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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슈렉> LA프리미어 [1]

초록색 괴물의 동화, <슈렉> LA 시사회에 가다

새로운 동화의 나라, 드림웍스의 도전은 계속된다

3시30분. 버스를 기다리고 있었다. 4월이라 해도 이미 여름볕 같은 샌타모니카의 강렬한 태양 아래 고맙게도 시원한 그늘을 만드는 야자수, 그 아래 파란색 벤치에 앉은 동양의 이방인은 4시에 열릴 <슈렉>(Shrek)의 LA프리미어 행사장에 늦을까 조바심을 내며 오직 버스가 오는 방향만을 뚫어져라 바라보고 있었다. 끊임없이 보채는 아이들에게 무어라 소리지르는 히스패닉 아줌마의 빠른 스페인어와 흘러내릴 듯한 바지를 엉덩이에 걸친 한 무리의 흑인청년들이 랩을 하듯 쏟아내는 강한 악센트의 영어가 정류장의 대기를 정신없이 가르는 가운데, 몇년 묵은 듯한 악취를 풍기는 거지가 “담배있수?”라고 물어온다. 처음으로 시선을 그들에게로 건넨다. 우성인자로만 조합된 듯 큰키에 흰 살결의 백인들이 SABB니 BMW니 하는 자동차에 몸을 싣고 쌩쌩 달리는 해변가 버스정류장에서 만난 초라하고 남루한 행색의 사람들. 그 모습은, 이제와 돌이켜보건대 미남 미녀들만이 행복한 엔딩을 맞는 동화 속 세계에서 살아가야 하는 못생기고 지저분한 초록색 괴물 슈렉과 참 많이도 닮아 있었다.

칸 경쟁부문 진출, 드림웍스 최대의 축포

5월18일 미국개봉을 앞두고 있는 드림웍스의 신작 3D애니메이션 <슈렉>은 현지기자시사 이틀 전인 지난 4월20일, 세계기자를 상대로 한 시사회를 먼저 열었다. 베벌리힐스 로데오거리에 자리한 찰스 아디코프 극장에서 아침부터 열린 시사회장은 대만, 일본, 한국, 유럽 등지에서 날아온 기자들로 북적거렸고 전날 칸에서 온 초청장은 영화에 대한 기대를 더욱 부채질하고 있었다. <쉬렉>은 5월9일부터 열릴 제54회 칸영화제 경쟁부문에 오른 23편의 작품 중 유일한 애니메이션이다. 더 나아가 장편 애니메이션으로 칸영화제 경쟁부문에 오르기는 1973년, 당시 체코슬로바키아와 프랑스가 공동제작한 르네 랄루(Rene Laroux)의 <미개의 행성>(La Planete Sauvage) 이후 처음 있는 일이다. 시사 뒤 이어진 인터뷰에서 드림웍스SKG의 창립자이자 <슈렉>의 프로듀서인 제프리 카첸버그가 “<아메리칸 뷰티>와 <글래디에이터>가 아카데미상을 받은 것보다 영광”이라고 표현할 만큼 칸이 <슈렉>을 지목했다는 것은 드림웍스 7년사, 4번째 애니메이션에게 내려진 최대의 축포였다.

아름다운 공주와 왕자가 행복하게 살았다는 내용이 담긴 사랑스러운 동화책. 그 책장을 넘기는 투박한 초록색 손이 영 심상치 않다. 화면이 넓어지면 여기는 슈렉의 화장실 안. 무심하고 퉁명스런 얼굴의 괴물 슈렉은 그 페이지를 아무렇지도 않게 ‘뿌욱’ 찢어서 휴지 대용으로 써버리고 만다. 이 심상치 않은 오프닝을 통해 <슈렉>은 앞으로 자신들이 어떤 이야기를 들려줄 것인지 명확히 밝히고 들어간다. 모든 동화를 찢어버릴 것. 모든 컨벤션을 뒤집어엎을 것. 그러나 디즈니동화의 모든 관습을 깨고 부수는 <슈렉>의 도전은 머리채 잡는 시장바닥 싸움이 아니다. 그보다는 철저히 계산되고 트레이닝된 선수가 모래판에서 건네는 정중한 안다리걸기다.

이야기의 진보, 기술의 진보

크리스마스를 부정하고 산 속에 숨어살던 초록색 괴물 ‘그린치’처럼, 외따로 떨어진 늪지대에서 혼자지만 나름대로 즐거운 삶을 영위하던 괴물 슈렉(마이크 마이어스)에게 어느 날 불청객들이 찾아든다. <빨간모자>의 여우할머니는 자기 침대에 누워 있고, <꼬마돼지 삼형제>의 돼지들이 마당을 뛰어다닌다. 설상가상으로 뒷마당에는 피노키오, 백설공주, 일곱난쟁이, 신데렐라, 피터팬 할 것 없이 모든 동화 속의 피조물들이 진을 치고 있다. 사건의 전말은 이렇다. 자신만의 완벽한 세상을 꿈꾸던 포악한 영주 파쿼드(존 리트고)가 모든 동화 속 주인공들을 자신의 성 밖으로 쫓아낸 것. 예전의 평화와 고독을 찾고 싶은 슈렉은 파쿼드를 찾아가고 파쿼드는 슈렉에게 한 가지 제안을 한다. 자나깨나 왕이 되는 것이 꿈인 영주 파쿼드. 왕이 될 수 있는 가장 간단한 방법은, 바로 공주와 결혼하는 것이다. 하여 신데렐라, 백설공주와의 경합을 거쳐 간택된 공주 피오나(카메론 디아즈)를 익룡의 성에서 구해오는 것이 슈렉에게 떨어진 ‘미션’이다. 결국 불뿜는 익룡의 성에서 피오나를 구출한 슈렉은 공주와 사랑에 빠진다. 여기까지는 우리가 알고 있던 ‘공주구출형’ 이야기와 그다지 다를 것이 없다.

그러나 <슈렉>은 피오나 공주가 노을이 지면 슈렉의 사돈의 팔촌쯤 되는 추한 외모로 바뀐다는 변수를 던지며 새로운 방향으로 이야기를 끌고 나간다. 게다가 동화 속 공주라면 얌전한 것이 상례련만 피오나가 엉뚱한 슈렉과 함께 펼치는 행각은 엽기도 이런 엽기가 없다. 트림이나 물 속에서 방귀 뀌기는 슈렉의 기본. 어두운 곳에 들어서자 귀에서 굵고 더러운 귀지를 ‘쓱’ 뽑더니 촛불삼아 불을 밝힌다. 게다가 개구리배에 바람을 집어넣어 둥그렇게 풍선처럼 만들어 공주에게 선물이라며 건넨다. 이에 질세라 공주는 뱀 입에 긴 풍선처럼 바람을 집어넣더니 비틀고 꼬아서 강아지 풍선모양으로 만들어 쉬렉에게 전한다. 피오나의 째지는 듯한 노래소리에 근처에 있던 새가 터져죽고 피오나와 슈렉이 그 새알로 프라이를 해서 다정히 나눠먹는 장면도 가관이다. 영화 전반에 걸쳐 동화패러디는 물론이고 <매트릭스> <와호장룡> <드래곤 하트> <인디아나 존스> 등의 실사영화를 차용하고 비트는 솜씨, 마치 방송사 스튜디오처럼 관객을 향해 시시때때 “박수”, “함성” 등의 피켓을 쳐드는 위트, 민망하지 않을 만큼의 가벼운 성적 조크 등은 줄곧 성인취향을 지향해온 드림웍스 애니메이션을 ‘아이들용’으로 치부되어왔던 디즈니 애니메이션에서 완전히 차별화시키는 정점에 이른 듯하다. 게다가 아트디렉터인 덕 라저스와 기욤 아레토스가 자랑하는 “옷의 결이나 주름, 자연스럽고 정교한 질감, 몸을 뼈와 근육 피부층 3부분으로 구분하여 확연히 달라진 인물의 움직임” 등의 기술적 진보 또한 눈여겨볼 만하다.

드림웍스, 소외된 캐릭터들의 해피랜드

그러나 정작 <슈렉>이 사랑스러운 이유는 기술적 진보도, 디즈니를 향한 야심만만한 도전장도 아니다. 그것은 늘 스포트라이트 뒷면에 자리잡았던 외로운 이들을 향한 따뜻하고 사랑스러운 시선이다. “사람들은 나를 알기도 전에 판단해…. 그녀는 공주, 나는 괴물….” 타고난 추한 모습을 슬퍼하며 쓸쓸히 눈을 떨구는 슈렉 옆으로 다정스럽게 다가앉는 당나귀(에디 머피)와 슈렉의 모습 위로 휘둥그레 떠 있는 은은한 달빛의 빛깔은 영화가 시종일관 이들에게 유지하는 시선의 색채다. 그리고 마법이 풀렸지만 여전히 추녀인 채 남아 있는 자신을 보며 “나는 아름다워야 하는데…”라고 울먹이는 추녀 피오나를 향해 “당신은 지금도 충분히 아름다워요”라고 말하는 슈렉의 미소는 영화 전체를 훈훈하게 덥힌다. 이런 사소한 것들에 대한 애정, 소외받은 것들에 대한 동정 아닌 사랑이, 철저한 상업영화로서 그것도 애니메이션으로 <슈렉>이 디즈니 애니메이션 75년사에도 이루지 못했던 칸영화제 경쟁부문 진출을 이루어낸 가장 큰 이유가 아닐까. 디즈니의 성곽 밖에서 돌멩이를 던지던 작은 꼬마 드림웍스는 7년 만에 그 성 안으로 들어와 위협하는 무시못할 청년이 된 것이다. 키작은 영주, 사랑에 목말라하는 암룡, 말만 많은 당나귀, 덩치 큰 초록괴물, 해가 지면 뚱녀괴물로 변하는 공주. 결점투성이들의 캐릭터들이 모여 그 어떤 변화도 원치 않은 채 그들 모습 그대로 사랑해도 ‘해피엔드’인 새로운 동화의 나라. 그 동화책의 첫장은 드림웍스의 손에 의해 넘어간다. 국내 개봉 7월14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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