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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배급전쟁 2000
조종국 2000-01-25

시네마서비스 vs 제일제당 vs 튜브, 한국영화 배급판도가 바뀐다

보이지 않는 손들의 전쟁

‘제일제당이 <춘향뎐>의 ‘흥수’를 가지고 있다.’ 무슨 말일까? ‘제일제당이 <춘향뎐>의 배급권을 가지고 있다’는 말이다. 70년대까지만 해도 영화배급(권)을 ‘흥수(興手)’라 불렀다. 배급이 영화의 흥행을 좌우하는 손이라는 뜻이다. 예나 지금이나, 영화 유통구조에서 배급은 흥행을 판가름하는 관건이다. 노점에서도 물건 진열을 잘해야 하나라도 더 팔 수 있듯, 영화를 보다 많은 사람에게 보여주기 위해선 상영관 확보가 절대적인 조건인 것이다.

한국영화의 새해맞이는 극장을 둘러싼 ‘배급전쟁’으로 유쾌하지 않았다. <박하사탕> <거짓말> <행복한 장의사>가 1주일 터울로 개봉하면서 극장 다툼을 벌였고, 잘나가던 <해피엔드>가 중도하차했기 때문이다. 어느 한쪽의 횡포나 독선에서 비롯된 일이 아니어서 모두 말을 아끼면서 어벌쩡 봉합되긴 했지만 비슷한 상황이 재연될 소지는 상당히 크다. 결과적으로 한국영화 4편이 눈에 보이지 않게 밀고 당기는 꼴이 됐지만 간단한 해결책이 있었다. 하향 곡선을 그리고 있는 <007언리미티드>나 <토이 스토리2> 같은 직배 영화를 밀어내고 들어가면 됐다. 하지만 극장에서 자발적으로 나서주기 전에는 아무도 힘을 쓸 수 없었다. 할리우드 직배사에 대항할 만한 든든한 배급사가 없었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절망적이지는 않다. 때늦은 감은 있지만 배급사들이 바쁘게 새 판을 짜고 있다. 강력한 배급사 서너개가 경쟁적 공조 체제를 갖추면 판도를 바꿀 수 있다는 기대도 해봄직하다. 바야흐로 배급시장에도 패러다임이 변하고 있다.

90년대, 배급전쟁의 서곡이 울리고

언제나 좋은 극장을 차지하기 위한 공방전은 치열했지만 전쟁이란 말이 실감나게 된 것은 그리 오래되지 않았다. 배급업자와 극장 사이에 ‘같은 편’이라는 묵계가 형성된 몇 그룹이 있었고, 특별한 경우가 아니면 사전에 이들 사이에 교통정리가 됐다. 배급업자별, 극장별로 일정한 라인을 갖춘 꼴이어서 배급업자 사이에 큰 다툼이 생기지 않았다. 하지만 90년대 중반을 지나면서 상황은 달라졌다. 대기업과 금융자본이 영화쪽에 진출하면서 배급업자가 아닌 배급회사로 꼴을 갖추게 됐고, 배급을 둘러싼 신경전은 본격화했다. 대기업들은 서둘러 극장을 사거나 임대해 자사 영화를 풀었고, 극장들의 ‘줄서기’는 기존의 묵계를 허물었다. 또 최근 들어서는 극장들이 영화를 보고 상영작을 고르는 경향이 강해지면서 배급사의 눈치 때문에 울며겨자먹기 식으로 ‘붙여주는’ 게 아니라 영화 선택권이 상당 부분 극장쪽으로 넘어갔다. 이른바 극장을 20개 이상 펼쳐서 개봉하는 것이 가능한 것도 이 때문이다.

한국영화쪽에서 배급전쟁의 불꽃이 튄 것은 삼성, 대우, 일신창투, 시네마서비스 등 4개사가 배급회사로 나선 96년부터지만 이들이 본격적인 경쟁 체제를 갖춘 것은 97년이다. 이 4개사는 97년 전체 한국영화 관객의 73.7%를 분점하며 세를 넓혀 나갔다. 삼성 7.9%, 대우 16.5%, 일신창투 22.1%, 시네마서비스 27.2%(배급작품은 표 참조)를 차지했다. 하지만 98년에는 대우가 사실상 몰락하고 일상창투(6편), 삼성(5편), 시네마서비스(7편)가 3강 체제를 구축했다. 99년에 접어들면서 삼성이 <건축무한육면각체의 비밀> <쉬리> 2편을 마지막으로 퇴각하고, <닥터K> <북경반점> <내마음의 풍금> <유령>을 배급한 일신창투도 슬럼프에 빠진 반면 시네마서비스는 <마요네즈> <이재수의 난> 등의 실패에도 불구하고 <자귀모> <간첩 리철진> <인정사정 볼 것 없다> <주유소 습격사건> <텔미썸딩> 등으로 비약했다.

1강 1중 배급체제, 다크호스 '튜브' 등장

99년 말, 시네마서비스가 독주 체제를 구축한 가운데 삼성과 대우가 물러난 자리에 비싼 재기를 선언한 제일제당 CJ엔터테인먼트가 들어서고, 피카디리극장과 단성사를 운영하는 신도필름(<박하사탕> <거짓말> 배급)이 가세한 형국이 됐다. 외형적으로는 ‘1강 1중 1약’체제. 하지만 새해들어 물밑에서 강력한 복병이 꿈틀거리고 있어 영화계에서는 향후 판도를 예의 주시하고 있다. 복병은 일신창투의 간판이었던 김승범 수석심사역이 설립한 튜브 엔터테인먼트.

이미 배급의 쓴맛 단맛을 다 본 김승범 수석은 불가피하게 배급을 했던 일신창투 시절과는 달리 ‘배급을 전면’에 내걸고 ‘장기전’에 돌입했다. 김승범 수석은 “배급에서 영원한 승자는 없다”며 “패권을 장악해 요리하겠다는 게 아니라 실속있는 2등 전략”이라고 말했다. <중앙역> <제너널> 등을 수입·배급하던 일신창투와는 달리 “이를테면 ‘성룡 영화라도 손을 대’ 당장은 전략적으로 배급력을 강화하는 데 주력”하겠다는 것. 튜브는 올해 할리우드 직배 영화에 비길 만한 ‘큰 영화’ 2∼3편에 ‘제작비 1억달러’급 영화도 염두에 두고 있지만 한국영화는 <가위> <2009로스트 메모리즈>이외 현재 결정된 작품이 없다. 튜브가 본격적으로 닻을 올리고 전략대로 옛 일신창투 이상의 배급력을 다진다면 한국영화 배급에도 폭발력을 가질 것으로 보인다.

시네마서비스의 수성 의지도 만만치 않다. 이미 <인터뷰> <플란다스의 개> <비천무> <신라의 달밤> <유린네이션> <해변으로 가다> <비밀> 등과 외화 서너편을 포함해 20여편의 올해 라인업을 확정한데 이어 우노필름의 차승재 대표까지 날개로 달아 막강 전력을 갖춰 오히려 독점의 폐해를 우려하는 목소리까지 나오고 있다. 이에 대해 시네마서비스쪽에서는 “최근에 흥행한 영화가 많이 나왔고, 다른 투자·배급사가 침체되어 있어서 상대적으로 유리했을 뿐”이라며 “이전에 극장주들은 돈 벌면 부동산을 불렸지만 시네마서비스가 배급력이 강해져서 잘되면 제작에 재투자하는데 뭐가 문제냐”고 주장한다.

<해피엔드>로 ‘해피하게’ 재기에 성공한 제일제당도 원대한 밑그림을 가지고 있다. <행복한 장의사> <춘향뎐>에 이어 강제규 필름의 새 영화 <단적비연수:은행나무 침대2> <공동경비구역JSA> <킬리만자로> <봄날은 간다> 등 한국영화 배급은 물론 <아메리칸 뷰티> <엘도라도> <갤럭시 퀘스트> <글라디에이터> 등 드림웍스 영화를 무기로 아시아 시장까지 진출한다는 계획이다. 제일제당쪽에서는 “직접 투자작품 이외 배급대행까지 포함한 15편 정도의 한국영화와 드림웍스 영화를 묶어 연간 20여편을 배급해 명실상부한 메이저 배급사로서의 입지를 강화”한다는 계획이다. 이처럼 올해 배급판도는 시네마서비스, 제일제당, 튜브 등 3강이 판을 짜고 신도필름, 한맥 등 나름의 입지를 가진 배급사가 가세하는 형국이 될 것으로 보인다. 여기에 투자사로서의 색깔을 분명히 하고 있는 미래에셋캐피탈과 유니코리아(드림벤처캐피탈)의 행보가 영향을 미칠 수 있다는 전망도 있다.

극장파워, 종로3가 vs 탈종로3가

하지만 이런 판도도 극장업계의 지각변동이 아킬레스건이다. 전통적인 ‘라인’ 개념이 희석되고 영화에 따라 극장이 움직이는 이합집산과 합종연횡이 속출하는데다, 할리우드 직배사들의 움직임과도 연동해 극장을 둘러싼 다툼은 더욱 치열해질 것으로 보인다.

우선 가장 큰 변화는 흔히 말하는 ‘배급의 ABC’부터 흔들리고 있다는 것. 배급의 첫단추로 불리던 ‘종로3가(서울극장, 피카디리, 단성사)가 갖는 무게감이 이전만 못하다는 사실이다. 이전에는 종로3가 → 충무로(명보, 중앙)와 기타 종로지역(시네코아, 허리우드 등)→ 강남(시티, 동아) → 신촌(녹색, 신영, 신촌그랜드 등) → 잠실(롯데월드) → 기타 강남지역(씨네플러스, 씨네하우스, 키네마) → 영등포지역(경원, 연흥, 명화 등) 우선 순위로 극장을 정하는 것이 배급의 기본이었다. 하지만 실제로 따져보면 배급의 우선 순위가 꼭 관객 동원력과 일치하지 않는 현상이 벌어지면서 종로3가 쟁탈전이 ‘박진감’을 잃어가고 있는 추세다. 이런 현상은 CGV강변11이 기대 이상의 호황을 누리고 있는 데다 1월29일 개관하는 동대문의 10개관짜리 24시간 극장 MMC까지 변수로 등장해 종로3가의 구심력은 이전만 못한 것이 사실이다. 이런 전망은 당장 현실로 드러난다. 29일 개봉하는 <춘향뎐>이 걸리는 주요 극장은 명보, 허리우드, 시네코아, CGV강변11, MMC 등. 태흥에서 제작하고 임권택 감독이 연출한 이른바 ‘A급’영화가 종로3가를 벗어나 메인 개봉관을 잡는 것은 이전에는 상상할 수 없는 일이다.

서울극장도 곧 3개관을 전면 보수하기로 하는 등 ‘명가’의 자존심 지키기에 나섰다. 한편 CGV강변11을 발판으로 한 제일제당도 시네코아의 2개관을 임대해 ‘탈 종로3가’분위기를 부채질하고 있다. 게다가 제일제당은 지난해 12월 CGV인천14 개관에 이어 올해 분당야탑역(8개관), 분당오리역(10개관), 부산서면(12개관)에 극장을 열고, 2004년까지 일산(10개관), 수원(9개관), 부산 해운대(9개관), 청량리(8개관)에도 극장을 만들 계획을 가지고 있어 배급에서도 상당히 유리한 조건을 갖추게 되는 셈이다.

직배를 넘어 황금분할을 꿈꾼다

하지만 배급에 있어서 열쇠는 할리우드 직배사가 쥐고 있다는 사실을 부인하기 어렵다. 전통적으로 배급에 강한 20세기 폭스, 워너브러더스, 브에나비스타(월트 디즈니)와 이에 비해 상대적으로 약세인 UIP, 컬럼비아 트라이스타 등 5개 직배사는 국내 배급사들이 넘을 수 없는 장벽이다. 한국영화산업의 가장 본질적인 문제점을 찾는다면 으레 외국 영화 중심의 시장구조가 가장 두드러지는 것도 같은 이유에서다. 아무리 시네마서비스의 라인업이 막강해도 물리적으로 1년에 20편 이상을 배급하기 어렵다. 1편당 3주씩 상영한다고 가정해 1년을 50주로 계산하면 17편 정도면 꽉 찬다. 따라서 현재 시네마서비스 정도 규모를 갖춘 배급사가 3∼4개 정도 자리를 잡으면 경쟁적 공조 체제가 가능해지고 한국영화도 어느 정도 안정적인 배급망을 기대할 수 있다. 또 이렇게 ‘황금분할’이 되면 직배사를 누르지는 못해도 견제가 가능해 상당한 시너지 효과를 얻을 수 있다는 것이 영화계의 공통된 바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