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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가위는 작가가 아니다”
2001-05-08

평론가, 평론가를 만나다 - 임재철과 샤를 테송

영화제는 관객과 영화가 만나는 자리인 동시에 영화인들이 서로 만나는 자리이기도 하다. 대안영화, 아시아의 독립영화, 디지털영화를 기치로 내건 2회 전주국제영화제, 무수한 만남이 교차하는 그곳에서 두 영화 논객이 만났다. 올해 경쟁부문인 아시아인디영화포럼 심사위원을 맡아 내한한 프랑스 <카이에 뒤 시네마>의 샤를 테송 편집장과 한국 <필름컬처>의 임재철 편집주간. 두 논객의 화두는, 아시아의 영화였다. 서구 비평가가 바라보는 아시아영화, 그리고 아시아 비평가가 바라보는 아시아영화와 그에 대한 서구의 시선들. 영화제 닷새째인 5월1일 오후, 테송의 숙소인 호텔 라운지에서 만난 두 비평가는 아시아영화의 현재와 미래에 대해, 틈틈이 메모까지 해가며 조목조목 이야기를 나눴다.

한국의 비평가에게 서구가 아시아영화를 대하는 태도는 때로 문제를 품은 것으로 보인다는 것, 프랑스의 비평가에게 한국 영화작가들은 너무 쉽게 산업에 편입되는 것으로 비친다는 것. 작가주의 영화와 인디영화에 대한 옹호, 아시아영화의 미래에 대한 비관과 낙관을 공유하면서도, 한편으론 각자의 관점에서 본 문제점을 지적하기를 주저하지 않았다. <필름컬처>가 계간이라는 임재철 편집주간의 말에 “그럼 시간이 많겠군요”라고 테송 편집장이 응수하며 시작된 대담은, 약 2시간에 걸쳐 진행됐다.

임재철 아시아영화를 서구 사람들이 처음 의식하게 된 것이 1950년대 일본영화를 통해서였다. 하지만 전반적인 아시아영화가 알려진 것은 80년대 후반부터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왜 일본을 제외한 다른 아시아영화들이 서구에 알려지는 데 이렇게 오래 걸렸을까.

샤를 테송 <카이에 뒤 시네마>의 변화를 중심으로 이야기하겠다. 1950년대에는 <카이에 뒤 시네마>를 통해 유럽, 할리우드영화가 주로 소개됐다. 간간이 덴마크나 노르웨이 등 북유럽영화가 있었지만. 그러다가 60년대 중반부터 <카이에 뒤 시네마>가 정치화하면서 지평이 넓어졌다. 글라우베르 로샤 등 브라질의 시네마 노보 작가들, 폴란드의 제르지 스콜리모프스키, 일본의 오시마 나기사 등 세계 영화의 형식적 측면들에 관심을 가지게 되었다. 세계 각국에서 정치적 의식과 형식실험이 결합된 영화들이 쏟아지던 시기였다. 80년대 초반 내가 들어가기 전의 <카이에 뒤 시네마>는 굉장히 정치적이었다. 나나 올리비에 아사야스는 그런 흐름에 대해 부정적인 입장이었다. 말하자면 시네필에 더 가까운 입장이었다. 좀 덜 정치화된 영화들에 관심을 가졌다. 50년대 <카이에 뒤 시네마>의 시네필이 할리우드영화를 중심으로 형성된 시네필이었다면 우리는 아시아영화를 중심으로 형성된 시네필이라고 할 수도 있을 것이다. 30년대의 상하이 그리고 현대의 홍콩에 스튜디오 시스템이 존재했다는 사실은 우리에게 발견의 욕구를 부추기는 것이었다. 그래서 우리는 홍콩에 직접 가서 그곳의 스튜디오 시스템을 취재하기로 했다. 나와 아사야스가 적어도 프랑스에서 아시아영화를 발굴하려 한 최초의 사람들이라 할 수 있다.

임재철 84년에 <카이에 뒤 시네마>에서 홍콩영화 특집호를 냈다. 그것이 유럽에 아시아영화를 알리는 데 굉장히 큰 역할을 했다. 지난해 아사야스와 이야기를 나눈 적이 있는데 자신이 허우샤오시엔을 인터뷰한 최초의 서구인이라고 자랑스럽게 이야기하더라.

샤를 테송 그 홍콩영화 특집호를 내기 위해 우리는 한달간 홍콩에 머물렀다. 그 취재를 통해 우리는 일본의 시대는 지나가고 중국과 대만에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고, 그래서 그걸 소개하려고 했다. 아시아영화의 흐름은 이렇게 요약할 수 있는 것이었다. 처음엔 1950년대에 미조구치 겐지가 있었고, 그 다음엔 오시마 나기사가 있었고, 80년대는 허우샤오시엔과 서극이다. 아시아영화가 서구에 소개된 것은 국제영화제를 통해서였다. 낭트의 3대륙영화제나 페사로영화제, 로카르노영화제 같은 것들을 통해서.

<와호장룡>, 아시아 영화붐의 절정

임재철 일반적으로 아시아영화들이 서구에 소개될 때 영화제를 통하는 것이 관례였는데 그것이 아시아영화에 끼치는 좋은 영향도 있지만 나쁜 영향도 있다. 실제로 영화제를 의식하고 만드는 영화들이 많다. 한국은 예외이지만 영화산업이 거의 궤멸한 나라들, 대만 같은 경우는 영화제가 있기 때문에 영화를 만드는 면이 없지 않아 있다. 플러스적인 측면이 있다면 마이너스적인 측면도 있는 것이다.

샤를 테송 사실 위험한 측면이 있다는 것은 나도 인정한다. 첸카이거 같은 감독이 대표적인 경우다. 허우샤오시엔도, 에드워드 양도 영화제용 영화를 만드는 감독들은 아니지만 자국의 리얼리티와는 동떨어져 있는 것이 아닌가하는 생각이 들 때가 있다. 작가라는 지위가 위험해지고 상업화의 한 방편이 된 느낌이다. 또다른 위험은, 칸영화제 등 유수한 영화제에서 아시아영화가 유행이 돼버린 거다. 별로 좋지 않은 작품들도 일본영화나 중국영화 몇개씩은 꼭 경쟁부문에 올리려고 하고, 프랑스의 배급업자들도 중국이나 일본영화를 수입하려고 혈안이 돼 있다. 요즘 프랑스에서 개봉하는 중국영화들은 별로 좋지 않은 작품들이다.

임재철 오래 가지 않을 현상이라는 생각이 든다. 서구의 아시아영화 붐은 90년대 초반부터 준비가 되다가 지난해 <와호장룡> 같은 영화는 그 정점에 도달한 느낌이다. 홍콩은 자국의 영화시스템이 궤멸하면서 국제적인 활로를 모색하지 않을 수 없었고, 거꾸로 할리우드에서는 아시아영화가 장사가 되는 것 같다, 이렇게 이해관계가 합치하면서 나온 현상이 <와호장룡>이다. 아시아영화가 계속 인기를 끌지는 확신하기 어려운 상황이다. <카이에 뒤 시네마>의 젊은 평론가들은 왕가위를 굉장히 좋아하는 것 같다.

샤를 테송 사실이다. 프랑스에서는 최근 유행현상이 된 게, 아시아영화 한쪽에는 허우샤우시엔이 있고, 한쪽에는 왕가위가 있어서, 감독들도 이 영화들에서 기법들을 배우려고 하는 것이다. 예를 들어서 왕가위의 스텝프린팅 장면 같은 것.

임재철 한국에서도 3∼4년 전에 그런 현상이 있었다.

샤를 테송 그런가. 왕가위는 내가 볼 때는 작가가 아니다. 일종의 브랜드 같아서, 나이키처럼 그 패션을 자기 작품에 차용하려고 한다. 기타노 마크, 타란티노 마크. 전주에 와서 <러쉬>를 봤는데 이것은 일본식 타란티노처럼 보였다. 아르마니나 베르사체에서 무엇인가를 내놓으면 그 밑에 사람들이 다 따라하는 것과 같다.

아시아, 이란영화가 낯설다

임재철 아시아를 잘 모르는 서양 사람들은 이해하기 힘들수도 있을 텐데…. 가령 한국 사람이 보면 이란영화가 프랑스영화보다 더 낯설 수 있다. 내게 키아로스타미는 고다르보다 훨씬 낯설다. 그런 것들을 서양 사람들이 이해할 수 있는지. 아시아는 유럽처럼 이념적으로나마 연대감이 있는 것 같지는 않다. 하나의 ‘아시아’라고 한다면 그것은 일종의 관념일 가능성이 크다.

샤를 테송 나는 이란영화에 대해서 문화적인 이질감을 안 느낀다. 키아로스타미 영화가 낯선 게 별로 없고, 친근하게 느껴진다. 하지만 무슨 말인지 이해는 된다.

임재철 나는 <카이에 뒤 시네마>에 실리는 글들의 방향을 이해하고 기본적으로 동의하는데, 프랑스 사람들이 외국문화를 보는 데 지나치게 보편주의적인 잣대를 적용하는 것이 아닌가 하는 의문이 들기도 한다. 나는 키아로스타미가 굉장히 훌륭한 작가라는 데 동의한다. 특히 그가 집중적으로 부각된 데에는 프랑스인들의 어떤 잣대에 잘 맞아떨어지기 때문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프랑스 사람들은 외국의 문화적인 컨텍스트를 무시하는 성향이 분명히 있다.

샤를 테송 보편적 잣대의 예를 든다면.

임재철 <카이에 뒤 시네마>만이 아니라 프랑스 전반이 그런데, 바쟁 이후 내려오는 리얼리즘 친화적인 성향이 있다. 그런데 <카이에 뒤 시네마>가 좋아하는 리얼리즘은 단순한 리얼리즘이 아니라 거기에다 형식적인 자의식이 일정하게 결합된 것들이다.

샤를 테송 그렇지는 않다. 키아로스타미를 좋아하는 건, 이란의 현실을 잘 반영하고 있기 때문이다. 오히려 덜 미학적이면서도 그 나라의 현실을 담기 때문에 좋아한다. 유럽영화의 경우, 베리만이나 고다르 영화를 좋다고 하는건 순전히 형식적 측면을 고려하는 거지만, 아시아영화를 좋아할 때는 내용과 형식을 분리하지 않는다. “눈에 보이는 영화”라고 우리는 말한다.

임재철 무슨 말인지 알겠는데, 내용과 형식이 잘 결합된 영화를 좋아하는 건 당연하다. 그런데 어쨌든, 왜 보편주의냐고 했냐면, 리얼리티의 측면보다는 형식적인 측면이 더 눈에 띄는 건 아닐까 하는 점이다. 형식적인 면은 콘텐츠를 몰라도 알기 쉬운 것이니까 말이다. 이를테면 지아장커의 <소무>도 거기에 르누아르적인 측면이 있기 때문에 좋다고 하는 것 아닌가. 중국의 근대화에서 소외된 사람들의 이야기이지만, 르누아르적인 것을 거기서 봄으로써 그것을 보편적인 레벨로 쉽게 올려버린다. 그런 것에 대해 쓰려면 중국사회에 대해 좀더 찾아보고 알아보려는 노력을 해야하지 않나. 그런 게 좀 모자란다는 인상을 받는다.

샤를 테송 인정한다. 잘 모르므로. 그런 면을 먼저 보는 건 사실이다. 그래도 지아장커 영화를 보면, 중국사회가 급속히 자본주의화하면서 야기되는 실업문제라든지 이런 것에 대해서도 본다.

임재철 <카이에 뒤 시네마>를 비판하는 게 아니다. 나도 비슷하다. 내가 이란사회에 대해서 뭘 아나. 내가 이란에 대해 아는 건 축구밖에 없다. (웃음) 어떤 형식적인 측면, 이란이 아직 종교적인 권위가 지배하는, 가난한 나라라는 막연한 지식만 갖고 형식적인 것에 접근하면 나중에 회의에 빠지는 거다. 딜레마. 영화 글을 쓰는 사람들의 공통점인 것 같다.

샤를 테송 나도 마찬가지다. 그런 측면이 있는 것은 사실이지만 영화를 통해서 보이는 것들이 있기 때문에 우선은 그걸로 충분하다고 생각한다. 영화에서 느껴지는 그 나라의 역사나 문화로도 그 나라를 어느 정도 이해할 수 있다. 자기 나름대로 영화를 보고 문화를 이해하는 게 중요하지, 먼저 문화를 알고 있기 때문에 영화를 보게 되는 것은 아니다. 나는 아시아 문화에 관심이 많은 비평가 중 한명이다. 그러나 내가 처음 아시아영화에 관심을 갖게 됐을 때 정치사회적인 것을 내용과 형식으로 구분해서 본 것은 아니었다. 궁금하면 더 공부를 하거나 할 수는 있을 것이다.

임재철 아시아 입장에서 보면 흥미로운 게, 다른 아시아적인 것들도 서구를 경유해서 온다는 거다. 이란영화도 서구에서 발견한 다음에 한국에서 알려지기 시작한 것처럼 말이다. 사실은 90년대를 통틀어 볼 때, 특별히 아시아영화가 레벨업됐다고 생각 안 한다. 그런데 서구에서는 갑자기 열광하기 시작했다. 그래서 잠정적으로 내린 결론은, 우리가 영화를 잘 만드는 게 아니라 그들이 필요로 해서 프로모트하는 것 아닌가 하는 거다. 허우샤우시엔 같은 경우 지금 활동중인 감독 가운데 최고다, 이런 말들을 하는데, 80년대 후반 90년대 초에 굉장히 훌륭한 영화들을 만들었다. 그 정도로 알려지는 데 시간이 많이 걸린 건데, 서양 사람들이 필요로 해서 그렇게 생각하는 건 아닌가.

샤를 테송 80년대 후반, 90년대 초반에 비해 90년대 중반 이후 아시아영화가 정체되어 있는 것에는 동의한다. 그러나 지금 프랑스인들이 아시아영화에 열광하는 것은 단지 필요에 의해서가 아니다. 아시아 문화가 이전에는 특수성을 지니고 있었지만 보편적인 게 돼버렸다는 게 중요하다. 에드워드 양의 <하나 그리고 둘>에서 남자가 부인을 두고 일본에 가서 애인을 만나는 것 같은 것들이 프랑스인들에게도 동시대적인 문제로 받아들여진다. 프랑스에서 <와호장룡>이 <미션 임파서블2>보다 흥행이 잘됐다. 어떻게 그럴 수 있었을까? 이런 걸 보면 아시아영화가 보편성을 어느 정도 획득한 거다.

영화를 그냥 내버려 두자

임재철 최근 아시아영화들을 죽 보면서, 아시아영화가 어떻게 될 것이다, 혹은 높이 평가하는 감독이 있다면.

샤를 테송 잘은 모르겠지만, 대만 같은 경우에는 허우샤우시엔이나 차이밍량을 제외하면 별로 주목할 만한 감독이 없고, 홍콩영화는 완전히 바닥이며, 중국영화는 흥미로운 감독이 좀 있지만, 산업적 측면으로 너무 기반이 없기 때문에 기대를 할 수 있을지 모르겠다. 일본영화는 완전히 가버렸다고 생각했는데, 요즘에 굉장히 흥미로운 작가와 작품이 많이 나오고 있다. 이를테면 하시구치 료스케 같은 감독은 주목할 만하다고 생각한다. 미래 아시아영화의 적은 아시아영화 자체다. 아시아영화에는 세 대부가 있어서, 기타노 다케시, 왕가위, 허우샤우시엔 영화를 다른 감독들이 답습하는 경향이 있다. 이것을 경계하는 게 좋겠다. 적이 있지만, 그래도 아시아영화의 미래는 밝다. 세계영화를 주도할 감독들이 중국과 대만과 일본과 한국에서 나오지 않을까.

임재철 내 생각에도 동아시아에서 좋은 작가가 나올 가능성이 많은데, 문제는 일본을 제외하면 경제적 기반이 다 약하다는 점이다. 영화제에 의존해야 하고. 영화제를 의존하지 않고 영화를 만들 수 있는 영화는 한국하고 일본밖에 없다. 그런데 한국은 산업적으로는 그 열기가 대단하지만 정작 내세울 작가가 별로 없다.

샤를 테송 내가 묻고 싶은 질문이 그것이었다. 한국은 일본이나 대만과는 정반대인 것 같다. 제작자 위주의 영화가 나온다는 거다. 한국에는 자신들의 창의성을 펼치는 작가들이 많이 안 나오고, 작가주의적인 영화를 만들 수 있는 토대가 약한 것 같다. 그래도 한국은 스크린쿼터도 있고 영화진흥위원회에서 도와주기도 하니까 대만처럼 되지는 않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런데 내 인상은 한국의 작가들이 제작자들에게 너무 휘둘린다는 거다, 정말 그렇나.

임재철 제작자의 힘이 압도적으로 센 것은 사실이다. 그게 역사적으로 다 어떤 이유가 있다. 한국에는 영화를 하는 젊은 사람들 사이에 시네필적인 취미적 공동체에서 출발한 사람들이 별로 없다. 영화감독을 직업으로 생각하고 출발한 게 아니라, 영화를 취미로 좋아하다가 영화감독이 된 사람들이 다른 나라와 달리 적다는 얘기다. 한국영화에서 미학적 야심을 거의 찾아보기 어려운 것도 바로 그런 점 때문이 아닐까 한다. 그런 사람들은 사회적으로 무능하기 때문에, 일종의 공동체가 형성된다. 그러다 보면 제작자에 휘둘릴 가능성도 적다. 그런 것이 지금 한국은 너무나 약하다. 대만같이 되면 너무 비참한 상황이니까 안 되고, 취미로 영화를 좋아하는, 좋은 관객으로 남는 사람들이 어느 정도 돼 있으면, 아주 작은 규모로 개인적인 영화, 실험적인 영화들이 계속 나올 수 있는 가능성을 점칠 수라도 있을 텐데.

샤를 테송 한국의 경우는 겉으로 보면 영화제 같은 데 사람이 많으니까 영화를 좋아하는 사람이 많구나, 하게 된다. 프랑스도 어느 정도 비슷한 측면이 있다. 겉으로는 시네필 같은데 속으로는 상업영화를 더 좋아하는 사람들이 많이 있다. 레오스 카락스가 날 만나서 그랬다. 자기영화 제일 인기있는 나라가 한국이라고. 다음 영화는 꼭 한국에서 찍어야겠다고 농담처럼 말하는 걸 들었다.

임재철 시네필이 되도록 길러주는 시스템이 없다. 영화제 기간에만 이벤트로서의 힘을 발휘해 관객을 끌어모으고 있다. 내 생각에는 영화를 그냥 내버려두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한다. 정부 당국이나 언론매체에서도 영화가 굉장한 산업이라는 환상을 안 심어줬으면 좋겠다. 정책을 입안하는 사람들이 궁극적으로 이룩하고 싶은 게 할리우드나 그도 아니면 70, 80년대 홍콩영화다. 근데 영화를 좋아하는 사람의 입장에서 말한다면, 한국영화가 해외에서 잘 팔리는 게 그렇게 대단한 이슈가 된다는 생각이 안 든다.

샤를 테송 한국 같은 경우에 영진위 같은 데서 스크린쿼터를 통해 영화산업을 많이 도와주고 있는 것 같다. 시장점유율이 40%에 가깝다는 것도 많이 이야기하고 있는 것 같은데, 그런 것보다는 작가의 창조성을 길러주는 환경을 조성하는 게 더 중요하다.

형식, 내용과 화합하라

임재철 서구 비평가로는 한국영화를 비교적 많이 보신 편인데, 요즘의 한국영화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는지.

샤를 테송 나라고 해서 기적적인 처방을 줄 수는 없다. 많이 봤다고 얘기하기도 힘들고. 최근 1년간 프랑스에서 한국영화가 4편 개봉했다. 장선우 감독의 <거짓말>, 임권택 감독의 <춘향뎐>, 김기덕 감독의 <>, 이명세 감독의 <인정사정 볼 것 없다>. 한국영화는 프랑스에서 관심을 끌고 있고 어느 정도 알려지고 있다. 많이 보지 못해서 조심스럽지만, 내가 보기에 최근 한국영화는 고만고만한 것 같다. 쇼크를 줄 만한 영화가 없어보인다. 그런데 임권택 감독은 예외다. 나는 <춘향뎐>을 굉장히 좋게 봤다. 이유는 두 가지를 들 수 있다. 한국인들에게는 춘향이야기가 다 아는 이야기이고 해서 다를지 몰라도, 내게 이 작품은 일단 이야기가 매우 신선했고, 그리고 이야기를 넘어서서 이야기를 전달하는 방식이 매우 독창적이었다. 그리고 나는 홍상수 감독 영화를 아주 좋아한다. 그의 영화는 훨씬 더 독창적이고 굉장히 충격적이다. <오! 수정> 같은 경우에도 시각적이고 형식적인 해체를 통해서 이야기를 보여주는 방식이 굉장히 독창적이고, <강원도의 힘> 같은 경우에도 인간의 내면관계에 굉장히 집착하는데, 그게 일단 마음에 들고, 그런 인간의 내면을 시간과 공간의 분할과 해체를 통해서 보여주었기 때문에 높이 산다. 형식과 내용의 조화를 이야기하는 거다. 단순히 새로운 형식을 추구하는 영화는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

임재철 아시아영화 얘기 이제 그만하고… (웃음) <카이에 뒤 시네마>의 50주년에 대해서 늦게나마 축하를 드리고 행사를 한다고 들었는데 그 얘기를 좀 해달라.

샤를 테송 4월에 50주년 특별호를 냈다. 그리고 <카이에 뒤 시네마>에서 높은 평가를 받았던 영화 50편을 가지고 회고전을 연다. 지금 아르헨티나 출신인 에드가르도 코자린스키가 <카이에 뒤 시네마>에 대한 다큐멘터리를 찍고 있는데, 부산영화제에서 이 작품에 관심을 가져줬으면 좋겠다. (웃음) 11월에는 바쟁의 모든 글을 모은 앙드레 바쟁 전집을 낸다.

정리 최수임 기자 사진 이혜정 기사 통역 박지희

▶ 제2회

전주국제영화제

▶ 감독,

감독을 만나다 - 임순례와 지아장커

▶ 평론가,

평론가를 만나다 - 임재철과 샤를 테송

▶ 평론가,

감독을 만나다 - 김봉석과 구로사와 기요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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