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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낭낙> <잔다라> 감독 논지 니미부트르
2001-08-03

“촬영가면 화장실 갈 시간까지 짜둔다”

타이 뉴웨이브의 중심에는 늘 논지 니미부트르가 있다. 1997년 <댕 버럴리와 그 일당들>로 데뷔한 이후 <잔다라>에 이르기까지 단 3편만을 만들었지만, 국내시장뿐 아니라 전세계를 향해 타이영화의 가능성을 열어보인 최초의 감독이었고, 동료나 후배의 데뷔를 위해 발벗고 나서는 리더십을 발휘하기도 하였다. 그는 메이저 회사인 ‘필름 방콕’에서 감독 겸 제작자로 활동하기도 했지만 지금은 타이의 대표적인 여성제작자인 듀앙카몬 림차로엔과 함께 독립영화사 ‘시네마시아’를 차려 첫 작품 <잔다라>의 완성을 눈앞에 두고 있다.

+ 먼저 한창 믹싱작업중인 <잔다라>에 대해 묻고 싶다. 10명이 넘는 감독이 원작소설이 있는 이 작품의 영화화를 원했지만 결국 당신이 하게 되었다. 어떻게 시작하게 되었나.

= <낭낙>의 성공 이후 많은 사람들이 나에게 차기작이 무엇인지 물어왔고, 나 또한 심적 부담이 있었다. 그러던 중 우연히 청소년 시절에 읽었던 성애소설 <잔다라>가 생각났다. 그래서 그 책을 다시 한번 읽어보았다. 다시 읽어도 매우 인상적이었다. 그래서 영화화를 결심하고 작가인 웃사나 플룽탐을 찾았다. 그런데 웃사나는 이미 사망한 뒤였고, 판권은 그 딸이 갖고 있었다. 그리고 그때 많은 감독들이 영화화를 원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그래서 판권이 이미 팔렸을 것이라고 생각하고 한동안 잊고 있었다. 그런데 그 딸에게서 연락이 왔다. <잔다라>를 영화화할 생각이 있냐고. 그렇다고 했더니 자기 집으로 와서 구체적인 구상을 이야기해 달라고 했다. 일종의 프레젠테이션을 한 셈인데, 그 자리에는 나 외에도 여러 명의 감독이 와 있었다. 그리고 프레젠테이션이 끝나고 난 뒤 그녀는 나를 선택했다. 그렇게 해서 이 작품을 만들 수 있게 되었다(원작 소설 <잔다라>는 1966년에 출간된 소설로, 당시 너무 적나라한 섹스장면의 묘사로 출판금지를 당했었다. 하지만 오늘날 이 작품은 20세기 타이의 소설 베스트 20 안에 꼽힐 정도로 그 예술성을 인정받고 있다).

+ 제작비를 거의 홍콩 어플로즈사에서 댔다.

= 원래 어플로즈사의 피터 챈(진가신)과는 친분이 있었다. 홍콩에서 그와 만났을 때 차기작 이야기를 하다가 <잔다라>에 관한 이야기가 나왔고, 그가 관심을 보였다. 마침 아시아영화에 투자한다는 어플로즈사의 전략과도 맞아떨어졌고.

+ 주연여배우가 홍콩배우인 종려시이다. 해외세일즈를 염두에 둔 것도 있겠지만, 타이에는 그 역을 맡을 여배우가 없었기 때문인 것 같은데(타이는 섹스신에 관한 검열이 매우 엄격하다. 그래서 주연여배우가 과감한 섹스신을 하는 경우가 거의 없다).

= 맞다. 그 역을 맡고자 하는 주연급 타이 여배우가 없었다. 실제로 시나리오를 많은 주연급 여배우들에게 보여줬지만 겁을 냈다. 물론 그 역을 맡겠다는 배우도 있었지만, 역할의 이미지와는 전혀 맞지 않았다. 그래서 아시아권 배우를 생각하게 되었는데, 마침 피터 챈이 홍콩배우를 써보는 것이 어떻겠냐는 제안을 해왔고 홍콩으로 직접 가서 몇몇 여배우들을 만나보았다. 그중에 종려시가 가장 마음에 들었다. 종려시가 베트남계라서 타이사람과 이미지가 비숫하다는 점도 감안했다.

+ <잔다라>는 섹스를 정면으로 다루는 가장 중요한 타이영화가 될 것 같다. 그런데 노출에 관한 이곳의 검열은 매우 엄격하다. 그리고 검열에서 통과된다 하더라도 타이 관객이 이를 제대로 수용할 수 있겠는가.

= 과거에도 에로틱영화는 있었다. 물론 노출의 강도는 훨씬 약했지만. 걱정은 된다. 타이 내에서는 검열에서 어느 정도 잘릴 것으로 예상하고 있다. 그러나 이 작품이 섹스만을 이야기하는 작품이 아니기 때문에 관객이 받아들일 수 있을 것이라고 본다.

+ 영화는 어떻게 시작하게 되었나.

= 나는 외할아버지 슬하에서 성장했다. 그는 군인이면서 전기기술자였는데, 대학진학도 그의 뜻대로 공대로 진학했다. 그러나 수업에 전혀 관심이 없었고 결국 과락으로 자퇴하고 말았다. 그런데 그런 나의 모습을 보고 친척 중 한분이 내가 어렸을 때 그림을 잘 그렸으니 미술쪽으로 전공을 바꿔보는 것이 어떻겠냐는 충고를 하였다. 그 말에 귀가 솔깃하여 다시 대학으로 진학, 미술을 전공하였다. 그리고 예술분야가 나의 적성에 맞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그런데 2학년 때 다큐멘터리를 만드는 친구를 따라갔다가 영상분야의 매력에 빠져들고 말았다. 결국 졸업 뒤에 광고회사에 들어가 CF감독이 되었고 뮤직비디오도 많이 찍었다. 그리고 종착점으로 영화계에 들어오게 되었다.

+ CF 감독 시절의 경험이 영화작업에 도움을 많이 주었나.

= 물론. 광고계는 특히 경쟁이 치열하다. 나는 거기서 사전기획과 일정관리의 필요성을 온몸으로 배웠고, 하루라도 새로운 것에 대한 생각을 멈추면 퇴보한다는 성실함을 배웠다. 지금도 촬영 나가면 화장실 가는 시간까지 미리 짜둘 정도이다.

+ 데뷔작인 <댕 버럴리와 그 일당들>이나 <낭낙> 모두 당신이 만들고 싶은 소재였다. 그런데 그들 모두 흥행에 대성공을 거두었다. 행운아인 셈인데.

= 아니, 나는 한번도 행운아라고 생각한 적이 없다. 나는 남보다 그다지 뛰어난 점이 없다. 그래서 남보다 열심히 생각하고 일을 했을 뿐이다. 그리고 현대 타이인들의 라이프스타일에 대한 연구를 많이 했다. 그들의 감성, 취향 등. 그러한 노력들이 맞아떨어졌다고 본다.

+ 그동안 <낭낙>은 TV드라마를 포함하여 21번이나 만들어졌다. 당신은 그 작품들을 다 봤지만 그 어느 것도 마음에 안 들었고, 결국 그 때문에 리메이크하게 되었다고 밝힌 적이 있다. 실제로 그런가.

= 나는 귀신을 자주 본다. 이상하지만. 그런데 실제로 내가 본 귀신은 영화 속의 귀신과 달랐다. 이전에 만들었던 <낭낙> 역시 마찬가지였다. 애낳다 죽은 여자가 한둘이 아닐 텐데, 왜 낭낙의 이야기만 백년 이상 전해내려 왔을까 궁금했다. 나의 결론은 낭낙의 남편에 대한 지극한 사랑에 초점을 맞추자는 것이었다. 이전의 작품들은 동일한 소재임에도 불구하고 대부분 사랑보다는 복수가 주테마였다. 낭낙이 죽은 것을 안 남편이 재혼하고 이를 시기한 죽은 낭낙이 남편과 새아내에게 복수한다는 식의 내용이었다. 또 일반적으로 여자가 남자를 더 사랑한다고 하는데, 나는 여자가 남자를 사랑하는 것 이상으로 여자를 사랑하는 남자이야기를 하고 싶었다. 그래서 나의 <낭낙>에서는 남편이 아내의 명복을 위해 스님이 되는 것으로 마무리를 지었다.

+ <낭낙> 이후 메이저 회사인 필름 방콕에 들어갔고, 거기서 2편의 영화를 제작했다. 제작자로 변신한 이유는.

= (그는 필름 방콕에서 옥사이드/대니 팡의 <방콕 데인저러스>와 위시트 사사나티앙의 <검은 호랑이의 눈물>을 제작하였다.)

당시 내 친구였던 옥사이드 팡과 위시트 사사나티앙이 감독으로 데뷔하거나 2번째 작품을 만들려고 했지만, 돈 대주는 곳이 없었다. 나는 당시 꽤 유명세를 타고 있었고, 그래서 내가 제작자로 나서면 자본유치가 용이하리라는 판단을 했다. 그리고 성공했다.

+ 왜 최근 타이영화가 갑자기 부상한다고 보는가? 그리고 앞으로의 전망은 어떻다고 보는가.

= 첫째는 뮤직비디오, 광고시장으로부터 유입된 유능한 인력 때문이라고 본다. 두 번째는 몇몇 신인감독의 작품이 흥행에서 성공을 거둔 이후 제작비 유치가 쉬워졌고, 이 때문에 제작환경이 좋아졌다는 점을 들 수 있다. 그리고 문화의 새로운 흐름은 항상 사회·경제적 위기 때 만들어지지 않나? 타이도 그랬다. 90년대 중반 경제위기를 겪으면서 문화에 대한 자각이 일어났고, 그것이 새로운 타이영화의 출발점이었다고 본다. 그리고 이제 타이영화는 어느 정도 궤도에 올랐다고 본다. 앞으로 2, 3년은 괜찮을 것 같다. 좋은 프로젝트들이 많이 있으니까. 관객도 타이영화에 좀더 많은 관심을 가져줄 것 같다. 하지만 그 이후는 모르겠다. 나는 지금 현재 타이영화감독협회 회장인데 회의 때도 미래에 대해 많은 이야기를 나눈다. 지금이 분명 타이영화의 전환기이며 호기이기는 한데, 세상이란 돌고 도는 것 아닌가. 과거에도 타이영화의 전성기가 있었지만, 90년대에 거의 몰락하지 않았나? 우리로서는 좋은 작품 만드는 데 최선을 다할 뿐이다.

방콕=김지석/ 부산국제영화제 프로그래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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