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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1 우수 비디오숍 콘테스트 [3]
사진 이혜정심지현 2001-02-02

<시드와 낸시>? 당연히 있죠!

우수 비디오숍 -춘천시 후평동 영스타 비디오, 이정란씨

영스타의 ‘하루’. 오전 9:00 문 열기 30분 전이다. 지난밤에 본 테이프 제자리에 꽂아놓고 매장청소 시작. 어젯밤부터 쌓인 눈 때문에 문이 잘 열리지 않던데, 내친 김에 매장 앞도 비질 한번.

오전 11:00 밤새워 쓴 거라며 서진원님께서 <존 말코비치 되기>에 대한 감상평을 제출해주셨다. 현재 한림대 사학과 영화동아리 ‘무비 매니아’를 운영하고 있어서 그런지 시각이 꽤 날카롭다. 평이랑 시놉이랑 카메오 이야기까지 형식도 good!

오후 1:00 사우동 사시는 김정욱님 요즘 청소년영화제 때문에 많이 말랐다. 근데 빌려갔던 <충열도>를 내놓으며 하는 말이 “테이프가 이상해요. 중간부 화질이….” 아니, 이게 웬 청천벽력인가. <충열도> 서치하며 꺼이꺼이 운다.

오후 3:00 신규 고객님 등장. “여기 <시드와 낸시> 있나요?” 무슨 그런 당연한 말씀을. 재빨리 원하는 테이프를 찾아드린 뒤, 은근슬쩍 마니아 코너로 유도. 테이프 자랑과 함께 몇 마디 대화로 취향을 가늠해 본다.

오후 7:00 ‘주성치 다시 보기’ 무료 이벤트를 보고 신규 고객이 의아해 한다. “아, 요즘 힘든데 웃고 살자고요. 주성치가 꽤 웃기는 친구거든요. 보고 재미있으시면 취미 붙여보세요.”

오후 9:00 <글래디에이터>를 3일이나 지난 뒤 가져온 손님, 배보다 배꼽이 큰 연체료 때문에 다짜고짜 깎아달라고 조른다. 하지만 내 사전에 ‘깎아주기’란 없지. 왜냐하면 우리집 비디오는 콩나물이 아니거덩. 웃는 얼굴로 연체료 받아내기가 내 특기 중 특기.

문 닫기 5분 전 같은 동네 소설가 이외수님댁 아가씨들, “선생님, SF 하나 골라주시고요, 저희 볼 <로망스> 주세요”. 벌써 하루가 지났다. 내일은 <마지막 전투>가 출시되는 날인데, 제때 나와줄는지….

영스타의 하루는 막을 내렸지만, 이정란(31)씨의 하루는 아직 끝이 안 났다. 10평이 조금 넘는 자그마한 매장에 거의 매주 출시되는 신작 비디오들을 받으려면 매달 라면상자로 한 상자 이상씩 추려내야 한다. 이번달에도 들여놓을 비디오 목록이 줄줄이 대기하고 있어 틈날 때마다 붙어서서 골라내고 있는 중이다. 들여놓은 지 한달 이상 되면 대체로 수명이 판가름나기에 지난달 대여율을 참고로 블랙리스트를 작성한다. 따지고보면 아깝지 않은 비디오가 어디 있을까마는 좁은 매장을 가진 주인의 설움으로 받아들이는 수밖에. 비디오 몇장 들어내다보면 어느새 시간은 새벽을 넘어 아침으로 가고 있다. 아무리 비디오 가게가 문을 늦게 연다지만 아침 손님들을 기다리게 할 수는 없는 법. 대충 정리하고 신작 비디오 가운데 찍어둔 놈을 골라 집으로 향한다. 집에 가면 박사 학위 심사중인 남편이 인터넷으로 <카우보이 비밥>을 보느라 정신이 없겠지.

한림대 정문에서 한 블록 정도 떨어진 곳에 자리한 ‘영스타 비디오’(033-251-5735)에는 영화를 무지 좋아하는 한림대 캠퍼스 커플 출신의 부부가 살고 있다. 86년부터 비디오 가게가 자리한 터라고 하니 땅에도 체질이 있나보다. 몇 차례 터의 주인이 바뀐 끝에 96년 3월 지금의 이정란씨가 매장을 인수했다. “인수하고 나서 보니까 매장에 액션이랑 에로비디오만 4천편 정도 있더라구요. 다 처분하고 직접 비디오를 구해다 매장을 새로 꾸미기 시작했어요. 아직 ‘진행중’이에요. 다 갖춰지고 나면 아마 춘천에 작은 시네마테크를 차릴 분량이 될 거예요.” 현재 그녀의 매장에는 6천편 정도의 비디오가 소장되어 있고, 그중 희귀 비디오는 3천여편에 이른다. 이렇게 갖추기까지 그녀가 들인 노력은 가히 눈물겹다. 청계천은 물론이고 폐업 소식이 들리는 곳은 어디라도 달려가서 탐나는 물건을 챙겼다. 그런 그녀의 노력을 알아주는 사람은 다름 아닌 고객들. 특히 가까이 한림대 학생들은 입·제대 소식을 일일이 알리러 올 만큼 그녀를 누님처럼 믿고 따른다.

그중에서도 영화동아리 ‘영상틀’과는 영화제 운영을 함께 상의할 만큼 돈독한 연계를 유지하고 있다. 그녀는 지난해 대여섯개의 숍과 함께 ‘비디오를 사랑하는 사람들의 모임’을 결성하고 예닐곱개의 회원숍들과 영업사원의 횡포에 대응하고 나아가 그들과 조화를 이루며 공생할 수 있도록 하는 활동을 펼쳐왔다. 앞으로도 불합리한 시장구조에 대해 끊임없이 안티를 거는 역할을 해나갈 작정이란다. 영스타만의 독특한 이벤트 세 가지. 하나는 ‘오늘’이라는 이름을 가진 무료대여 이벤트로 주성치, 히치콕, 공포영화 시리즈 등을 하루 동안 공짜로 빌려줘 고객들의 편식을 막고, 잊혀져가는 고전들을 새로이 발견하도록 하는 것이 목적이다. 두 번째는 ‘아트 코너 운영’으로 가게 한편에 오목하게 들어간 부분을 활용해 3천여편의 희귀 비디오를 전시하고 월별로 감독을 선정해 고객들이 이용할 수 있도록 했다. 세 번째는 상품권을 발행해 영상동아리 등에서 주최하는 영화제를 관람할 수 있도록 배려한 것이다. 사실 맘같아서는 같은 구역 숍들이 모여 ‘중고 비디오 바자회’ 같은 대규모 이벤트를 개최하는 게 그녀의 바람이다. 마지막으로 그녀가 고객들에게 “영화를 하나의 틀로 규정짓는 객관적 잣대 따위는 잊어버리고, 자신만의 ‘좋은 영화’를 찾는 주체적 영화보기를 시작”하기를 당부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