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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영화 신작 프로젝트 [5] - 박찬옥 감독의 <질투는 나의 힘>

내가 나를 사랑해도 될까요?

‘… 나의 생은 미친 듯이 사랑을 찾아 헤매었으나 단 한 번도 스스로를 사랑하지 않았노라. (기형도 ‘질투는 나의 힘’)

지난해 전주영화제, <오! 수정>의 첫 상영을 마치고 돌아오자마자였다. 기형도 시인의 ‘질투는 나의 힘’을 읽은 박찬옥 감독은 시나리오 파운데이션 작업도 없이 막바로 대사와 지문이 들어가는 장편 데뷔작의 초고를 한달 만에 써내려갔다. “그 시에서 한 젊은 남자의 인상을 받았어요, 20대 후반, 자신을 인정할 수도, 아직 자기 자신을 사랑하지도 못하는 시기. 결핍이 동력인, 누군가의 말대로 ‘질풍노도’의 상태에 있는 그런 남자 말이에요.”

미술학도에서 편입한 한양대 재학 시절, 영화제작소 청년 스탭들과 함께 <셔터맨> <캣 우먼과 맨> 등을 만들었고 이후 <있다> <느린 여름> 등의 단편을 통해 인간에 대한 세밀한 관찰력과 초현실적이면서 독특한 분위기로 주목을 받았던 여성감독 박찬옥은 홍상수 감독의 <오! 수정> 조연출을 마지막으로 장편작업에 들어갔다. 삐쭉하던 커트머리에서 차분한 단발머리로 변한 만큼 단편 시절의 범접하기 힘든 강렬함와 야생성은 어느 정도 누그러진 듯했지만, 완벽한 문장보다 단어나 구절의 나열로 대화를 이끌어나가는 기묘한 느낌의 그는 좀더 내밀한 이야기를 시작할 준비가 된 듯했다. “사람들을 보면 참 흥미로워요. 모두 균열이 있거든요. 모순이 있어. 그런데 모두들 자신 안에 부조화와 불일치를 가진 채 그럭저럭 잘 살아가잖아요. 그래서 가끔 사람들이 이상해 보여. 내가 이 사람을 알고 있었나? 저 사람이 내가 알던 사람이 맞을까? 그런 인간에 대한 미스터리랄까? 난 그런 게 재미있더라.” 유부남에게 애인을 빼앗긴 남자가 그 유부남이 편집장으로 있는 잡지사에 일부러 취직한다는 설정은 얼핏 무언가 음모가 도사린, 복수로 이어질 듯하지만 <질투는 나의 힘>의 주인공에게서는 우리가 흔히 말하는 ‘질투’의 그늘을 찾아볼 수 없다. 그보다 이원상이란 인물이 상황에 어떻게 반응하는가, 그리고 그를 둘러싼 3명의 인물, 즉 옛 애인을 뺏어간 유부남 한윤식과 리버럴한 성의식을 가진 연상의 여인 박성연, 이원상을 통해 지리멸렬한 가족으로부터의 탈출을 꿈꾸는 안혜옥까지, 평범한 듯하지만 저마다 이해할 수 없는 구석을 가지고 있는 인물들에게 세심히 공을 들인다. “뭔가 재미있는 이야기를 들려줘야겠다, 그런 생각은 안 했어요. 그냥 온전히 한 인물을 만들어준다면 영화는 족하구나, 생각해요. 시나리오를 보고 누구는 한윤식이 ‘재수없다’, 이원상이 ‘이해가 안 된다’ 하지만 상황보다 그들의 심리상태를 따라가다보면 이해할 수도 있을 거예요. 사실 제가 쓴 시나리오인데도 그 주인공들을 다 통제하고 있다는 생각도 안 들고…. 저는 4명의 인물 모두에게 차가움과 동시에 연민을 느껴요.”

“‘마틴 스코시즈의 <비열한 거리>처럼 그 나이에만 찍을 수 있는 영화가 있기 때문에 청년 시절이 가기 전에 영화를 찍어야 된다’고 생각하지만 그 말은 어쩌면 ‘나 빨리 데뷔하고 싶다’의 명분일 수도 자기합리화일 수도 있는 것 같다”는 솔직한 고백을 털어놓는 박찬옥 감독. 다가올 캐스팅 작업도 만만치 않겠지만 가장 큰 고민은 “‘가을’이란 계절을 어떻게 영화 속에 담을지”라고 한다. “같은 계절을 가지고 끌어올 수 있는 정서는 다 다른 것 같아요. 단편은 이상하게도 늘 여름에만 찍었는데, 이 영화에는 가을의 청명함이랄까. 그저 쓸쓸하지만은 않은 그 계절의 느낌을 담고 싶어요.” 그렇게 찌는 듯한 더위가 가시고 하늘의 키가 훌쩍 커져버리는 날이 오면, “프로듀서, 감독, 촬영감독 모두 데뷔라 ‘생쌀’ 같지만 첫 영화다운 기운이 살아 있는 영화”를 만들어내기 위해 서른네살 여성감독의 카메라는 부지런히 올해의 가을을 퍼담고 있을 것이다.

연출의 변

결핍은 불행한 결말을 낳기 쉬운 아슬아슬한 감정이자, 발로(發露)가 되는 힘을 가진 위대한 감정이다. 이 영화 속의 인물은 결핍을 안고 있는 사람이다. 그래서 영화의 제목, <질투는 나의 힘>에서 ‘질투’는 ‘결핍’의 다른 말이라고, 혼자 생각했었다. 어떤 장르의 영화를 찍어야겠다고 생각해본 적은 없다. 굳이 구분하자면 한 젊은이의 심리를 따르는 ‘심리영화’라고 부를 수 있겠지.

◆ 이런 영화

27살의 남자 이원상은 친구의 부탁으로 문학잡지사에서 일을 시작한다. 이 잡지사의 편집장인 한윤식은 “로맨스가 남은 인생의 목표”인 연애 지상주의자. 유부남인 한윤식을 만나는 모든 여자들은 그에게 쉽게 빠져들고 그 역시 부담없이 사랑을 즐긴다. 사실 이원상의 옛 애인 최미경 역시 한윤식과 사귀면서 이원상을 버렸다. 복수심인지 질투인지, 어쩌면 호기심인지 알 수 없는 묘한 감정으로 한윤식의 주변을 떠나지 않는 이원상. 그는 사진기자로 함께 일하게 된 연상의 여인 박성연에게 새로운 연애감정을 느끼지만 그녀 역시 회식날 밤, 한윤식과 호텔로 향한다. 한편 이원상이 세들어 사는 집의 주인인 24살 안혜옥은 정신병이 있는 아버지, 정신병 징조를 보이는 남동생과 함께 수예점을 하며 힘든 삶을 이어간다. 안혜옥은 이원상을 좋아하고 그와의 관계에 집착하지만 부담을 느낀 이원상은 방세와 메모 한장을 남긴 채 그 집을 떠난다. 그리고 준비해왔던 영국 유학을 포기한 채 한윤식과 새 잡지사를 차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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