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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국제영화제] 사하 시네마: 추운 땅에서 날아온 미지의 영화들

무엇이 아시아적입니까, 경계 위에 선 영화들

<24 스노우>

제21회 부산국제영화제 상영작 선정을 위해 시사에 열중하던 2016년 6월, 러시아 국적으로 출품된 한 무명 신인감독의 작품이 눈길을 끌었다. 온 세상이 눈으로 하얗게 뒤덮인 영구동토의 작은 마을에서 아들을 잃은 두 아버지의 상실과 극복, 그리고 복수를 차분하게 바라보는 드미트리 다비도프의 <모닥불 앞의 삶>(2016)은 삶에 대한 소박하지만 진지한 성찰을 장면 하나하나에 신중한 연출로 담아내는 작품이었다. 월드 프리미어로 선정하기로 작정하고 있던 순간, 마침 필리핀에 출장 중이던 고 김지석 수석 프로그래머가 로밍 문자를 보내왔다. “사하영화 봤습니까? 영화 좋습니다. 얼른 보고 연락해보세요.” 작품 초청이 확정되고 그해 여름 서울아트시네마에서는 ‘야쿠티아영화 특별전’이 소규모로 개최되었다. 그리고 21회 부산국제영화제 폐막일에 김지석 수석 프로그래머는 영화제에 참석한 사하 영화인들에게 영화제 사상 처음으로 국가전이 아닌 지역영화 특별전을 제안했다. 그렇게, 추운 나라에서 날아온 미지의 사하영화는 한국 관객과의 만남을 준비했다.

<무법자들>

2000년대 이후 벌어진 사하 시네마라는 ‘현상’

사하공화국(The Sakha Republic, 야쿠트)은 러시아 내 자치공화국 중 하나로 공식 국적은 러시아다. 그러나 러시아의 통치 아래 편입되기 전부터 오랜 전통과 역사를 지닌 사하공화국은 ‘사하’라는 본래의 명칭과 그 러시아어 명칭인 야쿠트라는 명칭을 모두 공식 국명으로 사용하고 있으며, 공식 언어 역시 러시아어와 야쿠트어를 사용한다. 최근 한국과 교류가 활발해지면서 국내에도 그 존재가 차츰 알려지고 있으며 인천과 야쿠츠크(사하의 수도)를 오가는 직항 편도 운행된다. 하지만 여전히, 사하공화국 그리고 사하 시네마는 우리에게 낯설기만 한 세계다. 실제로 사하 시네마의 본격적인 등장을 1980년대로 보고 있으니, 사하 시네마는 40여년이 채 되지 않는 짧은 역사를 지녔다. 그러나 모든 지역과 민족의 영화사가 들려주듯이, 지역영화에 대한 의지와 창작에 대한 열정은 사하 시네마가 성장할 수 있는 밑거름이 되었다. 1986년 러시아에서 수학하고 야쿠트로 돌아와 단편 <마파>(1986)를 연출한 알렉세이 로마노프를 필두로, 당대 연극과 TV무대를 중심으로 활동하던 연출가와 배우들이 독립영화 제작에 뛰어들면서 본격적인 사하 시네마의 움직임이 시작되었다. 이후 90년대 초 국립영화제작사인 사하필름이 설립되고 2000년대 초 독립영화사인 알마즈필름이 설립되면서 사하영화들이 활발하게 제작되는 계기를 맞았다.

러시아 영화평론가인 안톤 돌린이 언급하듯이, 사하 시네마는 2000년대 이후 20여년이 채 안 되는 시간에 벌어진 어떤 ‘현상’으로, 민족영화에 대한 어떤 강열한 의지를 공유하는 다양한 계획과 활동들로 인해 촉발되었다. 규모의 차이는 있지만 정부 차원의 지원 정책과 독립영화인들의 역동적인 활동, 주변 문화창작자들과의 적극적인 교류, 영화 교육 및 국제영화제 같은 문화 인프라의 구축 등이 동시에 요구되고 또 구현되어온 사하 시네마의 2000년대는 90년대 중반 한국영화 문화의 얼굴과 어딘가 닮은 점이 있다. 그 밑에는 전통적 삶의 양식, 신념과 가치 그리고 문화적 유산을 영화라는 현대적 예술과 대중매체 형식 안에 어떻게 접목할 것인가라는 광범위한 문제의식이 자리잡고 있었다. 그리고 이는 자연스럽게 사하 시네마라고 부를 수 있는 어떤 독특한 소재나 주제, 스타일로 스크린 위에 구현되었다.

올해 부산국제영화제 특별전 ‘사하 시네마: 신비한 자연과 전설의 세계’에서 소개되는 다큐멘터리, 멜로드라마, 액션영화, 전위영화 등 7편의 장편과 5편의 단편은 장르와 양식적 다양성 아래 사하 시네마만이 지닌 어떤 독특한 매력을 공유하고 있다. 그중 가장 눈에 띄는 것은 역시 지리적 특성에 기반을 둔 자연 풍광이다. 사하공화국의 전체 면적의 60%가량이 영구동토층으로 얼음과 눈으로 가득하지만, 나머지 지역은 봄과 여름, 가을에는 초록이 무성한 녹원의 아름다움을 갖고 있다. 호수와 고지대평원을 중심으로 한 전통적 생활양식은 보통의 영화에서 보기 드문 아름다운 이미지에 담긴다. 그러나 여러 얼굴을 가진 사하공화국의 자연은 단지 시각적 배경이나 볼거리에 그치지 않는다. 사계절의 옷을 갈아입는 자연, 1년 내내 얼어 있는 땅은 사하 사람들의 일상과 분리할 수 없는 삶의 일부, 삶의 근거가 된다. 전설과 종교의식, 일상의 흔적과 대중서사 등 모든 것들이 그 안에 담겨 있으며, 이는 단지 과거의 흔적으로 박제되지 않은 채 현대 사하 사람들의 삶과 문화 그리고 영화에 중요한 토양이 된다. 지금까지도 사하 시네마에 자연과 전통 그리고 이에 기반한 서사와 대중적 이미지들은 창작의 원천이며, 사하 관객이 사하영화에 대한 관심과 애정을 갖게끔 하는 강한 매력이다.

흥미로운 점은, 사하 시네마의 이런 측면은 공화국 내 자립적 영화산업이 자리잡을 수 있는 토양을 제공했다는 점이다. 사하공화국에서는 매년 18편 내외의 영화가 제작되는데, 전통언어인 야쿠트어(그러나 러시아어 자막이 함께 제공되어 개봉된다)로 제작되는 이 작품들은 공화국 내 배급 구조를 통해 상영되어 수익을 발생시키고, 이는 다시 다음 작품의 제작에 환원된다. 러시아 연방정부의 적극적인 지원이나 전국적인 배급 및 상영이 요원한 현실이지만 놀랍게도 공화국 내의 이런 자립적인 영화산업 시스템은 정부, 영화인, 관객의 삼위일체에 의해 점점 안정적인 형태로 구축되고 있다. 그리고 이제 사하 시네마는 미지의 땅 그 경계를 넘어 세계 관객과 만날 채비를 서두르고 있다.

<그의 딸>

자립적인 영화산업 시스템의 힘

지난해 <모닥불 앞의 삶>을 선정하면서, ‘김샘’(영화제 안에서는 김지석 수석 프로그래머를 이렇게 부른다)과 나눴던 대화를 떠올리며 글을 마치고자 한다. 사하영화를 한편이라도 본 관객은 아시아영화와의 접점을 느끼게 된다. 얼굴, 의복, 생활양식, 전통종교에서 미신까지, 사하 시네마에 담긴 모든 모습과 흔적은 아시아의 그것이다. 그러나 영화제의 규정상, <모닥불 위의 삶>은 아시아영화가 아닌 비아시아권의 러시아영화로 구분되어 상영되었다. 아시아영화 혹은 아시아적인 것에 대한 거대한 물음표 앞에서, 김샘과 열띤 토론을 벌일 예정이었다. 그리고 바쁘다는 핑계로 미뤘던 그 대화는 결국 이뤄지지 못했다. 어쩌면 그 대화를 더 많은 관객과 함께 나누라는 뜻으로 미루셨던 건지도 모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