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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페셜] <특별시민> 박인제 감독 인터뷰
송경원 사진 오계옥 2017-04-26

"최민식 선배의 표현을 빌리면 지겹지만 지겨움의 끝을 보자는 영화랄까"

-<모비딕>에 이어 이번 작품도 권력을 둘러싼 사람들에 대한 이야기를 다뤘다.

=시나리오 쓸 때 소재나 주제를 정하고 시작하진 않는다. 특별히 권력이라는 주제에 천착하는 건 아니다. 주로 어떤 직업군에 대해서 다룰까로 고민하는 편인데, 단순하게 보면 <모비딕>은 기자에 관한 이야기였고 <특별시민>은 정치인들에 대한 영화다. 얼개만 비교하면 <모비딕>이 권력에 저항하는 사람들에 대한 이야기였다면 <특별시민>은 권력자들에 대한 이야기다. 보통 감독들이 흥미를 가지는 대상이 정치인, 대기업 총수 등 권력자 아닌가. 개인적으로도 거대한 힘에 흥미가 있는 것 같다.

-아무래도 대선 전이라 현실을 반영한 정치영화로 주목받고 있는데.

=본격적인 정치 장르의 결을 가진 영화는 아니다. 선거 전에 개봉해서 선거 이야기가 나올 수밖에 없지만 사실은 권력욕을 가진 사람들에 대한 캐릭터 드라마다. 해군 내 이중간첩의 이야기를 다룬 케빈 코스트너 주연의 <노 웨이 아웃>(1987)이란 영화가 있다. 그 영화의 원작이 되는 케네스 피어링의 하드 보일드 소설 <빅 클락>에서 영감을 받았다. 거대 출판기업을 무대로 음모론보다는 권력 아래 사람들의 면면을 그린 소설이다. 캐릭터 드라마라는 점에서 이번 이야기의 출발이라고 해도 좋겠다. <특별시민>은 장르의 포맷을 따라가지 않는 만큼 장르적인 관습에서 보면 느슨하게 보일 수도 있을 것 같다. 기존 한국영화에서 정치를 소재로 하면 정치 깡패 등 폭력도 등장해야 하고, 서로를 속고 속이는 반전 게임도 배치해야 하고, 나쁜 무리를 응징도 해야 하는데 이번 영화는 그것보다 좀더 현실에 발붙이고 있다. 최민식 선배의 표현을 빌리면 지겹지만 지겨움의 끝을 보자는 영화랄까.

-어제 시사가 끝났는데 반응은 좀 확인했나.

=영화 만들고 나면 부업이 검색하는 일이다. (웃음) 감독들이 기본적으로 관음증이 있는 것 같다. 온갖 방식으로 영화 반응들 살펴본다. 단지 티를 내지 않을 뿐이지. (웃음) 아쉬운 반응들도 사실 어느 정도는 예상했다. 포스터, 소재, 출연배우들을 보면서 관객이 예상하는 것들이 있을 텐데 그런 면에서 이 영화는 기대를 배신하는 측면이 있다. 장르적인 관습을 따르지도 않고 통쾌하지도 않고. 음모가 깊어진다기보다는 뚝뚝 끊어진다는 느낌을 받을 수도 있다.

-그럼 원래 의도했던 바는 무엇인가.

=캐릭터적으로는 군상을 보여주고 싶었다. 사건적으로는 단발성의 사건들을 차례로 배치해서 순차적으로 박경이라는 인물의 변화를 드러내려 했다. 다만 상황이 늘어나고 이야기가 길어지다 보니 모든 정황을 충분히 설명하지 못했다는 생각이 든다. 다음부터는 시나리오를 65장 이내로 써야 할 것 같다. (웃음) 양진주(라미란) 후보 부분이나 변종구(최민식)의 다른 에피소드 등 보여주고 싶었던 장면들이 많았지만 상영시간의 제약에 맞춰 축약했다. 결국은 감독의 선택이고 완성된 영화로 말할 수 있을 뿐이다.

-캐릭터의 군상극이라고 하면, 이 영화의 진짜 주인공은 선거판 그 자체일까.

=그렇진 않다. 서사상의 주인공이자 이야기의 관찰자는 어디까지나 심은경 배우가 맡은 박경이다. <양들의 침묵>(1991)의 스탈링을 연상하면서 캐릭터를 구상했다. 유권자의 책임과 역할에 대한 질문을 던지는 캐릭터라고 할 수 있다. 다만 촛불과 탄핵 국면을 지나면서 뒤늦게 질문을 던지고 있는 건 아닌가 싶어 공교롭다는 생각이 들었다.

-대선 국면과 최근의 정치적 격변과 맞물려 여러 가지 기시감이 든다.

=영화의 출발은 변종구라는 인물을 구상하면서부터라고 할 수 있지만 특정인물이나 상황을 모델로 한 건 없다. 변종구의 전사(前史)를 짧게 이야기하는게 인물을 정의하는 적절한 방식일 것 같다. 학교는 중학교밖에 안 나왔고 공장 노동자 출신이다. 야학을 다니다가 사회문제에 눈을 뜨게 되고 검정고시, 사법고시를 거쳐서 정치권에 입문한 사람이다. 그런데 국회의원 재선, 삼선에 서울시장까지 당선되면서 권력의 맛을 느낀 거다. 어찌 보면 주변에서 쉽게 찾을 수 있는, 한국의 보편적인 정치인이다. 다만 장르물로 가고 싶지 않았기 때문에 단순한 악역의 스테레오타입이 되는 걸 경계했다. 이 정도면 귀엽다고 할 만큼 적당한 속물? 보기에 따라선 강도가 약하다고 할 수도 있을 것이다.

-곽도원이 맡은 심혁수는 어떤가. 변종구와 대립하는 악역일까.

=같지만 또 다른 인물이다. 변종구가 ‘독고다이’라면 뒷배가 있다는 게 차이랄까. 엘리트 출신에 구두에 집착하는 인물. 변종구와 심혁수가 한 프레임에 잡힐 땐 꼭 서울시의 상징인 강아지 해치와 함께 등장한다. 서로 물고 뜯고 해도 결국엔 똑같은 강아지들이라는 거다. (웃음) 심혁수에게 구두라는 소품을 준 건 무언가를 닦는 행위를 부여하고 싶어서다. 구두에 비친 일그러진 얼굴을 보여주고 싶기도 했고.

-그 장면이 매우 인상적인 이미지다. 전반적인 요소들이 너무 노골적이지도 않고, 너무 감추지도 않아서 적당히 읽어내는 재미가 있다.

=다시 말하지만 감독들은 기본적으로 관음증이 있다. 술집에서 술 마시다가 옆자리에서 누군가가 싸우면 나도 모르게 관찰하고 평가한다. <모비딕> 전부터 휴대폰 메모장을 썼는데 요즘도 그때 썼던 쓸데없는 기록들을 꺼내보곤 한다. 그때 왜 그런 생각을 했을까 다시 떠올리면서 아이디어가 확장되는 것 같다. 그런 게 디테일이라면 디테일이겠지. 한 가지 안타까운 건, 보편적인 상황이나 에피소드를 바탕으로 나름의 상상력을 가미해서 썼는데 공교롭게도 영화적으로 구상했던 상황들이 거꾸로 진짜 현실이 되어버리고 있다는 거다. 의도치 않았는데 현실이 영화를 따라가고 있다. 이재명 시장 출마 선언 방식도 그렇고, 스탠딩 TV토론도 그렇고. 몇 가지 에피소드는 스스로도 깜짝 놀랄 정도다. 그래도 랩은 안 하니까. (웃음) (영화 오프닝 중 변종구 시장은 청춘콘서트를 열어 랩을 하며 등장한다.-편집자)

-의도치 않게 거의 예언서가 되어버린 상황인데.

=솔직히 안타깝다. 좋은 정치인들에 대한 이야기가 아니지 않나. 그래서 관객이 지겨워하지 않을까 걱정이다. 극장에 와서 돈까지 내고 그 꼴을 또 봐야 한다니.

-아쉬운 건 톤이 일정치 않다는 거다. 중반의 한 사건을 기점으로 전반과 후반이 다른 영화처럼 느껴진다.

=그런가? 그렇게 보인다면 그게 이 영화의 약점이겠지. 전반부는 박경, 후반부는 변종구를 중심으로 파고드는 면이 있다. 그런 의미에선 영화의 주인공이 정치판이고, 그 안에서 노는 사람들의 이야기라고 느낄 수도 있겠다. 하지만 말했다시피 이건 선거, 정치영화가 아니다. 변종구, 심혁수, 확장하면 박경까지 권력을 탐하는 인물들의 초상을 그린 영화다. 양진주쪽 에피소드가 부실하다는 지적이 있었는데 그쪽을 강조해버리면 전혀 다른 영화가 될 수 있다. 누가 이기고 지는 게임에 초점이 맞춰지길 바라지 않았다. 만약 이걸 장르영화로 풀고 싶었다면 그렇게 했을 것이다. 스포츠 경기처럼 음모와 반전, 반전에 반전이 계속 이어질 수도 있다. 다만 이 영화는 2시간 동안 롤러코스터 타듯이 즐기기 위한 영화는 아니다. 그렇게 만들었다면 장르적인 재미는 있겠지만 또 빤한 한국영화라는 핀잔도 들었을 것이다. 물론 상업영화가 재미를 추구하는 건 당연한 것이고 필요한 미덕이다. 하지만 장르적인 관습을 반복하고 싶진 않았다. 장르 게임보다 인물의 이야기, 캐릭터의 구도와 변화를 통해 즐거움을 주고 싶다.

-변종구의 선거 캠프 디자인에 상당히 공을 들였다.

=실제로 예산도 제일 많이 투입됐다. (웃음) 선거본부장이 2층에 위치한 복층구조는 권력의 상하관계를 위한 배치다. 변종구 선거 캠프의 색깔인 파란색을 ‘독일 파란색’이라고 불렀는데 독일 지하철 역사에서 본 색깔이 마음에 들어서 그걸로 꼭 해달라고 했다. 그런 집착이 좀 있는 편이다. (웃음)

-아무래도 배우들의 캐스팅이 절반은 먹고 들어가는 영화다.

=흔한 말로 캐스팅이 감독의 연기 연출의 시작이자 끝이다. 나머지는 배우들이 자신의 존재를 증명하는 걸 놓치지 않고 잡아주면 된다. 가령 최민식 배우가 출마 연설을 하는 장면에서 목덜미에 땀이 송글송글 맺히는데, 그게 바로 최민식이다. 누군가가 최민식은 주름 하나까지 연기라고 하던데 전적으로 동의한다. 그 장면을 찍으면서 변종구가 된 것처럼 열정적으로 연설을 하고 땀도 자연스럽게 스며 나왔는데 그게 너무 좋았다. 셔츠가 흠뻑 젖을 정도였는데 일부러 닦지 않고 그 부분을 살렸다. 변종구는 처음부터 최민식이었고, 솔직히 대안도 없었다. 정말 감사하게도 최민식 선배를 비롯해 1순위로 생각했던 배우들이 전부 캐스팅됐다. 내가 캐스팅 운이 좀 있다. (웃음) 솔직하게 말하면 최민식 선배가 캐스팅됐기 때문에 다른 분도 캐스팅된 거라고 생각한다.

-나머지 배역들은 기존의 이미지에 부합한다는 인상인데, 박경 역의 심은경 배우는 신선한 캐스팅이란 느낌이다.

=사실 박경이란 인물은 심은경 배우가 그간 해왔던 역할들과는 톤이 조금 다르다. 다소 건조한 느낌으로 정극 연기를 보여줘야 하는 배역인데 워낙 개성이 강렬한 캐릭터를 자주 해온지라 심은경 배우는 물론 내게도 도전이었다. 워낙 생각이 많고 진지한 배우라 이번 작품을 하면서 가장 많은 대화를 나눴다. 서로의 영역과 경험을 확장할 수 있었던 즐거운 시간이었다.

-양진주 후보의 아들로 할리우드 영화 <메이즈 러너> 시리즈의 배우 이기홍이 깜짝 등장한다.

=<메이즈 러너>를 보고 직접 연락을 해서 캐스팅했다. 의외로 흔쾌히 응해줬고 성실히 촬영에 임했다. 사실 할리우드 스타 아닌가. 그런 걸 전혀 의식하지 않았고 쾌활하고 소탈했다. 반면 연기에 대해서만큼은 굉장히 진지한 친구다. 즐거운 작업이었다.

-숏의 구도, 소품의 배치 등 장면마다 의미 부여를 위해 신경 쓴 느낌이다. 꼼꼼하고 성실하달까.

=가끔 젊은 친구들의 단편 작품들을 보면 왜 이렇게 찍었는지를 알 수 없을 때가 있다. 필름과 달리 디지털은 좀더 현장감을 즐기는 것 같다. 많이 자유분방하게 찍는. 영화는 배워서 되는 게 아닌데 어쨌든 나는 학교(한국예술종합학교 영상원 학사)에서 순서대로 배운 사람이라 그런지 장면마다 이유가 없으면 불안하고 불편하다. 다만 맞고 틀리고의 문제는 아니다. 내가 이해를 못하는 걸 수도 있고 좀더 열어두고 찍는 게 트렌드일지도 모른다. 꼰대처럼 보이면 안 되는데. 나도 아직 젊은데. (웃음) 예전에 이창동 감독님이 시나리오는 만나지는 거란 말씀을 하셨던 게 기억난다. 어떤 걸 하고 싶다고 아무리 방향을 설정하고 의식해도 결국 끌리는 이야기, 타고난 꼴을 찾아가게 되는 것 같다. 물론 나는 ‘아직 젊으니까’ 한참 멀었다. (웃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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