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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지털 미학의 가능성, 실험은 계속된다
2001-02-15

전주국제영화제 디지털영화 제작 프로젝트 참여하는 3인의 감독

영국의 존 아캄프라, 중국의 지아장케, 대만의 차이밍량. 세명의 감독들이 올해로 2회를 맞는 전주국제영화제의 ‘디지털 삼인삼색’ 프로젝트 제작에 나섰다. 지난해 출범한 전주국제영화제의 특별프로그램으로 기획된 ‘디지털 삼인삼색’은, 각기 다른 영화적 개성을 지닌 3인의 감독들이 디지털영화를 만들고 전주영화제에서 상영하도록 하는 프로젝트. 작년에는 박광수, 김윤태, 장위엔 세 감독이 참여한 바 있다. 이 프로젝트를 주관하는 영화제 조직위는 지난 1월16일 서울 시네큐브 광화문 극장에서 2회 영화제 개최 설명회를 겸한 ‘디지털 삼인삼색’ 제작발표회를 가졌다. 이날 행사에는 신작 촬영차 파리에 체류중인 차이밍량을 제외한 두 감독, 존 아캄프라와 지아장케가 참여했으며 최민 조직위원장, 정성일 프로그래머, 조직위원이자 ‘디지털 삼인삼색’ 담당 프로듀서인 차승재 사이더스 부사장 등 영화제 관계자들이 함께했다.

디지털 영화의 선봉, 존 아캄브라

이번 ‘디지털 삼인삼색’에 가장 먼저 합류한 감독은 10여년째 디지털 영화작업을 해온 영국 감독 존 아캄프라다. 아캄프라는 지난해 전주영화제 디지털 부문인 N비전 대상을 수상한 중편 <폭동>과, <안개의 기억> <메모리 룸 451> 등 2개의 단편을 들고 전주를 방문했던 감독. 80년대 초 ‘블랙 오디오 필름 컬렉티브’란 영화집단을 만들어 흑인인권, 인종차별 등의 문제를 다룬 다큐멘터리 작업을 주로 해온 그는, 90년대 들어 디지털영화의 미학적 가능성을 꾸준히 실험해왔다. 81년에 폭동이 일어났던 리버풀 지역에 찾아가 당시 폭동 가담자들, 진압경찰들, 현지 주민들을 인터뷰하면서 사람들의 기억에 각인된 폭동과 그 사건이 그들의 삶에 어떤 영향을 끼쳤는가를 돌아보는 99년작 <폭동>은 다큐멘터리에 적합한 매체로서 디지털의 가능성을 보여주며, 어머니를 잃은 사진작가의 명상적인 여행을 담은 <안개의 기억>의 탐미적인 영상은 디지털의 장점이 간편함뿐 아니라 미학적 표현일 수도 있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이처럼 디지털의 독자적인 미학영역을 탐사해온 아캄프라는, ‘디지털 삼인삼색’에 참여해달라는 영화제 조직위의 권유를 흔쾌히 받아들였다. 아캄프라가 구상중인 <나이트 워크>(Night Work)는 밤의 생활에 집착하는 한 남자에 대한 영화다. “낮에는 디지털 환경에 둘러싸여 있지만 일을 매개로 사람을 만나는 아날로그의 세계에서 살아간다면, 밤에는 폰섹스, 인터넷에서의 만남, 게임 등 쾌락의 대부분을 디지털 세계에서 찾으며 살아간다”고 설명한 아캄프라는, 디지털 세계의 인간관계를 통해 우리의 삶 속 디지털의 의미를 되물을 예정이다.

일상을 파고들 지아장커의 카메라

이어 두 번째로 이 프로젝트에 합류한 감독은 중국의 독립영화감독 지아장케다. 북경영화학원 문학과에서 영화를 시작한 그는 소매치기의 삶을 그린 97년 데뷔작 <소무>, 유랑극단 구성원들의 인생역정을 담은 <플랫폼> 등 변화하는 중국 사회와 그 속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의 일상을 사실주의적으로 포착한 영화로 잘 알려져 있다. 그가 처음 ‘삼인삼색’ 프로젝트에 대해 들은 것은 역시 지난해 전주영화제에 잠시 들렀을 때다. 디지털영화에 관심이 많았던 그는 지난 가을 부산영화제에서 다시 만난 정성일 프로그래머의 제의를 받았고, 이내 수락했다. <샤오샨의 귀가>와 같은 비디오 작업과 2편의 필름작업을 해온 지아 장케가 이번에 디지털영화로 찍을 작품은 <공공장소>. 매체는 달라지지만 그의 관심사는 역시 중국사회의 현실이다. 언젠가 고향의 가라오케에서 찢어지는 목소리로 계속해서 혼자 노래하던 남자를 봤다는 그는, 그런 공공장소에서 소외된 사람을 발견한 그때의 분위기에서 현재 중국사회의 모습을 느끼며 영감을 얻었다고. 폐광 위기에 처한 내몽고 지역의 타퉁 지방에서 촬영할 <공공장소>는, 제목 그대로 늘 많은 사람들이 오가는 공공장소의 풍경을 담을 다큐멘터리다. 자본주의가 들어오면서 처음 등장한 가라오케와 사우나를 비롯해 병원, 버스정류장, 공중전화박스 같은 공공장소에서 만나는 사람들의 인터뷰와 일상을 찍을 예정. “디지털은 감독과 찍는 대상의 거리를 좁혀준다”는 지아장케는 기기, 날씨 등 여러 조건에 좌우되는 필름 작업으로는 미처 다가갈 수 없었던 사람들의 일상으로 깊이 파고들어볼 작정이다. 또한 공공장소지만 같은 지역 사람들이 모여드는 만큼 공통의 화제를 나누는 모습이나, 틈틈이 발견되는 개인적인 이야기를 통해 중국 사회의 현실을 담고 싶다는 게 그의 기획 의도다.

차이밍량, 문틈으로 세상을 보다

제작발표회에 참석하지 못한 차이밍량의 디지털영화는 <셀랑고르 빌딩>. 타이페이의 방황하는 청소년들을 그린 <청소년 나타>로 92년에 데뷔한 이래 <애정만세> <하류> <구멍>에 이르기까지, 대만 대도시의 일상을 통해 현대사회의 소외와 단절감을 담아온 차이밍량이 이번에는 말레이시아로 무대를 옮겨간다. 말레이시아는 77년 영화학교에 들어가려고 대만으로 건너가기까지, 차이밍량이 나고 자랐던 곳이기도 하다. 1년 전 쯤 말레이시아 쿠알라룸푸르에 갔을 때 낡고 오래된 건물 안 엘리베이터에 갇혔던 기억이 <셀랑고르 빌딩>에 단초를 제공했다고. 갑자기 고장을 일으켜 멈춘 엘리베이터 문 틈새로 바라본, 층계를 오르내리는 건물의 거주자들, 그런 사고쯤은 아무것도 아니라는 듯 지나가던 사람들의 모습과 그 건물의 분위기를 표현하고 싶다는 게 연출의 변이다.

디지털카메라와 시간제한 30분이라는 공통점이 있을 뿐, 세 작품은 영국과 중국, 말레이시아에서 각각 독립적으로 진행된다. 영화가 완성되면 세편을 하나로 묶어 올 전주영화제에서 상영할 예정. 필름으로 전환하는 키네코 작업을 통해 상영하기도 했던 지난해와 달리, 올해는 순수 디지털 제작, 디지털 상영을 원칙으로 할 계획이다. 프로젝트를 담당한 차승재 프로듀서는 “작년 프로젝트는 아쉬운 점도 많고 극장배급이 여의치 않아 인터넷 배급만 했지만, 올해는 극장 배급도 본격적으로 추진할 예정”이라고 말했다. 변화하는 영화 환경 속 새로운 가능성으로서 디지털영화를 선택한 전주영화제의 ‘디지털 삼인삼색’ 두 번째 실험이 어떤 결과를 낼지는, 영화제가 열리는 4월 말에 확인할 수 있다.

글 황혜림 기자blaux@hani.co.kr

사진 정진환 기자jhjung@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