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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페셜] 의미 표기 체계로 소통에 대해 묻기
연규동(언어학자) 2017-02-22

중국 내몽골에서 현지 조사할 때의 일이다. “겨울에 하늘에서 내리는 하얀 물체를 어웡키어로는 뭐라고 하지요?”과 같은 식의 반복되는 질문들이 지루해질 때쯤, 분위기를 바꾸기 위해 미리 준비해간 무지개 사진을 펴놓고 색깔이 모두 몇개로 보이느냐고 물었다. 그 정도쯤이야 네가 직접 세어보면 알 수 있지 않느냐는 표정을 짓던 현지인 할아버지의 얼굴이 지금도 선명하다. 노인은 무지개색을 하나하나 짚어가며 어웡키어로 일러주었다. 주름진 손이 가리키는 색깔은 네 가지뿐이었다. 우리가 ‘푸른’ 벌판에 누워서 ‘푸른’ 하늘을 바라보는 까닭은 한국인이 녹색과 청색을 시각적으로 구분하지 못해서가 아니며, 영어권 사람들이 ‘형’과 ‘오빠’를 모두 ‘브러더’(brother)라고 지칭한다고 해서 그 차이를 혼동하는 것이 아니다. 이처럼 언어마다 사물을 분류하는 방식에 차이가 생겨난 까닭을 설명하는 이론이 ‘사피어·워프의 가설’이다. 인간은 모국어가 구분해주는 대로 자연 세계를 분할하며, 언어는 사용하는 사람이 사물을 바라보는 방식에 영향을 준다는 이론이다.

영화 <컨택트>는 사피어·워프의 가설에 바탕을 둔 영화이다. 주인공 루이스(에이미 애덤스)는 외계 생명체의 언어에 숙달해 가면서 그들의 사고방식을 획득한다. 인간은 시간의 흐름을 어제-오늘-내일로 이어지는 순서에 따라서 직선적으로 인식하지만, 외계 생명체는 시간을 하나의 원처럼 연결된 것으로 인식한다. 이러한 사고방식은 커트 보니것의 소설 <제5도살장>에 등장하는 외계인과 닮아 있다. “모든 순간, 과거, 현재, 미래의 모든 순간은 늘 존재해왔고, 앞으로도 늘 존재할 것이다. 트랄파마도어인은 예를 들어 우리가 쭉 뻗은 로키산맥을 한눈에 볼 수 있듯이 모든 순간을 한눈에 볼 수 있다.” 관객은 이 영화를 보면서 시간의 흐름대로 사건이 발생하고 있다고 예상한다. 하지만 루이스의 딸 한나가 등장하는 모든 장면은 과거를 회상한 것이 아니라 앞으로 올 미래였다. 플래시백으로 가장한 플래시포워드인 것이다. 커트 보니것의 표현을 빌리자면 루이스는 시간에서 해방된 셈이다. 루이스는 나중에 알게 될 전화번호와 문장을 사용하여 외계 생명체와 인류 사이의 충돌을 막는 역할을 한다. “기억은 묘한 것이야. 우리 기억은 시간의 순서에 구속되어 있지만, 실제 그렇게 작동하지는 않아”(Memory is a strange thing. It doesn’t work like I thought it did. We are so bound by time, by its order)라는 루이스의 독백은 이러한 상황을 암시하고 있다. 루이스가 시간을 바라보는 방식을 바꿀 수 있게 된 계기는 바로 외계 생명체의 ‘무기’, 즉 언어를 배웠기 때문이다.

비선형적이고 기의만을 전달하는 언어

헵타포드의 언어가 가진 가장 큰 특징은 ‘비선형적’(non-linear)이라는 점이다. 헵타포드의 문자 역시 비선형성을 띤다. 이 문자는 공간 위에서 하나로 뭉쳐져 있어서 앞뒤 방향이 없으며 시작과 끝도 없다(그들의 신체 구조나 타고 온 우주선도 같은 특징을 가진다). 헵타포드 방향에서 보든 지구인 방향에서 보든 똑같이 읽힌다. CLEARS와 같은 단어로 예를 들자면, 헵타포드는 이를 거꾸로 한 SRAELC는 물론, 좌우로 뒤집은 형태의 단어와도 같은 단어로 인식하며 (위 이미지 참조) 심지어는 ARSCLE 등과 같이 중간 어디에서부터 읽어도 동일한 것으로 이해한다. 루이스의 딸 이름이 ‘한나’인 것도 이를 은유한 것이다. ‘Hannah’처럼 똑바로 읽으나 거꾸로 읽으나 똑같은 단어나 문장을 회문(回文)이라고 한다(‘생선 사 가는 가사 선생’, ‘Was it a cat I saw’ 등이 회문이며, 슈퍼주니어가 부른 <로꾸거>는 가사 전체가 회문을 이용한 노래이다).

반면에 인간의 언어는 철저하게 ‘선형성’을 바탕으로 한다. “come back to me”라는 문장은 입에서 순서대로 선형적으로 발화된다. come이 발음된 후에 back이 발음되어야 한다. 이 둘이 동시에 발음될 수 없으며, ‘em ot kcab emoc’라고 거꾸로 발음하면 뜻을 알 수 없거나 아예 다른 말이 된다.

인류가 만든 문자 역시 기본적으로는 선형적이다. ‘컨, 택, 트’와 같이 배열 순서를 지키지 않으면 안 된다. 인간의 문자 중에서도 비선형적인 특징을 일부분 가지고 있는 문자가 있다. 우리가 사용하는 ‘한글’이 바로 비선형적인 문자의 좋은 예이다(헵타포드가 한국에 왔다면 우리는 그들의 문자를 루이스보다는 좀더 쉽게 배울 수 있었을까?). 한글을 라틴문자처럼 선형적으로 쓴다면 ‘ㅋㅓㄴㅌㅐㄱㅌㅡ’와 같이 여덟개의 낱자를 배열하는 식이 될 것이다. 하지만 한글의 표기 방식은 ‘ㅋㅓㄴ’을 하나로 모아서 ‘컨’과 같이 쓴다는 점에서 비선형적이다. 그래서 ‘contact’는 일곱 글자이지만, ‘컨택트’는 여덟 글자가 아니라 세 글자라고 인식되는 것이다. 언어학에서 ‘음절’은 파악하기 어려운 개념인데 한국인에게는 비교적 쉽게 인지된다. 한국인이 언어학적으로 뛰어나서라기보다는 바로 음절 단위로 모아쓰는 한글의 속성 때문이다. 문자의 운용 방식이 사고에 영향을 끼친 것이다. 서양 언어학자들은 한글이 가진 비선형적 특징을 ‘음절 단위 네모꼴’(syllable block)이라는 용어로 설명하며, 다른 문자와 구별되는 주요한 특징으로 본다.

헵타포드가 사용하는 문자가 가진 또 하나의 특징은 ‘의미 표기(semasiographic) 체계’라는 것이다. 의미 표기란 의미만 관련을 맺을 뿐 음성으로는 변환되지 않는다는 뜻이다. 의미 표기 체계로 이루어진 헵타포드의 문자는 소리내어 읽을 필요가 없다. 예를 들어, ‘분개하다’라는 개념을 [분개하다]라는 단어를 사용하지 않고 설명해보자. 머릿속에서 어떤 생각은 떠오르지만 이를 말로 표현하기란 쉽지 않을 것이다. 그 개념을 그대로 시각화하는 것이 헵타포드의 문자가 사용하는 방식이다. 기표를 거치지 않고 기의만을 통째로 전달하는 체계이기에, 기표 때문에 기의가 미끄러지는 일도 없으니 의사소통에 오해가 줄어들게 된다. 인간의 문자 중에서 소리와 상관없이 의미만 연결되는 특징을 가진 ‘의미 표기 체계’는 존재하지 않는다. 한국어판에서는 ‘표의문자’라고 번역되었지만, 사실 표의문자라고 해서 소리와 관련을 맺지 않는 것은 아니라는 점에서 오해의 소지가 있다. 대표적인 표의문자인 한자로 예를 들자면, ‘畵’라는 글자는 ‘그림’이라는 뜻과 동시에 [화]라는 소리와도 연결되어 있다. 영화에서 인용되듯이 오스트레일리아에 처음 도착한 백인은 원주민들이 [캥거루]라고 한 것을 그 동물의 이름이라고 오해했다. 마찬가지로 헵타포드의 문자가 인간 언어로 ‘무기’라고 번역되자 지구인들이 민감하게 반응한 것도 기표를 통해서 기의에 왜곡이 일어난 것이다. 헵타포드 입장에서는, 인간의 의사소통은 ‘의미’ 외에도 ‘소리’까지 이용하므로 “두 번째 소통 채널(즉, 소리)까지 흘려보내서 기회를 쓸모없이 낭비(a wasted opportunity passing up a second communications channel)”하는 것처럼 보이게 된다.

언어를 배운다는 것, 소통한다는 것

다시 사피어·워프의 가설로 돌아가보자. 이 이론은 이미 그 이름에 드러나 있듯이 아직 확립되지 않은 ‘가설’ 수준일 뿐이다. 하지만 이 가설의 타당성 여부와 상관없이 상대방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그의 언어를 알아야 한다는 점은 다시 새길 필요가 있다. 그런 점에서 헵타포드가 자신들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지구를 찾는다는 사실은 의미심장하다. 현재는 헵타포드보다 과학적으로 뒤처진 것으로 보이는 인류가 3천년 후에 과연 어떤 식으로 그들을 도와주는 것일까. 지구인들의 의사소통은 불완전하기에 때로 오해를 낳고 싸우기도 하지만, 상대의 언어를 올바르게 이해할 수 있는 ‘도구’를 활용하게 되어 더 나은 문명으로 발달하게 된 것일까. 그리스도교 성경의 바벨탑 이야기에서 신은 인간들의 말을 뒤섞어놓아 협력하는 일을 막는다. 인간들이 같은 말을 쓰게 되면 “그들이 하고자 하는 것은 무엇이든 못할 일이 없을 것”이라는 이유에서이다. 같은 말을 쓴다는 것이 그저 동일한 언어를 사용한다는 뜻이 아님은 확실하다. 서로의 언어를 일방적으로 강요하는 것이 아니라, 상대방이 의도하고 있는 ‘본디 생각’을 올바르게 받아들이고 이해하는 일이 소통의 첫 단계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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