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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페셜] 한국 최초의 장편애니메이션 <홍길동> 만든 신동헌 감독을 추모하며

서(序)_“한국 애니메이션의 큰 별이 졌다”

다른 표현을 생각해보았지만 결국 글의 시작으로 이 문장을 대체할 수는 없었다. 신동헌 감독은 분명 ‘큰 별’이다. ‘큰 별’에는 여러 의미가 있다. 다른 뭇 별들에 비해 크기와 밝기가 엄청나다는 뜻도 있고, 모든 별들에 시기적으로 앞섰으며 그로부터 다양한 별들이 나오게 되었다는 뜻도 있다. 그리고 모두가 길을 잃지 않기 위해 의지하는 별을 뜻하기도 한다.

그러나 애석하게도 이 글을 쓰는 나 자신뿐만 아니라 독자 대부분은 신동헌 감독의 동시대 관객은 아니다. 달리 말하면 우리 대다수에게 신동헌 감독은 ‘이미’ 전설로 자리하였으며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의 작품을 접할 수 없었기 때문에 ‘어째서’ 그 반열에 오르게 되었는지 알기 어렵다. 이러한 상황은 일종의 양면성을 갖는다. 한편으로 ‘최초’라는 역사적 시원(始原)으로서의 의미 부여가 있으며, 다른 한편으로는 ‘아득한 옛날’이라는 좁힐 수 없는 시간대의 간극이 놓여 있다. 그러니까 신동헌이라는 큰 별은 현재의 관객에게 동시대성이라는 역사적 구체성이 사라진 채로, 그의 활약상은 입에서 입으로 전해 내려오면서 기원 설화에 가까워져간다고 할 수 있다. 애니메이션을 사랑하는 이들은 ‘신동헌’이라는 이름의 무게는 알고 있되 그가 만든 작품들을 보면서 음미하지는 못했다. 그럴수록 신화가 갖는 권위는 커질 수 있지만, 자칫 본연의 내실은 부실할 수 있다.

<홍길동> 포스터.

전통과 모던 사이_<홍길동> <호피와 차돌바위> <장군의 수염>

다행히 지난해 <홍길동>(1967년 1월 개봉)과 <호피와 차돌바위>(1967년 8월 개봉)가 DVD로 선보이면서 비로소 그의 작품을 꼼꼼히 음미할 수 있게 되었다. <홍길동>은 꽤 오랫동안 사라졌었고, 이러한 부재는 이 작품을 역사적 실재에서 벗어나 전설이라는 상상적 존재로 넘어가도록 만들었다. 실물로 남아 있지 않은 작품은 그저 몇 안 되는 광고와 기사를 통해서만 존재(의 흔적)를 증명하였으며, 후대는 기록의 파편들 속에 상상력을 불어넣어 ‘전설로 남을 만한 걸작’으로 저마다 어림짐작했다. ‘최초’이면서도 ‘흥행 성공’(해당연도 박스오피스 2위!)이라는 영예로움을 담고 있는 작품이 홀연 사라졌다는 사실은 전설과 신화를 이루는 꽤나 극적인 요소이다. 그리고 모두가 포기하고 있을 때 별안간 (40년이 지난 2007년 말, 그것도 한국이 아닌 일본에서, 게다가 정식 포맷인 35mm가 아닌 16mm 형태로) ‘발견’되었다는 소식은 전설과 신화를 한 단계 업그레이드시켰다. 마치 미술관에서 도난당한 후 행방불명되었다가 수십년 만에 어느 외딴 창고에서 발견된 명화가 들려주는 드라마처럼.

상상 속 용을 그렸던 이에게 <홍길동>은 기대만큼의 ‘명작’이 아닐 수도 있겠지만 비교 기준을 디즈니 장편애니메이션으로 고집할 필요는 없다. 제작비와 제작기간, 제작진의 숙련도, 기술력 등을 따지자면 전세계적으로 디즈니는 ‘넘사벽’이었으니까. 그 당시 만들어진 여타의 장편애니메이션과 비교하자면 <홍길동>은 꽤나 수준급에 도달한 작품이다. ‘최초’라는 이유 때문에 너그러울 필요는 없다. <홍길동>에는 한계도 있지만 그 이상의 미덕이 더 많은 작품이다. 허균의 홍길동 이야기를 애니메이션으로 옮겨오면서 (동생 신동우 화백의 만화 <풍운아 홍길동>을 거쳐) ‘신동헌의 <홍길동>’으로 거듭났다. 그 속에는 전통의 힘만큼이나 현대적 감수성이 녹아 있으며, 비장함은 유머와 함께하고, 인간 군상의 모습을 애정을 갖고 담아내고자 하였으며, 역동성과 스펙터클을 표현하는 데 조금의 주저함이 없었다. 제한적이나마 남겨진 자료와 신동헌 감독의 인터뷰로 미루어보건대 급박한 제작 스케줄 속에서도 그는 작품을 꼼꼼히 준비하고 막판까지 과감히 수정하면서 완성도를 끌어올리기 위해 애썼다.

<호피와 차돌바위> 포스터.

그 후 제작사와의 갈등으로 <홍길동>의 후속작은 다른 감독의 손에 넘어갔지만 덕분에 우리는 전혀 새로운 속편을 맞이할 수 있었다. 바로 <호피와 차돌바위>. 호피는 신동우 화백이 만화 <풍운아 홍길동>에서 탄생시킨 인물로, 강렬하면서도 쿨내 진동하는 ‘모던 뽀이’ 그 자체다. 홍길동의 경쟁자이면서도 조력자이고, 끝까지 아웃사이더로 남아 있는 캐릭터였던 호피는 신동헌 감독의 두 번째 장편에서 당당히 주인공의 반열에 올랐다. 그리고 그 옆에서 극의 중심을 잡아주는 역할로 존재감이 올라선 차돌바위. 이 둘의 앙상블은 배트맨과 로빈의 팀워크 이상의 매력을 지닌다.

신동헌 감독의 창작에서 모던 미학의 정점을 보여주는 작품은 <장군의 수염>(1968)일 것이다. 이성구 감독의 라이브 액션 장편 속에 극중극으로 들어가 있는 이 작품 또한 한동안 잘 알려지지 않았다. 이어령의 원작 소설에 김승옥 각색이라는 어마무시한 네임밸류를 잠시 옆에 내려놓더라도, 애니메이션 <장군의 수염>은 그 자체로 오롯이 단편의 완성도를 보여준다. 독립군 장군(애초에는 쿠데타의 주역이었는데 당시로서는 수정할 수밖에 없었다)의 콧수염을 모두가 따라하는 (거의 부조리극에 가까운) 블랙코미디 상황과 그로부터 벗어나려 하는 주인공의 고뇌와 몸부림을 담기 위해 신동헌 감독은 이른바 ‘모던 카툰’ 스타일을 적용하였다. 모던 카툰 스타일은 당시 디즈니의 사실주의 스타일에 맞서 공간적 평면성과 그래픽적 단순, 간결함을 내세운 미적 양식으로서 미국의 유피에이(UPA) 스튜디오에서 출발하여 옛 유고슬로비아의 자그레브 스튜디오를 비롯, 동유럽을 거쳐 일본의 데즈카 오사무에 이르기까지 유일무이하다 할 수 있는 국제적 애니메이션 스타일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장군의 수염>에 적용된 신동헌의 모던 카툰 스타일은 전형적이지는 않다. 거기에는 어느 정도의 사실적 묘사가 함께 들어가 있다. 정확히 말하자면 사실적이고 구체적인 풍경을 잃지 않되, 유행을 좇으며 획일화된 인간들의 모습은 단순 명료한 모던 카툰의 그래픽 스타일로 강조했다. 이는 극중 풍자 대상인 콧수염의 유행처럼 당대의 모던 카툰 양식을 맹목적으로 따르는 대신, 실제 현실에 대한 날카로운 비틀기라는 본질을 놓치지 않으려는 꽤나 세심한 계산을 깔고 있다.

<홍길동>

애니메이션과 대중의 만남_광고, TV, 영화 그리고 음악

‘최초’, ‘선구자’, ‘개척자’ 등의 수식어는 시간적 우선성을 강조할 뿐 다양한 질적 판단은 놓치기 쉽다. 신동헌 감독의 애니메이션 작업이 여러 분야에서 ‘최초’라고 언급될 때, 그가 시도했던 ‘최초/선구/개척’은 창작자의 지점이었다. 그렇다면 그것은 ‘최초’의 관객, 시청자, 감상자, 향유자를 낳는 지점이기도 하다. 즉 애니메이션은 광고와 영화를 통해 (따라서 TV 브라운관과 극장 스크린을 통해) 대중과 친숙하게 만날 수 있었다는 얘기다. 신동헌 감독의 초기 애니메이션 광고들은 무척 즐겁다. 노래가 있고 흥이 있다. ‘싱어롱’이 가능했을 법한 유쾌한 영상이다. 애니메이션이라고 무조건 광고와 맞아떨어지는 것은 아닌데, 신동헌 감독의 애니메이션 광고는 그 맛을 무척 잘 살린다. 이러한 사실은 감독이 대중이 원하는 바를 정확히 포착했다는 말이고, 극장용 장편애니메이션을 만들 때도 그 누구보다 대중 관객의 취향을 잘 알고 있었다는 얘기이기도 하다.

어쩌면 30~40대 연령층이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신동헌 감독의 작품을 ‘실시간’으로 접한 것은 1980년대 TV시리즈로 만들어진 <아기 공룡 둘리>(1987~88)를 통해서였을 것이다. 당시 갑작스레 국산 애니메이션 제작이 중요한 문화 시책으로 떠올랐을 때, 둘리도 최전선의 라인업을 차지하고 있었다. 그런데 여타의 ‘국산’ TV애니메이션 시리즈 중 유독 <아기 공룡 둘리>는 에피소드마다 스타일이 천차만별이었다. 이유는 간단하다. 애니메이션 제작 스튜디오 한곳에서 전체 시리즈를 관할한 것이 아니라 몇몇 애니메이션 스튜디오들이 에피소드별로 나눠 작업했기 때문이다. 덕분에 (의도인지 아닌지는 중요하지 않지만) 당시 주요 애니메이션 스튜디오의 특징적 스타일을 확인할 수 있는 샘플 같은 역할을 한다. 각 스튜디오의 스타일은 대부분 이제껏 해온 외주 제작(당시만 해도 ‘하청’이라는 부정적인 단어로 지칭했다)을 반영하는 식이었다. 아무튼 다양한 스타일로 점철된 시리즈 중 가장 돋보이는 에피소드는 제3화 <내 친구들>편이다. 신동헌 스튜디오에서 만들었는데, 백미는 아프리카 밀림에 사는 동물들이 춤추고 노래하는 장면으로 소위 ‘그루브’가 충만하다. 당시는 물론이고, 그 후로도 한국 애니메이션에서 이처럼 ‘흥’이 넘치는 표현을 찾기는 쉽지 않다. 단지 기술적 난이도나 사운드와 이미지 사이의 싱크 혹은 군무의 동선 등에 국한된 게 아니다. 말 그대로 ‘흥’, 즉 ‘필 충만’을 어떻게 표현하는 가의 문제다. 그리고 신동헌 감독의 출발점이었던 애니메이션 광고를 환기시키는 지점이기도 하다.

이러한 표현이 가능한 이유를 꼽으라면 음악에 대한 이해일 것이다. 아는 사람은 알겠지만 신동헌 감독은 클래식 음악에 조예가 상당히 깊다. 어쩌면 ‘애니메이션 감독이 클래식 음악을 꽤나 좋아한다’라고 말하기보다 ‘클래식 음악 애호가가 애니메이션도 그만큼 잘 만든다’(또는 클래식 음악 전문가이므로 애니메이션을 그렇게 잘 만들 수 있다)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호피와 차돌바위>

결(結)_한국 애니메이션의 ‘아버지’가 아닌 ‘영원한 청년’이길

다시 처음 글귀를 반복하자면, 신동헌이라는 ‘한국 애니메이션의 큰 별이 졌다’. 다시금 ‘큰 별’의 의미를 되새겨본다. ‘대부’, ‘아버지’ 같은 낱말로 그 뜻을 연결시키고 싶은 유혹이 있을 테다. 하지만 그럴수록 애니메이션 감독으로서의 신동헌은 현재의 한국 애니메이션으로부터 단절될 뿐이다. 실제로 한국 애니메이션의 역사는 연속적이었다기 보다는 단속적(斷續)이었다. 홍길동의 처지처럼 세상이 ‘아버지를 아버지라 부르지 못하도록’ 한 것이 아니라 꽤 오랫동안 아버지의 존재를 지웠다가 어느 날 갑자기 다시 그를 찾아내고 불러들이고자 하였다. 아비의 필요성을 못 느끼다가 별안간 모두가 서로 다른 이유로 생부찾기에 나선 것이다. 저마다 스스로를 자수성가했다고 얘기하고, 처음부터 물려받은 것은 없었다고 굴었으며, 어른으로 성장하기도 전에 눈 깜짝할 사이에 원로가 되기도 하였다. 그러니 이제 와서 아비라 부르고 불리는 모습은 서로간에 민망함만 자아낼 뿐이다. 원래 기원 설화라는 것은 빈약한 역사적 정통성을 급하게 강화시키는 이데올로기 장치 아니던가.

신동헌 감독에게는 대부나 아버지의 권위보다 ‘청년’의 열정이 더 어울릴 것이다. 생전의 목소리에는 함경도 말씨 특유의 까랑까랑한 기운이 넘쳐났다. 과거를 회상하는 그의 눈은 감상에 젖는 대신, 생생한 빛을 쏟아냈다. 예전 작업에 대해 회고할 때는 부풀린 무용담이 아니라 실현해내지 못한 꿈에 대한 아쉬움이 진득하게 묻어났고, 그만큼의 아쉬움은 후배들에 대한 격려와 당부로 이어졌다. 그러한 청년이 이제 별이 되었고, 우리는 그 별과 함께 길을 잃지 않고자 한다. 끊겼던 항해는 비로소 든든한 길잡이를 찾은 셈이다.

<장군의 수염>

부언(副言)_<홍길동> DVD의 코멘터리 작업

개인적으로는 지난해 <홍길동> DVD의 코멘터리 작업에 참여하는 행운이 따랐는데, 그동안 미뤄두기만 했던 신동헌 감독에 대한 자료를 정리할 기회이기도 했다. 코멘터리 작업을 더욱 풍성하게 살 찌울 수 있었던 건 파트너로 함께한 연상호 감독 덕이기도 하다. 코멘터리 녹음이 있던 5월 초와 DVD 출시를 기념하는 한국영상자료원의 상영 및 토크를 진행했던 7월 초 사이, 연상호 감독에게도 커다란 위상 변화가 있었는데 가장 중요한 점은 <홍길동>을 만들던 당시의 신동헌 감독과 그 작품의 코멘터리에 임하는 연상호 감독이 같은 나이였다는 사실이다. 코멘터리 작업은 시간대를 뛰어넘어 장편애니메이션을 만들며 피, 땀, 눈물의 맛을 알아간 신동헌과 연상호, 두 애니메이션 청년 사이의 대화였다. 더불어 잊혔던 <홍길동> 필름이 세상에 다시 나올 수 있도록 큰 역할을 한 애니메이션 연구자 김준양 선생에게도 뒤늦게나마 이 지면을 빌려 감사의 말씀을 전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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