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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모 기획 앤서니 퀸 1915∼2001
2001-06-13

아디오스! 앤서니 아저씨

■ 지난 6월3일, 86살의 나이로 굴곡 많은 영화인생을 접다

지난

6월3일 일요일, 앤서니 퀸이 65년 넘는 연기생활을 접고 미국 보스톤에서 영면했다. 향년 86. 가난한 멕시코 이민으로 로스앤젤레스 빈민가에서

자라난 이 거대한 배우는 영화보다 굴곡많은 삶을 돌파해낸 힘과 생명력을 스크린을 통해 세계 사람들과 나누어 주었다. 그런 점에서 그는 독특한

존재였다. 땅은, 또는 천상은 이런 사람을 품어가며 더 풍성해지겠지만, 그의 시간을 마지막까지 소유하는 곳은 영화의 공간이 될 것이다.

우리들은 종종 영화 속 캐릭터와 자연인으로서의 배우를 혼동한다. 스타를 향한 열광엔 그런 혼동이 배합돼 있다. 멕시코 반군들이 앤서니 퀸을

‘토르티야 벨트’라고 불리는 미국과의 접경지대 너머로 불러냈을 때, 그때는 경우가 조금 달랐다. 배우 앤서니 퀸은 영화 속의 캐릭터들과 공통점이

정말로 많았으니까. 미국 원주민, 즉 인디언부터 멕시코인, 그리스인, 아니면 떠돌이 차력사, 곱사등이 종지기 등 영화 속 앤서니 퀸은 소수민족과

이민족, 그리고 밑바닥 인생의 상징이었다. 그리고 그 자신 그런 삶의 바닥에서 타고난 생명력으로 솟아오른 인물이었다. 미국 철도건설에 동원된

아일랜드 이민과 멕시칸의 피를 반반씩 타고난 아버지 프란치스코는 20세기 라틴아메리카 혁명의 역사를 장식하는 판초 비야의 혁명군이었고, 어머니

마누엘라는 지주의 어린 아들과 인디언 사이에 싹튼 저주받은 사랑의 씨앗이었다. 앤서니의 부모는 판초 비야 전선으로 향하는 혁명열차를 함께 타고가,

그곳에서 혼인식을, 물론 소박 간단했겠지만, 올렸다. 어머니가 총알을 장전해주면 아버지는 그 총을 쏘았고, 남편들은 아내들이 구워주는 토르티야를

먹으며 싸움을 했다. 그 전장에서 앤서니는 어머니의 몸안에 들어섰다.

앤서니 퀸은 멕시코 북부지역 치와와에서 1915년 태어났다. 지난 6월3일, 86살의 나이로 미국 보스턴에서 눈을 감은 이 배우가 수많은 멕시칸들이

지금까지 그러하듯, 젊은 어머니와 함께 미국땅에 들어선 것은 2살 때. 멕시코 농민혁명의 양대 축이던 에밀리아노 사파타와 판초 비야가 부르주아혁명세력에게

대파당한 뒤, 뒤늦게야 엘패소로 찾아온 아버지는 철도노동자로 일하다가, 시력이 점점 나빠지자 가족을 이끌고 캘리포니아로 향했다. 호두와 목화,

양상추 수확철을 따라 농업노동자로 전전하던 일가는 로스앤젤레스에 정착하지만, 아버지는 장남 앤서니가 10살되던 해 자동차 사고로 사망했다.

어린 가장은 구두닦이로, 공사장의 심부름꾼으로, 내기권투 선수로 전전하며 할머니와 어머니, 누이동생 스텔라 세 여자를 부양했다. 학교는 돈벌이에

장애가 되었다. 그는 가난에 등떠밀려 일찌감치 세상 속으로 뛰어들었다.

할리우드 실력자의 사위가 된 가난한 이민자의 아들

그를 배우로 만든 건 현대건축의 대가 프랭크 로이드 라이트였다, 라고 해도 틀린 말은 아니다. 학교를 떠나기 직전, 앤서니는

학생 건축공모에 당선됐다. 라이트의 조언이 ‘부상’으로 주어졌는데, 라이트는 설계도면보다 앤서니의 발음에 관심이 더 많았다. 그런 발음으로는

건축주에게 프레젠테이션을 할 수 없다, 혀에 문제가 있으니 수술을 해라. 앤서니는 150달러라는 수술비를 감당할 수 없었지만, 소년을 딱하게

여긴 의사는 외상으로 수술해주었다. 그러나 혀를 움직이기는 더 어려워졌다. 발음연습을 위해 앤서니는 은퇴배우 캐서린 해밀이 운영하는 연기학원에

잡일을 해주는 조건으로 등록했다. 그곳에서 앤서니는 연기에 마음을 빼앗겼고, 발음을 교정해서 대건축가에게 돌아가는 대신 무대를 택했다. 데뷔작

<깨끗한 침대>에서 그가 맡은 역은 당시 미국 연극계의 왕족으로 불리던 배리모어 일가의 왕자, 존 배리모어였다. 배리모어는 나이들어

스타덤을 내려서는 자신을 연기하는 신출내기 배우의 재능을 단박 발견하고 인생 종장의 친구로 삼았지만, 배우의 길은 흔히 말하듯 멀고도 험했다.

1936년, 외항선원이 되어 인생을 고쳐쓰리라 결심하고 항구를 서성이던 21살 젊은이를 할리우드로 다시 불러들인 건 파라마운트의 단역모집 광고였다.

세실 B. 드밀이 감독하고, 게리 쿠퍼와 감독의 양녀 캐서린이 주연하는 서부극의 인디언 추장 역이었다. 그는 일본행 배에 오르는 대신, 즉각

할리우드로 귀환했다. 앤서니 퀸은 촬영장에서 첫눈에 반한 캐서린과 결혼해 할리우드 실력자의 사위가 되지만, 결혼생활은 모순 그 자체였다. 앤서니는

화려한 결혼식장에 가족들을 부르지 못했다. 뭐라고 변명하든, 빈민가 멕시코 이민 신분이 부끄러웠을 것이다. 장인과의 긴장은 드밀이 죽기 직전까지

계속됐다. 앤서니 퀸이 세상을 뜨자, 멕시코의 한 역사학자는 “그는 멕시코의 (전형적) 마초였다”고 말했다. 이 진짜 마초는 결혼 첫날밤,

아내가 처녀가 아니라는 사실을 알고 격노했다. 캐롤 롬바드, 리타 헤이워스, 모린 오하라, 잉그리드 버그먼 모녀 등으로 끊임없이 이어지던 염사의

근본원인은 아내의 연인들과 아내에 대한 복수심이었다고 말했지만 그는 원시적 생명력을, 본능을 제어하는 인간형이 아니었던 듯하다. 어쨌든 드밀의

사위가 되었다고 해도, 할리우드는 이 멕시코에서 온 사내에게 멋진 아메리카인의 역할을 제공할 생각이 없었다. 미국 이민국도 비슷한 생각이었던

모양이다. 1947년까지 그는 시민권을 따지 못했다.

“나는 시대의 권위에 도전하는 사람들의 친구”

그 안의 ‘멕시코 마초’가 20세기 빈민연구의 전범으로 꼽히는 오스카 루이스의 인류학 보고서를 영화화한 <산체스네 아이들>의 모순에

찬 아버지로, 왕성한 생명력이 <희랍인 조르바>의 혈기방장한 춤으로 스며나오고 터져나왔다면 아버지로부터 물려받은 저항적 기질은 하잘

것 없는 역할들을 전전하던 그를 스타덤으로 안내했다. 40년대 말, 할리우드의 빨갱이 사냥이 시작되자 앤서니 퀸에게도 경보가 울렸다. “나는

정치적 동물은 아니지만, 그 시대의 권위에 도전하는 사람들과 의견을 함께하는 인간이다.” 국내에도 번역된 마지막 자서전 <<원 맨 탱고>>(다니엘

페이스너씀, 정성호 옮김, 청아출판사 펴냄)에 따르면 그때 가깝게 지내던 러시아극단의 친구들과 ‘작가친구들’의 대다수에게는 빨간 딱지가 붙어

있었다. <알카트라스의 왕> <차이나타운의 왕> 등의 B급영화들과 <피와 모래> <그들은 장화를 신고

죽었다>의 조연을 거쳐, <블랙 골드>의 주연역을 따낸 시점이었으나 앤서니 퀸은 고자질 대신 할리우드를 떠나는 길을 택했다.

행선지는 뉴욕, 그리고 연극.

엘리아 카잔은 자기가 연출한 <욕망이라는 이름의 전차>와 비슷한 시기에 무대에 올라 판정패한 연극 <아테네에서 온 신사>에도

사줄 것이 있다고 생각했다. 주연배우 앤서니 퀸이었다. 인생에는 역설도 많은 법이어서, 동료들을 배신하고 할리우드의 생존을 보장받은 이 왕년의

공산당원이 행운의 발신자가 되었다. 카잔은 그를 액터스 스튜디오로 끌어들여 매소드연기법으로 단련시킨 다음, 말론 브랜도가 맡았던 <욕망이라는…>의

스탠리 코왈스키를 주었다. 평단의 찬사와 2년에 걸친 순회공연 끝에 두 번째 선물이 왔다. 카잔은 새 영화 <혁명아 사파타>(1952)에서

혁명가의 아우 유페미오로 앤서니를 발탁했고, 이 역은 앤서니에게 최초의 오스카 남우조연상을 안겨줬다. 그는 1957년 <러스트 포 라이프>의

고갱 역으로 두 번째 오스카 조연상을 받는다.

<길>과 함께 피어난 원시적 생명력

그러나 배우 앤서니 퀸을 새롭게 주조해낸 건 이탈리아였다. 네오리얼리즘과 함께 부상한 이탈리아영화는 할리우드배우들을 로마로 대거 불러들였고,

세 번째 영화 <길>(1954)을 준비하던 페데리코 펠리니는 미국에서 온 배우들 속에서 주인공 차력사를 발견했다. <아틸라>에

훈족의 왕 아틸라로 출연중이던 앤서니 퀸은 제작자 디노 데 로렌티스를 설득해 주연 앤서니 퀸과 제작비를 펠리니에게 제공했다. 자신의 내면을

들여다볼 줄 몰라 사랑하는 사람을 잃는 짐승 같은 사내, 잠파노는 배우에게 자신의 불투명한 내면을 인물에 싣는 법을 가르쳐주었다. 사실적 연기와

원시적 힘, 그리고 서정성을 기묘하게 배합해낸 <길>의 경험은 그의 개화기, 60년대를 준비해준 원동력이었다. 드디어 국제적 명성을

획득한 그는 <노틀담의 곱추>(1956)의 콰지모도, <아라비아의 로렌스>(1962)의 베드윈 족장, <헤비급 선수를

위한 진혼곡>(1963)의 권투선수 등으로 변신을 거듭해갔다. 그때, 젊은 그리스 감독 마이클 카고야니스가 니코스 카잔차키스의 소설 <희랍인

조르바>(1964)를 들고 앤서니 퀸을 찾아간 일은 참 잘한 일이었다. 앤소니 퀸이 넘치는 생명력과 본능에 충실한 영웅 조르바만한 화산과

모순을 제 안에 품고 있는 배우라는 걸, 누구도 부인할 수 없을 것이다. 더구나 독서로 제도교육을 대신하며 자신을 ‘발전’시켜온 이 배우는

이미 카잔차키스의 열렬한 독자였다. 83년, 앤서니 퀸은 뮤지컬 <희랍인 조르바>를 연극무대로 다시 옮길 만큼 이 그리스 남자를

사랑했다.

영화평론가들은 종종, 앤서니 퀸은 영화 속에서 자신을 연기할 뿐이라고 비판하기도 했다. 배우의 존재와 개성이 인물을 뚫고 나온다는 건 약점일

수 있다. 그런데 앤서니 퀸의 경우, 많은 감독과 제작자들이 그의 인종적 특수성에 대한 고정적 이미지 때문에 그를 찾았던 측면도 있었다. 할리우드가

바라보는 이민족은 아주 단순하게 두 종류였다. 우선 그들은 위험한 존재다. 젊은 앤서니 퀸이 셀 수 없이 반복한, 흰 피부의 영웅들을 위협하다

패배하는 악당 역할이 그런 의식의 반영이다. 멕시코혁명을 그린 영화에서조차 혁명의 이상을 대변하는 지도자 에밀리아노 사파타 역은 누가 보아도

이 인물과는 피부색과 얼굴이 다른 말론 브랜도 차지였고, 진짜 멕시코 사내는 “철 모르고 날뛰는 조력자에서 술주정뱅이로 타락하는”, 혁명의

부정적 측면을 내포한 아우 유페미오가 되어야 했다. 외부인에 관한 할리우드의 아주 긍정적인 평가는 ‘문명화하지 않은 그들은 무지한 만큼 순박하고,

자연상태의 본성을 유지하고 있다’는 정도였을까. 조연급 배우에서 주연 또는 비중있는 조연급 배우로 신분상승한 <길> 이후의 영화들이

필요로 한 것이 바로 그런 앤서니였다. 나치의 정치선전에 희생되면서도 인간의 얼굴을 잃지 않는 의 앤서니, 집시처녀 에스메랄다를

위해 헌신하는 <노틀담의 곱추>의 앤서니…. 그건, 국경을 넘어온 히스패닉들이 미국 정치의 주요 유권자로 부상하기 전의 일이다.

할리우드가 ‘소수민족’과 이민족의 기호로 채택한 이 배우를, 이제 그 소수민족과 이민족들은 자신의 스타로 받아들이기로 했다. 당신의 아버지는

판초 비야의 혁명군이었고, 당신은 할리우드에서 성공한 스타가 되었다. 이제, 우리들의 지도자가 되어달라. 멕시코 반군들은 자신들의 부름에 고향으로

날아온 앤서니 퀸에게 그렇게 요청한다. 앤서니는 멕시코의 독재에는 반대하지만, 이곳에 뿌리가 없는 나는 당신들을 지휘할 자격이 없다는 답을

남기고 다시 미국으로 돌아왔다. 그리고 현실의 혁명을 지휘하는 대신, 무솔리니의 이탈리아군에 저항하던 리비아의 게릴라 지도자 오마르 무크타르로

<사막의 라이온>의 스크린을 채웠다.

미술과 함께 한 노년, 그리고 영원한 안녕

그러나 배우 앤서니 퀸을 그렇게 간단히 정리하는 건 무모한 일인지도 모른다. 세번의 결혼과 무수한 혼외정사에서 5명의 어머니를 둔 13명의

자녀를 얻은 이 사내는 영화에서도 다산성을 과시했다. 그의 부음기사에서 출연작 편수는 매체마다 달라진다. 100여편, 148편, 157편,

많게는 300여편. 영화출연이 뜸해진 노년기의 앤서니 퀸은 그림과 조각에 몰두하고 있었다. 미술가 앤서니 퀸은 98년 “큐비즘과 후기인상주의가

혼재된” 작품들을 들고와 서울 예술의 전당에서도 전시회를 열었다. 90년대 들어 <라스트 액션 히어로> <구름 속의 산책>

등에 간간이 얼굴을 비쳐온 그에겐 아직도 미개봉작이 남아 있다. 실베스터 스탤론과 매들린 스토와 경연한 <어벤징 안젤로>가 그의

유작이 되었다. “나는 호른 주자와 같다. 내 안에서 어떤 곡조가 들려오는데, 아직은 그걸 연주하지 못하겠다. 언젠가 그 음계를 제대로 소리로

옮길 수 있겠지.” 언젠가 그는 그렇게 말한 적 있는데, 그는 득음을 하고 갔을까. 글 안정숙 기자

▷ 촬영장 에피소드들은 <<원 맨 탱고>>에서 발췌하였습니다.

<혁명아

사파타>, Viva Zapata! 1952년, 감독 엘리아 카잔

“엘리아

카잔, 예술가는 아니지”

앤서니 퀸은 멕시코혁명에 관해 이야기하고 싶었지만, 감독은 판초 비야의 혁명군이던 앤서니 퀸의 아버지의 경험담을 원했다. 혁명군 병사들은 돌을

두들겨 모스 부호 같은 소리를 내거나 휘파람을 불어 연락을 취했다더라고 앤서니 퀸이 말하면 만족하는 식이었다. “모두 지어낸 얘기였지.” 뒷날

혁명군의 아들은 밝혔는데, “장인일지는 몰라도 예술가는 아니다”, “이간질에 이골난 겁쟁이”라고 생각하던 카잔을 속인 일은 즐거운 기억이었던

모양.

<길>,

La Strada 1954년, 감독 페데리코 펠리니

“펠리니,

그 멍청이 말인가?”

펠리니의 <길>에 출연하고 싶어 조급해진 퀸은 <아틸라>의 출연계약으로 자신을 묶고 있는 디노 데 로렌티스에게 ‘외출허가’를

요청했다. “펠리니? 그 멍청이 말인가?” “제 아내 줄리에타 마시나를 출연시키고 싶어한다며? 나라면 차라리 지나 롤로브리지다를 쓰겠네.”

로렌티스의 답이었다. 지금, 줄리에타 마시나 아닌 젤소미나를 누군들 상상할 수 있을까. 로렌티스는 올해 오스카 공로상을 받았는데, 공헌의 첫

목록에 ‘<길>의 제작자’라는 항목이 들어 있었다. 그는 앤서니 퀸의 권유에 못 이겨 그 ‘멍청이’의 영화에 돈을 댔던 것.

<아라비아의

로렌스>, Lawrence of Arabia, 1962년, 감독 데이비드 린

앤서니

퀸, 앤서니 퀸을 이기다

앤서니 퀸이 아랍인 아우다 아부 타이의 분장을 하고, 데이비드 린 감독의 촬영장을 찾아나설 때였다. 그늘에서 쉬고 있던 아랍인들은 진짜 아부

타이가 나타났다고 믿었다. “아부 타이, 아부 타이!” 연호하는 군중을 몰고 나타나는 퀸을 먼발치에서 바라본 감독이 옆사람에게 물었다. “저게

누구지?” “아부 타이라는 것 같은데요.” “그럼, 앤서니 퀸과 해약하고, 저 사람을 쓰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