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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강길 추모] 카메라를 든 어부, 그를 기억하며

<살기 위하여> <설악, 산양의 땅 사람들> 만든 다큐멘터리스트, 이강길 감독을 추모하다

지난 1월 25일 향년 53살로 이강길 감독이 세상을 떠났다. 독립다큐멘터리는 변방의 영화, 비주류, 언제나 낯선 영역이라 그의 이름 또한 생소할 것이다. 하지만 독립다큐멘터리를 업으로 삼고 있는 사람들에게 이강길 감독은 생소함을 넘어 경외의 대상이었다. 환경다큐멘터리의 장인, 독립다큐멘터리 안에서도 가장 촬영을 잘하는 사람, 카메라를 든 어부. 모두 그를 수식하는 말들이다. 이강길 감독을 독립다큐멘터리 감독으로 온전히 담아내려면 다큐멘터리 대표 단체인 ‘푸른영상’ 활동을 시작한 1999년부터 이야기를 시작해야 한다. 처음 <씨네21>로부터 이강길 감독의 부고를 요청받고 고사했던 이유는 내가 이강길 감독의 초창기 활동부터 함께한 사람이 아니기에 그의 삶을 온전히 복원할 자신이 없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2004년 이강길 감독을 처음 부안에서 만난 때부터 장례식을 맞이한 순간까지, 짧으면 짧고 길다면 긴 시간을 옆에서 지켜본 다큐멘터리 진영의 후배로서 그의 인간적인 면모를 되새기며 이강길 감독의 발자취를 더듬어볼 생각이다.

‘고집 센’, ‘까칠한’, 그를 기억하게 하는 단어들

이강길 감독에 대한 기억을 더듬어보았다. 몇 가지 이미지들이 희미하게 떠오르며 가장 먼저 머릿속을 스치고 지나가는 단어는 ‘고집 센’이었다. 2003년 부안 위도에 핵폐기장 건설이 결정되면서 부안 군민들은 격렬하게 핵폐기장 건설 반대 투쟁을 벌였다. 2000년 새만금 방조제 반대 투쟁을 기록하고 있던 이강길 감독은 자연스럽게 부안 핵폐기장 반대 투쟁을 기록했다. 2004년 당시 부안 핵폐기장 반대 투쟁의 일환으로 군민들이 기획한 제1회 부안영화제는 이강길 감독의 <새만금 핵폐기장을 낳다>를 폐막작으로 선정했는데, 군민들로부터 예상치 못한 항의가 날아왔다. 다큐멘터리는 새만금 방조제와 핵폐기장은 본질적으로 같은 문제이고, 부안 군민들이 생존의 터를 지키기 위해서는 새만금 방조제 건설도 같은 선상에서 싸워야 한다는 내용이었다. 당시 부안 군민에게 핵폐기장은 생명에 직접적으로 영향을 주는 위험한 시설이었지만, 새만금은 부안 경제를 활성화시키는 노다지에 가까웠다. 그들에게 이강길 감독의 영화는 불편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그날 영화 상영에 대해 격렬하게 항의하는 군민들 사이에서 큰소리로 논쟁하는 사람이 있었다. “새만금까지 막아내야 삶의 터전을 지킬 수 있어요!” 나중에야 그가 이강길 감독임을 알게 되었다. 흥분한 다수를 상대로 절대 지지 않고 맞서는 모습. 그게 이강길 감독의 첫인상이었다.

두 번째로 스치고 지나가는 단어는 ‘까칠한’이다. 대학을 졸업하고 진로에 대해 고민하던 시점에 부안영화제에 사람이 필요하다는 연락을 받았다. 영화제 준비의 쟁점은 폐막식 장소였는데 상영이 용이한 부안성당이냐, 새만금 방조제 반대의 상징적인 장소인 계화도 갯벌이냐를 놓고 싸움 직전까지 가고 있었다. 이강길 감독은 갯벌에 상영하기 위해서는 구조물을 세우고 전기도 끌어와야 하는데 영화제가 얼마 남지 않은 시점에서는 무리라고 강력하게 주장했다. 결국 폐막식은 계화도 갯벌에서 진행하기로 결정됐다. 이강길 감독은 작은 성당 식당 건물에 스크린을 세우고, 음향 장비를 세팅하고, 오기로 했던 자원봉사 학생들을 대신해 관객 스스로 영화제에 참여하도록 이끌었다. 그렇게 다가온 폐막식날, 폐막작 상영을 앞두고 갯벌 한가운데의 데크 앞에 나 혼자 서 있었는데 물 때도 아닌데 무대가 설치된 갯벌로 물이 들어오기 시작했다. 멀리서 전깃줄이 물에 닿지 않게 제일 먼저 뛰어왔던 사람이 이강길 감독이었다. 다행히 바닷물은 발목까지만 차올랐고 상영 데크에 플레이를 누르는 순간 영화를 기다렸던 관객은 함성을 질렀다. 물이 들어온 갯벌은 부드러웠고 옆에서 환한 미소로 모든 것을 지켜보던 이강길 감독의 웃는 모습 또한 한없이 맑았다. 영화제를 끝내고 서울로 올라가는 길에 이강길 감독은 다큐멘터리 작업은 재미있는 일이라며 나에게 다큐멘터리를 하는 것도 생각해보라고 했다.

남의 아픔을 먹고살았기에 더 열심히 카메라를 들었던

2008년 시민방송 RTV에서 시민제작자로 독립영화를 소개하는 프로그램을 만들 때 이강길 감독의 ‘어부로 살고 싶다’ 3부작의 마지막인 <살기 위하여>를 소개하게 되었다. 영화에서는 계화도 주민으로서의 이강길 감독이 보였다. 계화도 주민 유기화씨의 죽음에 대한 슬픔, 카메라를 배 기둥에 묶어두고 조업활동을 하고 있는 모습(그는 생활비를 벌기 위해 배를 탔다), 카메라를 들고 촬영을 하면서 경찰 보트를 밀어내는 모습, 주민들의 생활터전인 갯벌을 지키기 위해 카메라를 들고 주민들과 항상 함께하는 그가 보였다. “다큐멘터리를 하는 사람들은 남의 아픔을 먹고사는 사람이라 현장에서 더 열심히 해야 한다.” 영화 속 이강길 감독의 인터뷰 중 가장 기억에 남는 말이다. 그는 그렇게 사람 좋아하고 따뜻하고 정 많은 사람이었다.

2015년엔 설악산 오색케이블카 건설이 환경부의 조건부 승인을 받았다. 국립공원인 설악산을 지키려는 사람들의 싸움이 시작되었다. 싸움이 시작된 시기부터 이강길 감독은 카메라를 메고 설악산에 오르기 시작했다. 2017년 겨울 어느 날, 이강길 감독의 전화를 받았다. “원주 지방 환경청에서 노숙 투쟁 중인데 내가 몸이 좀 안 좋아. 촬영을 도와줄 수 있니?” 원주 지방 환경청에 도착해보니 사람들이 천막도 없이 비닐 하나에 의지해 환경청 건물 앞에서 노숙을 하고 있었다. 이강길 감독은 감기로 몸이 좋지 않은 상태였는데 그 모습이 안쓰러워 감기가 떨어지게 근처 모텔에서 따뜻하게 자고 오라고 권했다. “다른 사람들이 비닐 하나 덮고 노숙하고 있는데 나 혼자 따뜻한 모텔에서 어떻게 자나?” 결국 이강길 감독의 고집대로 비닐 하나 의지해서 아침을 맞았다. 2020년 1월 25일 설날, 아침에 문자 하나를 받았다. “[부고] 이강길(영화감독)씨 별세.” 문자를 잘못 봤다고 생각했다. 한달 전에 여성 춤꾼에 대한 다큐멘터리를 제작할 예정이라고, 댄스학원 한편에 자리잡은 사무실에서 이강길 감독을 만났었다. 특별히 건강에 이상이 없어 보였다. <설악, 산양의 땅 사람들> 작업을 하면서 어깨가 망가졌다는 이야기는 들었다. 3, 4명이 들고 올라갈 장비를 짊어지고 혼자서 그 높은 설악산을 오르락내리락한 결과였다. 왜 그때 눈치채지 못했을까? 빈소를 찾았을 때 이강길 감독의 영정 사진을 보고서야 그의 죽음을 실감했다. 2년 전, 세월호를 기록하던 박종필 감독을 간암으로 보내고 현장에서 싸우던 이강길 감독마저 허망하게 잃었다. 누구보다 현장에서 헌신적이고, 약자들 편에 서서 카메라를 들고 부당함을 알리던 사람들이었다. 그들은 누구의 도움도 받지 못하고 열악한 환경 속에서 묵묵히 자기 일을 했었다. 이강길 감독이 마지막으로 지냈던 사무실 풍경이 생각난다. 방음조차 되지 않는 1평 남짓한 좁은 공간에 장비들이 빽빽하게 들어차 있었고, 이강길 감독은 댄스 연습실에서 울려퍼지는 소음을 들으며 <설악, 산양의 땅 사람들> 편집을 했다. 사무실 한편에서 선잠을 자며 작품을 완성시켰다. 그래서였을까? 한창 활동할 나이에 그는 허망하게 세상을 등졌다. 까칠했지만 따뜻했던, 헌신적이고 좋은 사람을 잃었다. 이강길 감독을 아버님 곁에 안치하고 돌아오는 길에 동료 다큐멘터리 감독들이 그랬다. 노환으로 떠나는 장례식에서 보자고. 그런 동료 감독에게 나는 말했다. 노환으로 장례식을 맞이하려면 다큐멘터리를 그만둬야 한다고. 이강길 감독님. 고생 많았어요. 누구보다 참 열심히 하셨어요. 누구도 이강길 감독만큼 못할 거예요. 고마웠어요. 이제 편안하게 쉬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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