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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댄스]발견은 없었다, 발전은 있었다
2001-02-16

2001년 선댄스영화제 1월 28일 폐막, 대상 수상작 <빌리버>

누군가 선댄스영화제와 그해 파크시티 날씨의 상관관계에 대해 이야기한 적이 있는데, 영화제 기간중 날씨가 좋으면 영화들이 별볼일 없고, 날씨가 춥고 눈보라가 치는 해에 나온 영화들이 좋다는 것이다. 아무런 근거도 없어 보이지만 공교롭게 지난 5년간 이곳을 찾았던 기억을 되짚어, 특히 올해의 경우엔 날씨이론이 제법 설득력 있게 느껴지는 것이 사실이었다. 결론적으로 날씨는 너무 좋았지만 볼 만한 영화가 너무 적었다는 게 이곳에 온 평론가, 배급자를 막론하고 어디서나 들리던 이구동성.

하긴 선댄스에서 나온 영화들 자체를 놓고 작품성을 왈가왈부한다는 것 자체가 부질없는 일이긴 하다. 하지만 만듦새는 다소 미숙하지만 발견의 즐거움을 가져다주었던 영화들보다는, 갈수록 든든한 제작·배급사를 끼고 시장 가치를 높이기 위한 목적으로 대대적인 홍보를 앞세운 이른바 제도권 독립영화들로 채워진다는 느낌을 지울 수가 없다. 이렇듯 어정쩡한 과도기의 여파인지 이렇다 할 화제작이 별로 없어, 영화보기 팍팍하기로 악명이 높은 선댄스도 올해는 그다지 영화보기가 힘들지 않았다는 이야기가 나올 정도. 여하튼 지난 1월28일 시상식에서는 극영화 <빌리버>와 다큐멘터리 <서던 컴포트>가 심사위원대상의 영광을 차지하면서 스무살 생일을 맞은 선댄스의 막이 내렸다.

올 여름부터 예상되는 할리우드 배우들의 총파업으로 야기될 배급물량확보 문제 때문에 올해 선댄스는 유래없는 구매전쟁이 벌어지리라 예상되었지만 역시 전반적인 작품들의 하향평준화추세로 인해 활기를 띠지 못한 듯, 예년 같으면 한나절이 멀다하고 매일 터져나올 법한 전미배급권 구매소식이 올해는 영 뜸했다. 소강상태를 뚫고나온 첫 소식이 미라맥스가 시시 스페이섹 주연의 <침실에서>(In the Bedroom)의 전미배급권을 150만달러에 낙착, 한동안 지병으로 활동이 뜸했던 하비 웨인스타인 회장의 선댄스 복귀에 걸맞게 가벼운 몸풀기를 했다는 것 정도. 이어서 폭스 서치라이트가 심야상영화제작 <수퍼 트루퍼스>와 경쟁부문 최고 경합작품이었던 <딥 엔드>의 전세계판권을 구매, 다소 활기를 불어넣었다.

반면 타임워너-AOL합병의 여파로 선댄스 기간중 전 직원 20%의 대량 해고를 발표한 일명 ‘검은 화요일’ 사태로 업계 전체에 충격파을 던진 뉴라인-파인라인은 어쩔 수 없는 개점휴업상태를 감수해야 했지만 미리 확보한 <헤드윅인 앤 앵그리 인치>가 관객상과 감독상을 거머쥐었으니 그나마 안도하는 분위기다. 매년 구매전선에서 가장 활발하게 움직였던 소니 픽처스 클래식의 경우 <와호장룡>의 엄청난 성공을 만끽하느라인지 올해에는 후보작들을 천천히 관망하는 눈치.

이렇듯 기존 배급사들이 다소 주춤한 틈을 타고 급부상한 미국독립영화배급계 신흥 강자는 선댄스 채널과 더불어 미국 굴지의 독립영화채널로 자리매김하고 있는 IFC. 그간 IFC는 독립영화 프로젝트 투자에 열을 올리는 가운데, 최근 IFC필름을 설립, 본격적인 극장배급진출을 선언하고 나서 이번 선댄스의 아메리칸 스펙트럼에서 가장 좋은 반응을 얻었던 <점프 투모로우> 등 4편을 구매, 새로운 독립영화계의 버팀목으로 떠올랐다.

또 한가지, 올해 선댄스를 풍미했던 핫뉴스 중 하나는 바로 그동안 실질적인 선댄스의 수장역할을 해오던 제프리 길모어가 워너브러더스에서 새로 출범시키는 인디영화 레이블의 총책을 맡아 선댄스를 떠날 것이라는 소문. 제프리 길모어 본인은 인터뷰를 통해 그러한 제안이 온 것은 사실이지만 아직 결정된 것은 아무것도 없다는 입장을 밝혔다.

폭스 서치라이트, 소니 픽처스 클래식, 파라마운트 클래식에 이어 지난해 유니버설에서 유니버설 포커스라는 인디·외국영화 전문 레이블을 창설한 데 이어 워너브러더스마저 독립영화시장에 본격적으로 진출함으로써 점점 본격화되는 독립영화와 스튜디오와의 공생관계를 입증하는 중요한 단서를 제시했다.

영화제 운영면에서는 지난해부터 선보였던 디지털프로젝션이 올해에는 완전히 정착되는 모습을 보이며 더이상 의심할 수 없는 디지털 공존시대를 실감하게 했는데, 어쨌든 올해 선댄스는 프로그램의 전반적인 침체 탓에 오히려 영화외적으로나 산업적으로 중요한 이슈들만이 영화제 분위기를 끌고나간 지극히 비생산적인 예로 남게 되었다.

◈ 드라마 경쟁부문 ◈

드라마부문 대상 수상작 <빌리버>는 80년대 샹탈 애커만의 <황금의 80년대> 같은 작품에서부터 <머홀랜드 폴스>, 마이크 피기스의 <유혹은 밤그림자처럼>, <에너미 오브 스테이트> 등의 시나리오 작가로서 입지를 쌓아온 헨리 빈이 60년대 일어났던 실화를 토대로 무려 25년간 익혀온 숙원의 프로젝트. 미국 내 신나치주의에 가담한 한 유대인 청년이 겪게 되는 비극적 혼란을 성장영화의 틀에 자연스레 녹여낸 수작. 빌리 제인 등 믿음직한 배우들의 연기와 더불어 여느 데뷔감독과는 차원이 다른 공력을 보여준다.

21세기형 <록키호러픽쳐쇼>의 탄생이라는 찬사를 받으며 관객상과 감독상을 휩쓴 존 카메론 미첼의 <헤드윅과 앵그리 인치>(Hedwig and the angry inch)는 이미 오프브로드웨이에서 각광을 받은 록뮤지컬을 영화화한 작품. 독일 출신의 한 남성이 미국 록스타의 꿈를 안고 남성에서 헤드윅이라는 여성으로 탈바꿈한 뒤 맞게 되는 파란만장한 인생역정을 록뮤지컬 감성으로 풀어낸 영화. 영화 간간이 삽입된 독특한 애니메이션과 그래미상에 노미네이션된 파워풀한 사운드트랙이 받쳐주는 공감각적 즐거움이 만만치 않아 한참 뜸했던 새로운 세대의 컬트 클래식으로 부상할 조짐을 엿보게 하는 작품.

경쟁부문 전체적으로는 지난해 득세했던 여성감독의 작품들이 우선 양적으로 달리는 형편. 가장 화제를 모았던 작품들로는 마이클 쿠에스타의 섬뜩한 성장영화 나 1994년 <봉합>(Suture)이란 작품으로 촬영상을 수상한 스콧 멕기와 데이비드 시겔 콤비의 신작 <딥 엔드>가 있다.

◈ 다큐멘터리 경쟁부문 ◈

극영화부문이 아무리 쇠락하더라도 항상 꿋꿋이 선댄스의 자존심을 지키는 부문이 바로 다큐멘터리. 특히 올해는 으레 선댄스산 다큐멘터리하면 떠오르던 파격적인 소재와 극도의 선정성에서 벗어나 민감한 소재를 진솔하고 따뜻한 화법으로 다룬 작품들이 눈에 많이 띄는 것이 특징. 대상을 수상한 <남쪽의 편안함>은 여성→남성 성전환자가 난소암에 걸려 여러 의사를 찾아가지만 치료를 거부당하고 그 와중에 남성→여성 성전환자와 사랑에 빠지게 되는 이야기. 성정체성에 대한 그동안과는 좀 다른 독특한 질문을 던지면서 워낙 화제작으로 꼽혔던 작품. 관객상과 감독상을 수상한 <독타운과 Z 보이즈>는 스케이트보드에 인생을 건 소년들의 이야기. 역시 관객상과 더불어 표현의 자유상을 수사한 <스카우트의 영예>는 보이스카우트 입단을 거부당한 게이소년의 투쟁기를 그려냈는데, 이렇듯 올해 선보인 다큐멘터리들은 소재면에서나 주제에 접근하는 방식에 있어 여느 때보다도 광범위하고 깊이 있다는 평을 일궈냈다.

◈ 프리미어부문 ◈

역시 주류배우들의 참여가 돋보이는 소품들이 대세를 이루었는데, <이브의 시선>의 시나리오를 쓰고 이번 영화제에 심사위원으로 참여한 카시 레몬스가 감독하고 새뮤얼 L. 잭슨이 출연한 <케이브맨의 발렌타인>이 호평을 얻었다. 카메론 디아즈가 출연한 <보이지 않는 서커스>, 게리 올드먼과 <스크림>의 스킷 울리히가 호연을 보여준 <노바디스 베이비>도 그 대표적 사례들. <여왕 마고>의 노골적인 성묘사로 입소문을 모았던 파트리스 셰로의 신작 <인티머시>는 찬반이 상당히 갈리는 편. 이외에 윌리엄 빈들리의 <매디슨>, 밥 고세의 <줄리 존슨>, 선댄스의 여장부 알리슨 앤더슨의 신작 <태양 뒤의 무언가>도 폭넓은 인기를 얻었다.

그러나 가장 화제를 모았던 작품은 뭐니뭐니해도 리처드 링클레이터 감독의 <웨이킹 라이프>라는 애니메이션. 실사 장면 위에 그림을 덧씌운 독특한 애니메이션으로 때로는 사실적이고, 때로는 마치 동양화를 연상시키듯 몽상적인 영상진행과 <비포 선라이즈> 그 이후를 암시하는 듯 에단 호크와 줄리 델피를 등장시켜 재치있는 코드들로 아기자기한 재미를 준다. 어쨌든 새로운 테크놀로지의 장을 연 것이 틀림없는 시도. 하지만 시종일관 지속되는 특유의 사변적인 스토리텔링이 보는 이를 좀 부담스럽게 하는 것은 사실이다. 링클레이터는 다소 길었던 휴식을 한꺼번에 만회하는 듯 에단 호크, 우마 서먼이 출연한 디지털영화 <테이프>를 아메리칸 스펙트럼에 들고 나왔다.

◈ 미드나잇 ◈

최근 들어 다소 주춤했던 심야상영 프로그램은 올해에는 다소 실험적인 색채의 작품일색이었는데 그 와중에 <폴리스 아카데미>를 연상시키는 포복절도 경찰 코미디 <수퍼 트루퍼스>가 가장 높은 대중적인 인기를 얻으면서 폭스 서치라이트에 일찌감치 전세계 판권이 넘어 갔다. 한편, <난 이상한 사람과 결혼했다>로 우리나라에도 알려진 빌 플림프톤의 신작 <돌연변이 에일리언>은 뚜껑을 열었으나 전작의 충격적인 애니메이션 표현과 엽기성이 워낙 강해서였는지 기대에 한참 못 미치는 편. 오히려 심야상영작 중 주목을 끈 작품은 1960년대 브라질의 숨겨진 호러 영화감독 호세 모히카 마린스의 자취를 담은 다큐멘터리 <조의 관>과, 로큰롤과 펑크 역사 탐구에 영화 인생을 걸고 있는 <웨인스 월드>의 감독 페넬로페 스피리스의 로큰롤 오디세이 <우리는 록큰롤에 영혼을 팔았다> 정도.

◈ 월드시네마 ◈

한때 미국 진출을 노리는 세계 각국 대표작들의 각축장으로 <쉘 위 댄스>나 <캐슬> 같은 뉴스메이커가 속출했던 월드시네마섹션은 최근 들어 다소 안일한 프로그래밍으로 갈수록 볼거리가 줄어드는 느낌. 발견이다 싶은 영화는 거의 없고 대부분이 지난해 베를린에서 시작된 국제영화제들을 거쳐온 먼지 쌓인 작품들. 올해에는 지난 토론토영화제에서 선보인 오스트레일리아 최고흥행 화제작 <디쉬>와 캐나다영화 <멜스트롬>, <쇼우 미 러브>로 부상한 스웨덴의 유망주 루카스 무디슨의 <투게더>, 부산영화제에도 선보였던 브라질영화 <나, 너, 그들> 정도가 호평을 받았다. 다소 김빠진 월드시네마부문에서 화제성에서 단연 앞선 김기덕 감독의 <섬>은 올해에도 한국영화붐 조성에 일조했다. 미국배급을 염두에 둔 제작·배급사의 적극적인 홍보활동이 파크시티 전역에서 눈에 많이 띄었다. 특히 영화제 후반부 메인 스트리트 중국음식점에서 열린 포장마차 파티는 유난히 파티에 목숨거는 이곳 영화제에서 올해 가장 인상적인 파티로 회자돼 소기의 프로모션 효과를 톡톡히 거둔 편이다.

파크시티=채희승/(주)미로비전 대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