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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티븐 스필버그와 <A.I.>
2001-08-17

이 동화는 왜 이렇게 쓰라리지?

스필버그, 큐브릭의 어둠 안고 집으로 돌아오다

누구나 알고 있는 것처럼 할리우드를 지배하는 것은 욕망과 돈이다. 할리우드는 돈을 위해서라면 무엇이든 한다. 하지만 예술을 위해서는 쉽사리 돈지갑을 열지 않는다. 80년대 이후의 할리우드에서 자신의 이상을 고집하는 작가들은 대부분 아슬아슬한 벼랑 끝에 몰려 있었다. 천하의 스탠리 큐브릭도 예외는 아니다. 60년대에 <스팔타커스> <롤리타> <닥터 스트레인지러브> 등 영화사에 길이 남을 걸작들을 양산하던 스탠리 큐브릭은 80년에 <샤이닝>을 만들고 7년이 지난 뒤 겨우 <풀 메탈 자켓>을 만들 수 있었다. 그리고 다시 12년이 흐른 20세기의 마지막 해에 유작인 <아이즈 와이드 셧>을 만들었다. 지독한 완벽주의와 아무도 거스를 수 없는 고집 그리고 ‘천재성’ 덕분에 스탠리 큐브릭은 거장이 되었지만, 할리우드와 쉽게 화해할 수는 없었던 것이다.

공교롭게도 90년대에 스탠리 큐브릭을 구제해준 사람은 할리우드의 지배자인 최고의 스타와 감독이었다. <탑 건> 이후 블록버스터는 물론이고 마틴 스코시즈, 리들리 스콧, 올리버 스톤, 브라이언 드 팔마 등 거장의 작품에도 꼬박꼬박 참여해온 톰 크루즈는 ‘최후의 거장’으로 스탠리 큐브릭을 선택했다. 기꺼이 1년 반의 세월을 바쳤다. 아마도 톰 크루즈가 아니었다면 <아이즈 와이드 셧>도 쉽게 빛을 보기는 힘들었을 것이다. <A.I.>의 탄생설화도 비슷하다. 할리우드의 모든 법칙과 규율 위에 군림하는 초법적 존재인 스티븐 스필버그가 아니었다면, <A.I.>는 그대로 물밑에 가라앉았을 가능성이 컸다. 20여년의 세월 동안 <A.I.> 에 열중하던 스탠리 큐브릭은 생전에 스필버그와 수시로 의견을 교환했고, 큐브릭의 사후 그 아내는 스필버그에게 <A.I.>의 스크립트를 넘겨주었다. 당시 스필버그는 <마이너리티 리포트> <게이샤의 추억> 등 수많은 프로젝트가 널려 있었지만, <A.I.>를 첫머리에 올려놓았다. 당연하지 않은가. <A.I.>는 큐브릭의 영혼과 대화할 수 있는, 마침내 사랑을 나눌 수 있는 ‘유일한 밤’인 것이다. 스필버그의 손길을 받아서, <A.I.>도 마침내 ‘real live movie’의 은총을 받았다.

작가는 가고, 동화는 남다

<A.I.>의 현지평은 대체로 우호적이다. 영화평론가 앤드루 새리스는 “지나치게 저평가된 <태양의 제국>에 버금가는 대단히 감성적이고, 존재의 의미를 파고드는” 걸작이라고 치켜세운다. 거기에서 의문이 생긴다. 그것은 과연 스필버그의 온전한 재능일까? <A.I.>에서 스탠리 큐브릭의 영향은 과연 어느 정도일까. 만약 스탠리 큐브릭이 만들었다면, 스티븐 스필버그의 영화와 무엇이 달랐을까. 만약에 일본이 진주만을 공습하지 않았다면 이후의 세계역사는 어떻게 되었을까, 를 따지는 것처럼 부질없는 짓이긴 하지만 재미있는 추측인 것은 분명하다. 스필버그가 처음 큐브릭을 만난 것은 79년이다. 각각 <샤이닝>과 <레이더스>의 프리프로덕션 과정중에 스튜디오에서 만났다. 스필버그가 큐브릭을 알고 있는 것은 당연한 일이고, 큐브릭도 <죠스>와 <ET>를 만들었던 젊은 감독의 이름을 알고 있었다. 친구가 된 두 사람은 80년대를 주로 <A.I.> 이야기를 하며 친교를 쌓았다. 큐브릭이 <A.I.>의 시나리오 작가를 추천해달라고 하여 스필버그는 자신의 누이를 비롯하여 수많은 사람을 천거했지만, 모두 퇴짜를 놓았다. 그럼에도 두 사람의 관계는 여전히 좋았다.

1969년에 발표된 브라이언 앨디스의 <Supertoys Last All Summer Long>을 읽은 스탠리 큐브릭은 앨디스에게 시나리오를 부탁했다. 초고가 완성된 뒤 다음 작업은 SF작가인 이안 왓슨에게 이어졌다. 어머니의 사랑을 받고 싶어하는 소년 로봇의 모험을 그린 <A.I.>의 스토리 얼개 대부분은 이안 왓슨이 만들었다. 이안 왓슨은 큐브릭의 열정과 재능에 완전히 사로잡혀 충실한 로봇이 되었다. 90년대 초반 내내 큐브릭의 ‘마음의 노예’가 된 것이다. “당신이 큐브릭에게 조금이라도 도움이 된다고 생각하면 결코 헤어날 수 없다”는 것이 이안 왓슨의 고배이다. 이안 왓슨의 시나리오에 <피노키오> 스토리를 추가해야겠다고 생각한 큐브릭은 95년 동화작가 사라 메이트랜드에게 시나리오 수정을 부탁했다. 94년 큐브릭은 스필버그 감독, 큐브릭 제작자로 <A.I.>를 만들자고 스필버그에게 제안한 적도 있었다. 그러나 마음을 바꾼 스탠리 큐브릭은 일단 <아이즈 와이드 셧>에 주력했다. 그 동안에도 시나리오 작업을 계속됐다. 결국 스필버그가 큐브릭 사후에 받은 시나리오는 거의 4시간 분량의 산만한 이야기였다. 시나리오와 함께 이미지 역시 사전작업이 있었다. 판타지 소설에서 삽화를 그렸던 크리스토퍼 베이커는 <A.I.>의 시나리오를 보고 1천장 이상의 드로잉을 그렸다. 로봇 사냥에 나선 달 모양의 비행선이 그의 그림에서 따온 이미지의 하나.

큐브릭이 사망한 뒤 제작자이며 큐브릭의 처남이기도 한 얀 할란은 스필버그에게 <A.I.>의 감독을 의뢰했다. 이미 <A.I.>에 대한 수많은 의견을 나누었고, 한때 큐브릭이 감독으로 생각했다는 전제말고도 <A.I.>의 감독으로는 스티븐 스필버그 이외엔 떠오르지가 않는다. <A.I.>에는 스필버그 영화에서 익숙하게 보던 모든 코드가 다 들어 있다. 로봇인 데이빗은 어머니에게 버림받고 집으로 돌아가기 위해 긴 여정을 떠난다. 하늘에 둥실 떠오르는 달에서 연상되는 <ET>도 그랬다. 지구에 홀로 떨어진 외계인은 고향으로 돌아가고 싶어한다. 그것은 <태양의 제국>이나 <쉰들러 리스트>와 <아미스타드>처럼 스필버그가 ‘성인’의 이야기를 다룬 영화에서도 되풀이되는 주제다. 그 영화들에는 모두 ‘돌아가고 싶어하는’ 사람들의 이야기가 나오고, 그를 돕는 누군가가 등장한다. 스필버그는 동화도 좋아한다. 스필버그는 아이들이 좋아하는 동화책 <피터 팬>을 각색한 <후크>도 만들었다. <A.I.>에서 데이빗이 곰인형 테디와 지골로 조의 도움을 받는 것은 <오즈의 마법사>에서 오즈가 허수아비, 겁쟁이 사자 등과 함께 여행을 떠나는 것과 흡사하다. ET가 어린아이들의 도움으로 집으로 돌아가는 것도 동일한 구조다. <피노키오> 이야기를 덧붙인 것도 스필버그를 사로잡았을 것이다. <미지와의 조우>에서 외계인들을 맞이하는 음악으로 애니메이션 <피노키오>에서 나왔던 <When You Wish Upon a Star>가 거꾸로 연주돼 울려퍼진다.

큐브릭의 암울한 아우라, 스필버그의 낭만적인 이미지를 만나다

스티븐 스필버그는 언제나 ‘예술가’가 되고 싶어했다. 그러나 평론가들은, 아카데미는 스필버그를 ‘무비 키드’로만 취급했다. 아카데미상을 휩쓴 <쉰들러 리스트>로 스필버그는 비로소 ‘작가’ 대접을 받기는 했지만, 스필버그를 우리 시대의 ‘거장’이라고 치켜세우기에는 너무나도 허점이 많다. <할리우드 영화전략>이란 책에서 스필버그와 작업했던 한 작가는 “스필버그는 영화 안에서 무질서한 상황을 묘사할 때, 그리고 선과 악이 분명하게 구분될 때 그의 진가를 발휘한다. 그러나 복합적인 성격을 가진 인물을 다룰 때 그는 약해지곤 한다”고 말한다. <빅>처럼 어른의 몸을 가진 아이인 스티븐 스필버그는 아직도 ‘쇼맨’(showman)의 이미지에서 헤어나지 못하고 있다. 그런 점에서 <A.I.>가 “<쥬라기 공원> <인디아나 존스> 등의 쇼맨십과 <쉰들러 리스트> <라이언 일병 구하기> 등의 성인용 드라마를 하나로 합친 영화”라는 평은 적절할 것이다. <A.I.>는 무작정 집 떠난 아이의 모험을 환상으로 감싸던 전작들과는 달리, 씁쓸하고 비감한 기운이 넘친다.

<A.I.>를 건네받은 스필버그는 현명한 선택을 했다. 최대한 스탠리 큐브릭의 후광을 받아들이기로 한 것이다. “내가 그보다 잘 만들 수 없음을 잘 알고 있기 때문”에 “그가 나에게 전해준 부분은 최대한 이용했다. 그리고 나머지 부분에 대해서는 나 자신의 것으로 새롭게 창조했다.” <A.I.>는 큐브릭의 암울한 아우라와 스필버그의 낭만적인 이미지가 유려한 조화를 이루고 있다. 데이빗이 어머니와 교감을 나누고, 또 버림받는 과정을 그린 초반은 엄청난 감정의 해일이 몰려들면서도 철저하게 냉정함을 유지하는 연출력이 탁월하다. 원래 큐브릭이 만들어낸 <A.I.>의 원안을 그대로 따르자면 R등급의 영화가 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스필버그는 자신의 아이들도 볼 수 있는 PG-13에 눈높이를 맞췄다. 배배 꼬인 지골로 조가 다정한 성격이 된 것은 물론 벅스비 버클리의 뮤지컬에 등장하는 30년대풍의 인물로 만들어졌다. “그는 섹시한 게 아니라 로맨틱하다.” <A.I.>는 <시계태엽장치 오렌지>의 미래세계를 연상시키면서도, 비정하기보다는 낭만적이다. ‘서정적인 힘이 놀라운 상상력으로 재현’되었다는 외지의 평은 충분히 신뢰할 수 있다. <A.I.>는 아름답고, 슬프고, 로맨틱한 이야기다.

그러나 스필버그는 큐브릭이 아니다. 큐브릭의 원안에는 데이빗의 어머니는 단 한번도, 그에게 사랑을 주지 않았다고 한다. 그리고 데이빗을 버린다. 아마 데이빗을 창조한 하비 박사의 모습도 상당히 일그러져 있을 가능성이 크다. 데이빗이 자신을 인간으로 만들어줄 푸른 요정을 찾아 세계의 끝에 있는 하비 박사의 연구실에 갔을 때, 그가 목격한 것은 ‘데이빗’이라는 이름의 로봇들이었다. 수십, 수백개의 상자 속에 들어있는 ‘나 자신’. 스필버그는 하비 박사를 정상인으로 묘사하려 하지만, 잃어버린 아들의 추억을 그렇게 되살리려 하는 자는 분명 ‘미친 과학자’(mad scientist)다. 데이빗이 그곳에서 발견한 것은 바로, ‘unique’하지 않은 자신인 것이다. 그러나 스필버그는 다시 한번 데이빗에게 ‘unique’를 돌려준다. 바다 밑에서 얼음에 갇혀 2천년이 흐르고, 다시 깨어난 데이빗은 오로지 하나뿐인 존재가 되는 것이다. 그 썰렁하면서도 낭만적인 상상력은 분명히 큐브릭이 아니라 스필버그의 것이다.

`우리`도 `그들`도 아닌, 유일무이한

데이빗은 ‘real’과 ‘unique’란 단어에 집착한다, 아니 의미에. SF영화에 등장하는 대부분의 로봇이나 안드로이드는 인간이 되기를 원한다. <바이센테니얼 맨>의 앤드류도 인간이 되기를 원하는데, 그가 가장 좋아하는 단어 역시 ‘unique’다. 그는 자신과 마찬가지로 독특한 ‘개성’을 지닌 로봇을 찾아 전세계를 헤맨다. 그러나 대량생산된 로봇은 모두 동일하다. 하드웨어만이 아니라 소프트웨어도 똑같다. 물론 ‘A.I.’가 어느 정도의 개성을 지닐 수는 있다. 하지만 그것도 입력된 정보가 무엇인지에 따라 결정되는 우연일 뿐이다. 태어날 때부터 타자와 동일한 존재는 타자와 구별되는 자신만의 독특한 무언가를 찾는다. <A.I.>의 데이빗은 어떨까. 그는 인간이 아니라 로봇이다. 그렇다면 그냥 또 하나의 로봇에 불과할까? 데이빗은 다른 로봇들과는 달리 유일하고 독특한 존재다. 그는 자신의 꿈, 동화의 환상을 좇아 자신만의 여행을 떠난다. 그리고 그것을 이루기 위해 세계의 끝까지 나아간다. 그것은 ‘로봇’이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다. 그래서 데이빗은 ‘우리’도 아니고, ‘그들’도 아니다. 그는 이미 유일한 존재인 것이다. <A.I.>는 자신의 안에 있던 것을 찾아가는, 익숙한 동화의 이야기다. 그런 점에서 2천년 뒤 데이빗의 소원을 들어주는 하룻밤은 사족이다. 피노키오의 소원을 들어주었던 푸른 요정을 만나, 그에게 소원을 빌며 영원한 꿈에 빠져드는 데이빗의 모습으로 그대로 끝났다면 더욱 ‘아름다운 동화’가 되지 않았을까. 그러나 스필버그는 그 자신의 푸른 요정을 찾아가는 이야기인 <A.I.>가 사실적인 해피엔딩이 되기를 원했던 것 같다. 분명 큐브릭이라면 그런 허튼 시도는 꿈도 꾸지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스필버그는 큐브릭이 아니다. 스필버그는 자신이 가장 잘할 수 있는 이야기를, 묘하게도 뒤틀린 큐브릭의 세계 안에서 발견한 것이다. 그 덕에 <A.I.>는 <오즈의 마법사>나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 같은 야릇한 기운을 얻게 되었다. 약간의 균열이 보이기는 하지만, 그것도 ‘이상한 나라’에서는 얼마든지 통용된다. 큐브릭의 덕택으로, <A.I.>는 가장 스필버그적인 작품이 된 것이다.

김봉석 기자 lotus@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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