상>(1972)이 생존 작가 작품 중 경매 최고가인 9031만달러에 낙찰됐다. 하지만 6개월 뒤 제프 쿤스의 <토끼>가 9107만달러에 경매돼 호크니의 기록을 경신했다). 호크니는 1937년 영국 요크셔 브래드퍼드에서 태어났다. 영국왕립예술학교에 다니던 20대 때 런던에서 개인전을 열 만큼 일찌감치 주목받는 아티스트였다. 금발에 뿔테 안경을 쓴 호크니는 미술계와 패션계의 스타였고, 1960년대 영국 팝아트 운동의 중심에 선 젊은 작가였다. 무엇보다 제2차 세계대전 이래 영국의 그 어떤 미술가도 호크니만큼 언론과 대중의 관심을 받은 이가 없었다. 영화 <호크니>는 이런 질문을 던지며 시작한다. “작가님은 왜 인기가 있다고 생각하나요?” 호크니가 답한다. “대상을 바라보는 방법과 그것을 단순화해서 표현하는 데 관심이 많아요. 그런 의도를 전달할 수 있다면 사람들이 반응하겠죠. 누구나 볼 수 있잖아요. 보려는 의지가 얼마나 강한지에 달려 있겠죠.” 호크니는 세계를 바라보는 방식을 탐구하며 평면의 회화를 2차원 이상의 것으로 승화시킨 작가다.

로스앤젤레스

“A Bigger Splash” 1967 Acrylic on canvas 96" x 96" © David Hockney

“LA는 생각했던 것보다 세배는 좋았어요.” 호크니를 일컫는 말 중엔 ‘수영장의 화가’라는 표현도 있다. 호크니의 대표작인 <더 큰 첨벙>(1967)을 비롯해 <베벌리힐스의 가정주부>(1966), <일광욕하는 사람>(1966), <닉의 수영장에서 나오는 피터>(1966) 등이 모두 LA에서 탄생한 그림들이다. 호크니는 1964년부터 로스앤젤레스 샌타모니카 인근에 둥지를 튼다. <호크니>에서 호크니는 영화를 좋아했던 아버지의 이야기를 꺼내며 영화가 자신에게 미친 영향에 대해서도 얘기한다. 할리우드에 대한 호기심, 아름답고 에로틱한 서퍼보이들의 모습, 성적 자유와 활기로 가득한 거리, 이 모든 요소들이 LA라는 도시와 사랑에 빠지게 만들었다. LA는 호크니에게 자유와 해방의 도시였고, 이 도시에서 호크니는 동성애자로서의 정체성을 드러내는 작업, 물의 이미지 표현에 대한 탐구, 사진을 활용한 작업 방식 등을 이어갔다. 무엇보다 인생의 중요한 사람들을 이 시기 LA에서 만난다.

동성애

데이비드 호크니와 피터 슐레진저 © David Hockney

남자들 사이의 우정과 사랑은 호크니의 초기작에서부터 확인할 수 있다. 호크니는 왕립예술학교에 다니면서 동성애 성향을 공개적으로 인정했는데, 마르코 리빙스턴은 책 <데이비드 호크니>에서 커밍아웃이 호크니의 작품에 미친 영향을 이렇게 설명한다. “새로운 자신감은 이전보다 더욱 솔직함을 추구하게 했다. 불과 몇달 사이에 호크니는 조용하고 내성적인 사람에서 대담하고 사교적인 사람으로 바뀌었고, 초기 작품의 폐쇄적이고 우울한 특성은 사라지고 정신없을 정도로 활력이 넘쳐났다.” 존 레치의 소설 <밤의 도시>에서 영향받아 탄생한 회화들이나 그리스 시인 콘스탄틴 카바피의 시에서 영감을 얻어 제작한 ‘에칭 시리즈’에도 동성애적 주제가 드러난다. LA에서 만난 연인 피터 슐레진저는 호크니의 삶과 작품 모두에 영향을 미친 인물이다. 호크니는 슐레진저를 모델로 한 드로잉을 여러 점 남겼고, 대표작 <예술가의 초상>은 슐레진저와의 이별 뒤 완성한 그림이다. 슐레진저와의 이별 그리고 1980년대 에이즈로 잃어버린 친구들은 호크니에게 큰 아픔으로 남았다.

피카소

“Mr. and Mrs. Clark and Percy” 1970-1971 Acrylic on canvas 84" x 120" © David Hockney

호크니는 1960년대부터 피카소에 대한 존경을 표해왔다. 피카소의 폭넓은 창조력과 자유로운 태도 및 양식은 호크니에게 큰 영향을 미쳤다. 1973년 피카소 사망 이후 제작한 일련의 드로잉과 판화에서 호크니는 피카소에 대한 영향력을 직접적으로 드러낸다. 에칭 작품 <화가와 모델>(1973~74)에선 피카소와 대면하는 나체의 호크니가 등장하는데, 서로를 마주보고 있는 두 사람의 구도는 피카소가 즐겨 취한 ‘미술가와 모델’이라는 주제를 떠올리게 한다. 일련의 에칭 연작 <푸른 기타>(1976~77)도 피카소에 대한 존경으로 탄생했다. 1976년에 읽은 월러스 스티븐스의 장시 <푸른 기타를 든 남자>와 피카소가 청색시대에 그린 <나이 든 기타리스트>(1903)를 바탕으로 호크니는 드로잉 작업을 시작했고, 그것을 바탕으로 20점의 에칭을 완성했다. 이는 20세기 후반 판화사에서 가장 중요한 작업으로 평가된다.

21세기의 호크니

“Woldgate Before Kilham”을 그리는 데이비드 호크니, 2007 © David Hockney

2000년대 들어 고향 요크셔에 정착한 호크니는 시시각각 변하는 자연을 캔버스에 옮긴 대형 회화들을 제작했다. <와터 근처의 더 큰 나무들>(2007)이 대표적이다. 20세기 후반에 시작한 그랜드캐니언 풍경화와 마찬가지로, 요크셔에서 매일 그린 풍경화는 호크니가 여전히 시간과 공간, 보는 행위에 대한 탐구를 계속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회화뿐 아니라 판화, 사진, 무대 디자인 등 여러 매체를 활용하고 경험한 호크니는 21세기 들어서도 디지털 기술을 활용한 작업을 이어가고 있다. 그리고 그러한 작업은 모두 회화의 가능성에 대한 몰두로 회귀한다. “무언가를 관둔다는 것은 그것을 거부한다는 뜻이 아니다. 다른 곳을 보고 싶다는 의미로 볼 수 있다.” 세기가 바뀌며 호크니의 작품도 변했다. 호크니가 말했듯 그 변화는 끊임없이 새로운 것을 보고 싶어 한 예술가의 마음이다. 호크니가 반세기 동안 꾸준히 사랑받는 작가가 될 수 있었던 것도 바로 이 멈추지 않는 호기심과 실험 때문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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