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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나티네> 7개의 키워드 [1]

<소나티네> 이중성의 비밀에 다가가는 7개의 테마

<소나티네>는 기타노 다케시 스타일의 정점이다. 이 영화가 그의 최고작인지 아닌지는 논란의 여지가 있지만 <소나티네>를 통해 기타노는 온전한 자기만의 세계를 완성했다. 그것은 거꾸로 <소나티네>가 다른 기타노 영화로 들어가는 비밀의 열쇠라는 뜻도 된다. 사실 기타노는 참으로 알 수 없는 사람이다. 얼음처럼 차가와 보였다가도 느닷없이 천진난만한 장난기를 드러내고, 개패듯 때리는 사디스트가 됐다가 자기 머리에 총구를 들이대는 마조히스트로 돌변한다. 만담가, 쇼프로 진행자로서 비트 다케시와 배우 겸 감독 기타노 다케시의 두 얼굴처럼 말이다. 아마 삶과 죽음, 희극과 비극, 폭력과 순수, 격정과 체념, 집착과 달관, 현실과 이상 같은 상반된 의미를 한 화면에 담아내는 <소나티네>의 스타일은 기타노의 두 얼굴을 담기에 가장 적절한 그릇일 것이다. 폭력, 야쿠자, 죽음, 바다, 코미디, 하드보일드, 최소성의 미학 등 7가지 단어를 키워드로 이런 이중성의 비밀에 접근해보자.

1. 폭력

기타노의 폭력은 예고없이 작렬하는 불꽃놀이이 같다. 감상주의에 빠지길 거부하는 기타노의 폭력은 본연의 업무에 충실한 '순수한' 폭력이다.

기타노 영화의 폭력묘사는 잔혹하고 간결하며 느닷없다. 조직에 상납하지 않는다고 술집주인을 크레인에 매달아 물에 빠뜨려 죽이는 도입부는 다케시풍 잔인함을 단적으로 보여준다. 데뷔작 <그 남자 흉포하다>에는 건물 옥상에서 떨어뜨려 죽이는 장면이 있다. 간신히 난간을 붙잡고 있는 두손을 칼로 긋는다. 때린 데 또 때리는 건 기본이고, <하나비>에선 음식먹는 데 쓰는 젓가락으로 사람 눈을 쑤신다. 하지만 이런 잔혹묘사가 사도-마조히즘적 쾌락에 봉사하는 것만은 아니다. 시각적 충격은 적절한 생략을 통해 즉각적 반응에 제동을 건다. <소나티네>의 마지막 총격전이 대표적인 예다. 주인공 무라카와는 혈혈단신 조직의 보스 일행이 묵는 호텔로 찾아가 M-16자동소총을 갈기지만 카메라는 조명이 꺼진 호텔 2층을 비출 뿐 무라카와를 따라가지 않는다. 총구에서 나오는 격렬한 불빛이 엄청난 총격전을 짐작케 할 뿐, 내부 상황은 상세히 알 수 없다. 흔한 액션 영화라면 반드시 보여줘야 할 총격현장 전체를 조망하는 장면이 없으며, 총을 쏘고 총탄에 맞아 쓰러지는 장면이 가져다줄 폭력의 쾌감도 찾아볼 수 없다. 간결한 묘사에도 폭력장면이 깊은 인상을 남기는 이유가 잔혹함 때문만은 아니다. 그의 영화에서 폭력은 예상치 못한 순간 뒤통수를 때린다. <소나티네>에서 엘리베이터 총격전이나 낚시꾼 행색의 킬러가 행하는 살인장면 등은 모든 사물이 평화를 되찾은 듯 보이는 순간 세상을 핏빛으로 물들인다. 살인자를 찾지 못해 돌아가는 엘리베이터 안에 흥건히 피가 고이고, 원반던지기를 하며 즐거워하는 야쿠자 막내의 이마 한가운데 총알이 박힌다. 관객은 무방비 상태에서 예고없이 작렬하는 폭력의 불꽃놀이를 멍하니 바라보지 않을 수 없다. 기타노의 폭력은 오우삼과 정반대다. 고속촬영을 통해 액션의 지속시간을 늘리는 오우삼은 폭력장면에 격정과 분노, 안타까움과 비장함을 함께 실어나르는 반면, 기타노는 가능한한 간결한 묘사를 통해 폭력장면에 감정이 끼어들 여지를 남기지 않는다. 대신 그는 말초신경의 자극이 대뇌로 전달되는 시간을 늘린다. 감상주의에 빠지길 거부하는 기타노의 폭력은 본연의 임무에 충실한, 아주 ‘순수한 폭력’이다.

2. 야쿠자

야쿠자는 유아적이라는 점에서 희극적이지만 남의 시선을 아랑곳하지 않는 태도로 말미암아 비극을 잉태한다.

<그 남자 흉포하다>

기타노는 야쿠자란 직업(?)에 대단한 흥미를 보인다. 그는 여러 차례 인터뷰에서 야쿠자나 형사가 주인공인 이유가 “죽음에 가까이 있는 사람들이기 때문”이라고 밝혔지만 그게 전부는 아니다. 기타노는 소멸돼야 마땅한 사회의 적을 통해 삶의 희비극을 동시에 포착한다. 야쿠자들이 철부지 아이처럼 노는 <소나티네>의 장면들은 사회화되지 못한 정신과 위압감을 줄 만큼 커버린 육체의 부조화를 보여준다. 그들 몸에 새긴 문신은 상징적이다. 어린아이를 빼고 다른 어디서 자기 몸을 신분증으로 사용하는 집단을 볼 수 있겠는가. 말하자면 야쿠자는 미성숙한 사회의 방증이며 사회로부터 스스로를 고립시키려 애쓰는 사람들이다.

그들은 유아적이라는 점에서 희극적이지만 남의 시선을 아랑곳하지 않는 태도로 말미암아 비극을 잉태한다. <그 남자 흉포하다>에서 주인공인 아즈마 형사는 행동방식에서 야쿠자와 다를 바 없다. 폭력에 의존하는 이 남자는 인정사정 볼 것 없다는 식의 태도 때문에 형사직을 그만두게 되고, 그가 쫓는 야쿠자 역시 똑같은 이유로 조직에서 축출당한다. 사회를 의식하지 못하는 자들은 결국 죽음을 맞는다. 하지만 그렇다고 세상이 제대로 굴러갈까? 새로운 야쿠자 보스와 신참 경찰의 거래를 보여주는 마지막 장면은 비극이 끝나지 않으리라는 걸 암시한다. 흔히 협객 영화라 불리는, 전통적인 야쿠자 영화는 보스나 동료를 위해 목숨 바치는 영웅을 찬미해왔다. 비장한 최후를 맞이한다는 장르의 틀은 크게 다르지 않지만 기타노의 야쿠자는 봉건적 가치를 위해 목숨 바치는 인물은 아니다. <소나티네>의 무라카와가 맞는 죽음이 조직에 대한 책임감이나 동료와 부하에 대한 애정 때문이라고 생각할 수는 없을 것이다. 기타노의 야쿠자는 멋대로 행동하다 사회로부터 배제되고 자멸하는, 존재 자체의 비극성을 상기시킬 따름이다.

3. 죽음

주인공들은 고민하지 않고 죽음을 향해 돌진한다. 작살에 꿴 파란 물고기 이미지처럼 관자놀이를 지난 총알은 머리를 관통한다.

데뷔작에서 네 번째 영화 <소나티네>까지 죽음은 그림자처럼 기타노 영화를 따라다녔다. 주인공들은 선택의 여지마저 박탈당한 듯 고민하지 않고 죽음을 향해 돌진한다. 관자놀이를 관통한 총알이 피를 분출시키는 <소나티네>의 이미지는 영화 첫머리에 제시된 작살에 꿴 파란 물고기의 그림과 일맥상통한다. 주인공을 궁지로 모는 건 조직의 배신이 직접적인 동기지만 그가 자결을 꿈꾸는 건 본격적인 음모가 진행되기 전부터다. 자결이라는 결말은 대단히 일본적인 죽음이며 사무라이식 할복의 현대판이다. 고바야시 마사키 감독의 62년작 <할복자살>에서 주인공은 당장 끼니조차 때울 수 없는 궁핍함에 시달리지만 사무라이라는 신분 때문에 쟁기를 들거나 행상에 나서지 않는다. 굶어죽느냐, 자결하느냐. 둘 중 하나를 택해야 하는 사무라이의 할복은 봉건제도의 비인간적 모습을 고발한다. 반면 <소나티네>에서 자결은 철저히 개인적이다. 낚시를 간 무라카와가 여자와 나누는 대화에서도 드러난다.

“죽음을 너무 두려워하면 죽고 싶어진다”거나 “무서우니까 총을 쏜다”는 무라카와의 말은 얼핏 선문답처럼 들린다. 살육과 배반으로 점철된 현실에서 유일한 탈출구가 되는 기타노의 죽음은 삶을 고해로, 죽음을 해탈로 받아들이는 불교적 세계관에 기대고 있는 것이다. 기타노는 <필름코멘트>와의 인터뷰에서 이렇게 말한다. “내가 죽음에 집착하는 이유는 전후 일본사회가 어떻게 살 것인가라는 서구적 이상을 잘못 이해한 채 일방적으로 받아들여왔기 때문이다. 2차대전 전까지 삶과 죽음은 동전의 양면처럼 동등한 것으로 여겨졌다. 하지만 지금 죽음은 일본사회에서 금기가 됐고 일본인들은 점차 삶 자체만 중요한 것으로 여기게 됐다. 우리는 살아 있는 동안 죽음을 준비해야 한다. 그게 종교가 존재하는 이유이고 일본에서 종교가 더이상 영향력을 발휘하지 못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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