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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기덕 | 상처와 고름의 미학
2001-06-08

<악어>에서 <수취인 불명>까지, 김기덕 영화에 흐르는 일관된 어떤 경향

“…왜냐하면 물이 아름다운 충실한 죽음의 물질이기 때문이다. 물만이 아름다움을 보호하면서 잠잘 수 있으며,

또 미의 반영을 보호하면서 움직이지 않은 채로 죽을 수가 있는 것이다.”(가스통 바슐라르, <물과 꿈>)

물과 관련된 두개의 이미지.

떠나간 신부를 그리워하다 반쯤 미쳐버린 사내는 그만 물 속에 텀벙 뛰어들고 만다. 강물 속을 유영하던 그의 눈앞에 웨딩드레스를 입은 신부의

모습이 환영처럼 나타난다. 실성한 사내의 얼굴에 떠오르는 환한 웃음. 요절한 영화작가 장 비고의 유일한 장편영화 <라탈랑트>(1934)는 물이

가지는 음울한 죽음의 이미지가 강렬한 매혹일 수도 있음을 처음으로 보여주었다. 아주 상투적인 멜로드라마의 내러티브를 취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몇몇 인상적인 물의 이미지와 기이한 인물 설정으로 기억에 남을 만한 영화가 되었다는 점에서 김기덕의 <악어>(1996)는 <라탈랑트>의 연장선상에

놓인다. 하지만 그 두 영화가 직접적인 영향관계에 있다기보다는 그 사이에 레오스 카락스의 <퐁네프의 연인들>(1991)이라는 매개가 존재함을

지적해두는 것이 좋을 듯싶다.

카메라가 느릿느릿 유영하듯 물 속을 더듬는다. 화면 오른쪽에서 물풀 같은 것이 흔들리고 있다. 그러나 그 물풀의 정체가 밝혀졌을 때 우린 흠칫

놀라고 만다. 그것은 다름 아닌 죽은 여인의 머리카락이었던 것이다. 차와 함께 물 속에 가라앉아 죽은 여인의 시체. 배우였던 찰스 로튼이 만든

단 하나의 장편영화 <사냥꾼의 밤>(1955)이 보여주는 이 놀라운 이미지 또한 김기덕 영화의 물의 이미지들과 가까운 친연관계에 있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악어>에서 수갑이 채워진 손목을 잘라내서라도 물 위로 떠오르고자 하던 사내는 결국 강 밑바닥 소파에 여인과 나란히 앉은

채 죽음을 맞는다.

손목에 수갑이 채워진 채 가라앉는 두 인물(<악어>, <야생동물보호구역>(1997)), 파도가 오가는 모래사장에 반쯤 묻힌 채 죽어 있는 여인(<파란대문>(1998)),

오토바이에 매달려 가라앉는 여인과 배터리에 묶여 수장되는 남자(<섬>(2000)) 등 앞에서 언급한 영화들에서처럼 김기덕의 영화에서 물은 자주

음습한 죽음의 공간으로 제시되곤 한다. 하지만 동시에 물은 인물들의 삶의 터전이기도 했다. 이처럼 상반되는 물의 이미지가 아예 영화 전체를

뒤덮고 있었던 <섬> 이후 다소 의외의 영화라 할 <실제상황>(2000)을 제작한 김기덕은, <수취인불명>(2001)에서 물의 이미지를 좀더

폭넓게 확장시키고 있다. 이 영화는 우리로 하여금 그의 변모를 예감케 한다.

삶의 고동, 살갗을 헤집는 면도날의 아픔과도 같은

중력에 의한 하강과 부력에 의한 상승이 공존하는 물 속 공간은 김기덕 영화의 지배적인 정서와도 잘 들어맞는다. 자신이

처해 있는 상황에 적응해 철저하게 뿌리내려 살지도 못하고 존재의 수직적인 의연함을 보여주지도 못하는 인물들의 정서를 그보다 잘 보여줄 수 있는

공간은 달리 없을 것이다. 하지만 ‘뿌리뽑힌 것들은 흔들리지 않는다’(황동규, <김수영 무덤>). 김기덕이 응시하는 것은 바로 그 흔들림이다.

김기덕의 영화에서 흔들리는 삶들을 바라보는 시선은 멀찍이 떨어져서 관조하는 것과는 거리가 멀다. <파란대문> 이후의 영화에서 우리는 놀랄 만큼

아름답게 찍혀진 원경 숏들을 종종 발견할 수 있지만 그러한 이미지들 뒤에 기습적으로 찾아오는 섬뜩한 상황들로 인해 당황하게 되곤 한다. 제대로

뿌리내리지 못하고 흔들리는 것들은 얼마만큼의 상처를 지니고 사는가. 한데 그들이 지닌 상처만을 보여주는 것이 아니라 거기서 터져나오는 고름까지를

거칠게 쥐어짜 무표정하게 우리 앞에 내던진다는 데에 김기덕 영화의 놀라움이 있다.

여기서 ‘상처’니 ‘고름’이니 하는 표현을 썼지만(그리고 앞으로도 불가피하게 사용하게 되겠지만), 사실 비유란 삶의 상처를, 그리고 거기서

터져나오는 고름을 그럴싸하게 감추는 전략일 수도 있다. <섬>과 <수취인불명>에서 김기덕은 삶과 관련된 몇몇 통속적인 비유들을 곧이곧대로 이미지화함으로써

오히려 관객에게 극도의 충격을 안겨주는 방식을 즐겨 사용하고 있다.

‘사랑(하는 대상)을 낚아 올린다’는 비유는 <섬>에서 진짜 물리적인 사건으로써 제시된다. 극중에서 현식은 희진의 강박적인 애정을 못 견뎌하고

마침내 낚시터를 빠져나가기로 결심한다. 드럼통 하나에 의지하여 물을 헤엄쳐가던 중 그는 드럼통을 놓치는 바람에 빠져 죽을 위기에 처하게 된다.

이때 배를 탄 희진이 허우적대는 현식에게로 다가온다. 그녀는 현식에게 낚싯줄을 던지고 그가 이를 손으로 쥔 것을 확인한 뒤 배를 몰아 끌고

간다. 현식의 손에 박힌 낚싯바늘과 그 사이로 흘러나오는 피. 살기 위해서는 고통을 참아야 하고 여자에게서 벗어나기 위해서는 손을 놓고 죽는

수밖에는 없다. 이는 ‘사랑을 낚아 올린다’는 비유가 얼마만큼의 고통을 수반할 때에야 비로소 의미있는 진술이 될 수 있는가에 대한 영화적 답변이다.

자신의 성기에 낚싯바늘을 넣고 잡아당기는 희진의 모습은 견디기 힘든 고통을 감수해가면서도 스스로가 낚이기를 바라는 그녀의 강한 욕망을 보여주는

것이다. 그녀의 입에서 터져나오는 외마디 짧은 비명, 오랜 침묵의 틈에서 갓 빠져나온 이 소리는 끝내 현식이 낚시터를 빠져나갈 수 없게 한다.

<수취인불명>의 포악한 개장수인 개눈은 창국에 의해 죽음을 맞는데 그의 시체를 두고 한 동네사람은 ‘개처럼 살더니만 개처럼 죽었다’고 중얼거린다.

숱하게 많은 개들이 목이 매달린 채 야구방망이에 맞아죽어갔던 바로 그 나무에 개처럼 목이 매달려 죽어 있는 개눈의 모습. 이는 비유가 삶으로부터

약탈해갔던 고통스러운 진실을 씁쓸한 웃음과 함께 다시 삶에 되돌려주고자 하는 감독의 의지를 보여주는 것이다. 아름답게 찍혀진 원경숏들 뒤에

섬뜩한 상황들을 배치함으로써 터져나오는 삶의 고름을 보여주는 시각적 전략은 이와 같은 비유의 이미지화와 동일한 맥락에 놓여 있는 것이다. ‘면도날처럼

꽂히는 추위’라고들 말하지만 면도날들이 살갗을 헤집고 들어올 때 얼마나 큰 고통을 가져다주는가를 보여줄 수 있는 감독은 우리에겐 아직 김기덕밖에

없다. 그는 시각과 청각의 이미지만으로 우리의 촉각이 곤두서게 만들 수 있는 유일한 감독이다.

절망 끝에서 부르는 또 하나의 절망 노래

한때 한국영화에서 중요한 모티브 가운데 하나가 되었던 것은 ‘부유하는 삶’이었고 이는 로드무비라는 장르의 형식을 빌려

나타나곤 했다(이만희의 <삼포 가는 길>, 이장호의 <나그네는 길에서도 쉬지 않는다>, 배창호의 <고래사냥>, 그리고 임권택의 <만다라>,

<서편제> 등). 그러나 물질적으로는 거의 완전히 근대화된 지금, 이 한국이라는 좁은 땅덩어리 위에서의 로드무비란 더이상 불가능한 것이라는

사실을 깨닫기까진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다(여균동의 <세상 밖으로>에서 운송수단들이 지니는 의미를 생각해보라).

김기덕이 출현한 것은 바로 그 시점이다. 그의 영화는 로드무비의 끝에서 다시 시작하는 영화이다. 그의 영화에서 인물들은 자신만의 영역 내지는

불완전한 주거- <악어>의 한강변 천막, <야생동물보호구역>에서 청해와 홍산이 거주하는 배, <파란대문>의 새장여인숙, <섬>의 낚시터와 좌대들,

<수취인불명>에서 창국과 그의 어머니가 살고 있는 미군버스- 를 가지고 있거나, 떠돌다가도 마침내 여행의 종착역에 도달한 자들- <야생동물보호구역>의

홍산, <파란대문>의 진아, <섬>의 현식- 이다. 김기덕은 부유하는 삶 대신에 제대로 뿌리내리지 못하고 흔들리는 삶을, 여행의 과정 대신에

여행의 끝을 바라보고 있는 것이다.

김기덕 영화에서 운송수단들은 원래의 기능을 상실한 채 멈춰져 있다. 이는 더이상 하나의 공간에서 다른 공간으로 옮겨다니지 않고 멈추어 서 버린

인물들의 삶과 대응한다. <야생동물보호구역>에서 청해와 홍산이 거주하는 배를 우선 예로 들 수 있겠지만 이후의 영화들에서도 몇 가지 예를 더

찾아볼 수 있다. <파란대문>의 바닷가에 버려진 채 놓여 있는 한척의 배, <섬>의 여주인공 희진이 슬픈 눈으로 응시하는 버려진 오토바이,

그리고 <수취인불명>에서 창국과 그의 어머니가 거주하는 고장난 빨간 미군버스 등. 이들은 그 기능정지로 인해 인물들을 더이상 어디론가 실어나를

순 없지만, 인물들로 하여금 끊임없이 다른 곳을 생각게 하는 사물들로서 존재한다. 그러나 그 다른 곳이란 구체적이고 지리적인 한 공간이 아니다.

그저 막연한 희망의 대상일 뿐이다.

영화 속 인물들이 지니고 있는 희망은 그 막연함으로 인해 결코 실현될 수 없는 것이다. 아니, 차라리 그들은 자신들의 희망이 무엇을 향하고

있는지조차 모르고 있다고 말해야 옳을 것이다. <악어>의 앵벌이 꼬마는 노란 종이배를 접어 강에 띄운다. 노인이 그 이유를 묻자 꼬마는 언젠가는

바다에 도착하게 될 것이기 때문이라고 대답한다. 그러나 악어는 앵벌이 꼬마의 이런 행동을 견딜 수 없다. 그 종이배들이 물에 젖어 가라앉는

것을 바라보고 있노라면 꼭 자신의 삶을 보는 것 같기 때문이다. 젖은 희망, 곧 가라앉을 희망이란 부질없는 것이라는 사실을 그는 잘 알고 있다.

이후에도 김기덕은 종종 이러한 희망과 색채(노랑)를 연관시킨다. <파란대문>에서 매춘부 진아는 새장여인숙의 주인이 푸른 담벽 위에다 고등어를

그려넣고 있는 것을 발견하고는 그 위에 노란색 물감으로 나비 한 마리를 그려넣는다. 물 속에 있는 여린 노란 날개. 여리기는 하지만 이 시각적

상징은 강력하다. <파란대문>이 다른 김기덕 영화들과는 달리 다소 희망적인 결말을 보여주는 것과도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앵벌이 꼬마가 접어

띄워보낸 노란 종이배는 <섬>에 가서 노란 좌대로 다시 나타난다.

영화 속 두 남녀는 살인행각이 들통나자 좌대에 모터를 달고는 멀리 떠나간다. 어느 순간 카메라는 그들이 타고 있는 노란 좌대를 부감으로 잡아

보여준다. 주변은 온통 푸른 물로 둘러싸여 있다. 흡사 바다 한가운데 떠 있는 것처럼 보인다. 이 장면은 밑바닥에 구멍이 나 물이 차오른 배

위에 발가벗은 채 누워 있는 희진의 모습과 중첩되면서 희망없는 두 주인공의 죽음을 암시한다.

언어의 감옥을 여는 육체의 몸짓

그렇다고 김기덕의 영화가 삶에 대한 온통 비관적인 시선만을 던지고 있다고 말하는 것은 온당치 못하다. 그의 영화에는 짧지만 인상적인

교감의 순간을 보여주는 장면들이 있다. 그의 영화를 관심있게 지켜본 사람이라면 짐작하겠지만, 김기덕의 영화에는 감독 자신의 반영으로서 그림

그리는 인물들이 자주 등장하곤 한다(<악어>의 현정, <야생동물보호구역>의 청해, <파란대문>의 진아, <실제상황>의 거리의 화가, <수취인불명>의

지흠). 그들이 자신과 마찰을 빚는 이의 초상을 그리는 것은 화해를 청하고 소통하고자 하는 몸짓인 것으로 해석된다. 확실히 김기덕에게는 언어에

대한 불신이 자리잡고 있다. 그의 인물들은 자신의 감정을 말로 표현하는 데 익숙하지 못하며, 그들이 내뱉는 말은 힘없이, 혹은 거칠고 우악스럽게

감정의 언저리를 맴돌 뿐이다. 몸짓이야말로 그들의 진정한 언어이다. 가령, 노란 좌대에 앉아 있는 현식을 향해 뭍에서 거울로 빛을 반사시키는

희진의 행동(<섬>)이라든가, 노인에게 선물로 사온 안경을 짐짓 무심한 척 툭 던지는 악어의 행동(<악어>)은 이 점을 잘 보여준다.

행동의 반복, 혹은 외양의 모방 또한 김기덕의 영화에서 인물들이 가까워지기 위한 중요한 계기가 된다. 예컨대, <섬>에서 현식이 ‘말하지 않는’

여자 희진과의 관계에 깊이 빠져드는 것은 그가 낚싯바늘에 입을 다친 사건 이후부터이다. <파란대문>에서 혜미는 진아의 뒤를 몰래 따라다니면서

그녀가 노래방에서 혼자 노래를 부르고 가게에서 머리핀을 고르는 모습 등을 훔쳐본다. 그러다 진아를 놓친 혜미는 오던 길을 되돌아가 진아가 갔던

장소들을 찾아다니며 그녀가 했던 행동들을 그대로 반복한다. 이런 혜미의 모습을 진아도 몰래 숨어 지켜보고 있었다. 이 사건 이후 그들은 서로를

진심으로 이해하게 된다(그런데 이 진정한 이해라는 것이 꼭 혜미가 손님을 받는 결말로까지 이어져야만 했는가는 의문이다. 혜미가 몰래 건넌방

남녀의 정사를 엿들으며 자위하는 장면과 더불어 이런 식의 구성은 한국 B급 에로영화의 클리셰들을 답습하고 있는 것이라고밖에는 말할 수 없을

것이다).

고통보다 넓은 공간은 없고/ 피 흘리는 그 고통에 견줄 만한 우주는 없다(파블로 네루다, ‘점’)

확실히 김기덕은 이미지를 다루는 데 탁월한 감각을 보여준다. 그러나 그가 짜놓은 이야기 속에서는 한국영화의 상투적인 관습들이 드물지

않게 발견되는데, 이 점이 그를 선뜻 뛰어난 작가라고 평가하는 것을 망설이게 만드는 주된 요소 가운데 하나일 것이다. 가령, <악어>의

후반부는 주인공 악어와 현정, 그리고 그녀의 애인 및 현정을 강간한 깡패들의 이야기가 주를 이루고 있는데 이 부분의 사건전개는 지극히 상투적이고

진부하기 그지없다. 거기다 갑작스레 공원 암살범과 게이 형사를 등장시킨 설정은 결말로 치닫기 위한 억지라고밖에는 생각할 수 없다. 이른바

‘한국계 디아스포라’의 삶을 다루었다는 <야생동물보호구역>에서는 카미유 클로델의 두상만 아니라면 굳이 영화적 공간이 파리여야 하는 이유를

알 수 없다. <파란 대문>에서 나타난 상투적 표현들에 관해서는 앞에서 잠깐 언급한 정도로도 충분할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위의 영화들은 우리 영화계의 그 누구도 보여주지 못했던 생생한 삶의 퍼덕거림을 보여준다는 미덕을 갖추고 있다. <섬>을

통해 영화 전반을 거의 온전히 자신만의 이미지로 구성함으로써 작가적 역량을 내보인 김기덕은 <수취인불명>에서는 이미지와 더불어 내러티브까지도

능숙하게 장악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이 영화의 인물들이 지니는 상처와 거기서 터져나오는 고름은 그들이 처해 있는 역사적, 현실적

상황들로 인해 더욱 생생하게 우리에게 다가온다. 우울한 유년의 기억과 젊은 날의 거친 삶을 소재로 영화적 세계를 구축해온 김기덕은 비로소

그러한 생의 조건과 상황을 응시할 수 있는 자리로 나아간 것이다. 하지만 그의 분노는 조금도 식지 않았다.

한겨울의 기지촌. 시끄러운 굉음을 내며 하늘을 가로지르는 전투기 아래로 추수가 끝나 황량하기 그지없는 논밭이 죽 펼쳐져 있다. 얼어붙은

물, 즉 논밭을 덮은 하얀 눈은 생의 마지막 안식처마저 박탈당한 인물들의 황량한 심리를 대변한다. 김기덕의 다른 어떤 영화들에서보다도 <수취인불명>에서

인물들은 심하게 충돌하고 무너져간다. 꽝꽝한 얼음장 같은 현실 속에서 그들은 흔들리는 대신 부러져버리고 만다. 그 충만했던 물의 이미지들은

온데간데없다. 개를 도살하는 나무 아래에 고여 있는 작고 더러운 웅덩이와 인민군의 시체가 발견되는 축축한 구덩이만이 그 자리를 대신하고

있을 따름이다. 음습하면서도 매혹적이고 아늑하기까지 했던 물을 죽음의 공간으로 택하는 대신, 창국은 질퍽한 논두렁에 머리를 처박고 죽어간다.

그 위로 내리는 얼어붙은 물, 즉 눈을 맞아 꽁꽁 언 창국의 시신은 <야생동물보호구역>에서 사내의 배에 박힌 냉동고등어와 하등 다를 바가

없다. 사람을 동물 및 사물들과 똑같이 취급한다는 감독의 태도가 얼마나 지독한 효과를 낳을 수 있는가를 보여주는 명장면이다.

그는 언제나 냉랭한 표정을 하고 우리의 안온한 삶의 하잘것없는 껍데기를 마치 날카로운 칼날로 회를 치듯 벗겨낸다. 그리고 우리가 발딛고

서 있는 얇은 얼음장을 도끼로 내리찍는다. 우리는 그를 통해 고통의, 상처의 깊고 넓은 심연을 그리고 거기에 가득 고인 고름의 정체를 비로소

응시할 수 있게 된 것이다. 유운성| 영화평론가

▶ 김기덕,

한국영화의 낯선 ‘섬’

▶ 상처와

고름의 미학

▶ 네티즌과

김기덕 감독이 나눈 10문10답

▶ 김기덕이

말하는 `영화만들기 1996~200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