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걸작! 드니 빌뇌브의 <블레이드 러너 2049>는 리들리 스콧의 <블레이드 러너>와 어떻게 다른가
김성훈 2017-10-18

관객이 지녔던 감정의 기억을 새롭게 되살리다

35년 전, 해리슨 포드는 훗날 <블레이드 러너>(1982)의 속편이 만들어질지 조금이라도 예상했을까. 레이첼(숀 영)의 손을 붙잡고 방을 나가는 <블레이드 러너>의 마지막 장면에서 아주 잠깐 머뭇거리는 릭 데커드(해리슨 포드)의 모습은 영원한 퇴장을 원치 않는 듯 했다(고 믿고 싶다). 그렇게 거창한 의미를 부여하기 위해 보여준 연기는 당연히 아니었지만, 어쨌거나 <블레이드 러너>의 속편이 35년 만에 제작돼 우리 앞에 당도했다. 드니 빌뇌브 감독이 메가폰을 잡은 <블레이드 러너 2049>를 여러 각도에서 살펴봤다.

“인간보다 더 인간답게.” 35년 전, 그러니까 <블레이드 러너>(감독 리들리 스콧)에서 타이렐 회장이 블레이드 러너 릭 데커드를 만나 신형 복제인간(리플리컨트 넥서스6)의 모토라고 알려준, 아이러니한 이 말은 아주 틀린 얘기가 아니었다. “인간 못지않게 오래 살고 싶다”는 요청을 들어주지 않아 자신의 창조주인 타이렐을 죽이긴 했지만, 자신을 죽이기 위해 쫓아다닌 릭 데커드의 목숨을 살린 뒤 장렬하게 전사한 로이(룻거 하우어)는 어떤 면에서 매우 ‘인간적인’ 복제인간이었다. 릭 데커드와 사랑에 빠졌던 레이첼은 또 어땠나. 날 때부터 인간인 줄 알았는데 릭 데커드로부터 자신이 복제인간이라는 사실을 깨닫게 되는 순간 얼굴에 드리운 잿빛은 관객의 연민을 자아내기 충분했다.

그렇다면 반란을 일으킨 복제인간 넷을 집요하게 쫓아 모두 ‘은퇴’시킨 릭 데커드는 인간적이라 할 수 있을까. 아직도 풀리지 않는 논쟁을 다시 꺼내자면 그는 인간인가, 아니면 복제인간인가. 인간보다 더 인간다운 로이와 레이첼을 겪으면서 그는 무엇을 깨달았을까. 얼마 전 <블레이드 러너>를 다시 보면서 든 생각은, ‘무엇이 인간을, 혹은 복제인간을 더 인간답게 만드는 것인가’라는 영화 속 질문이 35년이 지난 지금도 유효하겠다는 것이다. 어쩌면 이 질문에 대해 오늘의 대답을 내놓는 것이야말로 걸작의 바통을 이어받은 속편에 지워진 운명이자 전편과 속편을 잇는 핵심 연결고리인지도 모른다. 동시에 그것은 <프리즈너스>(2013), <시카리오: 암살자의 도시>(2015), <컨택트>(2016) 등 수작을 연달아 내놓고 있는 드니 빌뇌브 감독에게 거는 기대감이기도 하겠다.

여전한, 누아르적 감성

잘 알려진 대로 한때 리들리 스콧은 “<블레이드 러너>는 첫 번째 작품으로 끝이어야 한다”고 딱 잘라 말했다. 하지만 이미 극장 개봉한 <블레이드 러너 2049>를 보면 이 말은 잊어도 될 듯하다(실제로 리들리 스콧은 <블레이드 러너>의 속편이 제작된다는 소식을 누구보다 반겼고, 제작자로 합류해 드니 빌뇌브 감독에게 “연출의 자유”를 줄 만큼 헌신적으로 도왔다.-편집자). <블레이드 러너 2049>는 잿빛 하늘에서 비가 추적추적 내리는 도시 LA, 꼭대기가 보이지 않을 만큼 빽빽하게 줄지어 선 고층빌딩, 아시아 각국의 언어로 포장된 형형색색의 네온사인, 인간인지 복제인간인지 분간이 가지 않는 수많은 인파들 등 필름누아르 분위기를 근사하게 심어놓되 인간과 복제인간의 관계를 둘러싼 고민을 전편에 비해 더욱 확장시킨 작품이다.

전편으로부터 30년이 지난 2049년 캘리포니아. 복제인간들이 반란을 일으키는 바람에 복제인간 제조가 금지돼 타이렐사가 파산했다. 니앤더 월레스(자레드 레토)가 경영하는 월레스 인스티튜트가 타이렐사의 유산을 손에 넣어 인간에게 복종만 하는 복제인간을 새로 생산하고, 복제인간으로 우주 식민지를 장악하는 꿈을 꾼다. 블레이드 러너들은 인간의 통제에서 벗어난 복제인간(유효기간이 없는 구모델 넥서스8)을 추적해 은퇴시킨다. 로스앤젤레스 경찰국에 소속된 ‘K’(라이언 고슬링)도 그중 하나다. 그는 단백질 농사를 짓고 있는 복제인간 새퍼 모튼(데이브 바티스타)을 처단하러 갔다가 새퍼 모튼이 사는 집 앞의 땅속에 묻힌 수상한 뼈와 머리카락을 발견한다(유튜브에 올라가 있는 단편영화 <2048: 노웨어 투런>(감독 루크 스콧)에서 새퍼 모튼의 프리퀄을 감상할 수 있다.-편집자). 상사 조시(로빈 라이트)의 지시로 뼈와 머리카락의 정체를 조사하다가 복제인간과 자신의 관계를 풀 만한 중요한 단서라는 사실을 알게 된다. 니앤더 월레스는 자신의 비서 러브(실비아 혹스)를 시켜 K를 추적하기 시작한다.

전편을 보지 않은 사람이라면 <블레이드 러너 2049>를 그저 미래의 회색도시에서 펼쳐지는 길고 긴 필름누아르영화로 받아들이며 그 장황함에 당황스러워할지도 모르겠다. 드니 빌뇌브 감독은 “<블레이드 러너 2049>만의 정체성을 보여주면서 전편의 누아르적 감성을 유지하는 게 목표”라고 이미지 스타일을 결정했다. 그의 말대로 <블레이드 러너 2049>는 전편이 그랬듯이 필름누아르와 SF, 전혀 다른 두 장르가 절묘하게 결합한 이야기다(전편 개봉 당시 SF액션영화인 줄 알고 왔다가 실망한 채 집으로 돌아가는 바람에 영화가 흥행 참패한 일화는 그냥 웃어넘길 일이 아니다).

영화의 중반부까지 서사는 필립 말로 같은 형사 K를 따라 일직선으로 전개된다. K는 임무 수행 도중 발견된 뼈와 머리카락을 단서 삼아 꼬리에 꼬리를 물며 진실을 하나씩 밝혀나간다. 그렇게 밝혀진 단서가 자신과도 관련되어 있다는 사실을 깨달으면서 K는 수사 방향을 자신의 과거(혹은 기억)로 돌린다. 그때부터 K의 과거와 기억들이 플래시백으로 끼어든다. 전편이 릭 데커드가 복제인간(레이첼)과 관계를 맺으면서 복제인간을 바라보는 시선이 달라지는 과정을 그린 작품이라면, <블레이드 러너 2049>는 K가 자신과 관련된 진실을 알게 되면서 자신을 마주하고, 자신의 정체성을 고민하게 되는 이야기다. “<블레이드 러너 2049>가 전편과 크게 다를바 없는 고민을 반복하고 있다”는 내외신의 몇몇 평들에 동의하게 되는 이유다.

전편과의 연결고리들

흥미로운 건 진실이 하나둘씩 드러날 때마다 드니 빌뇌브 감독이 전편과의 연결고리들을 무심히 던져놓는다는 사실이다. 스포일러 때문에 자세하게 설명할 수 없지만, 전편과의 연결고리는 K의 과거(혹은 기억)와도 관련 있다. 레이첼을 데리고 떠난 릭 데커드(해리슨 포드)가 지난 30년 동안 숨어 지낼 수밖에 없었던 사연을 이해하는 핵심 열쇠이기도 하다. 전편의 몇몇 장면이 플래시백처럼 끼어들어 필요한 대목에서는 설명의 역할을 하지만, 꼭 전편을 봐야겠다면 유심히 들어야 할 대사가 몇 있다. 릭 데커드가 타이렐 회장의 소개로 레이첼을 처음 만나는 장면에서 타이렐 회장이 그에게 이렇게 말한다. “복제인간의 문제는 감정의 경력이 없다는 것이다. 오랫동안 쌓여온 과거가 없기 때문이다. 그들이 감정을 잘 조절할 수 있도록 기억을 만들어줘야 한다.” 복제인간이 인간보다 더 인간다우려면 스스로 감정을 잘 조절해야 하는데,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그들에게 기억을 심어주어야 한다는 얘기다.

이렇게 복제인간에게 심어둔 기억은 릭 데커드와 레이첼의 관계가 진전되면서 각기 다른 방식으로 활용된다. 레이첼은 릭 데커드에게 “제가 복제인간이라고 생각하세요? (어머니와 함께 찍은 가족사진을 보여주며) 저와 제 어머니예요”라고 자신이 인간임을 강조하지만, 릭 데커드는 “당신의 추억이 아니라 회장 조카의 추억이 (당신의 머리에) 이식된 거야”라고 냉정하게 알려준다. 이 말을 들은 레이첼은 훌쩍거리며 방을 나간다. 레이첼이 릭 데커드를 위해 피아노를 치는 장면에서 레이첼은 “칠 수 있는지 몰랐어요. 배운 기억은 있는데 남의 기억인지도 모르죠”라고 말한다. 그 말을 들은 릭 데커드는 “잘 쳤어”라고 대답한다. 릭 데커드와 레이첼이 점점 가까워지면서 레이첼의 기억이 남이 심어둔 기억인지, 아니면 직접 겪은 기억인지는 릭 데커드에게 그리 중요하지 않게 됐다. 전편이 그랬듯이 기억은 K가 자신이 누구인지 마주하고, 자신의 운명을 받아들이는 데 중요하게 작용한다. 그 점에서 <블레이드 러너 2049>는 자신의 기억(혹은 과거)으로 떠나는 K라는 남자의 긴 여정을 그린 이야기로 봐도 되겠다.

2049년의 디스토피아

사실 드니 빌뇌브 감독과 로저 디킨스 촬영감독은 이 영화를 헝가리에서 찍었다. 그린 매트에서 찍어서 컴퓨터그래픽으로 합성하는 방식이 아닌 헝가리 부다페스트에 위치한 오리고 스튜디오와 코르다 스튜디오에 주요 공간을 실제로 지은 뒤 직접 촬영했다. “직접 제작한 ‘진짜’가 필요했다. 제작 초기 단계부터 그린 스크린을 두고 촬영하는 일은 가능한 한 없게 하자고 결정을 내렸다”는 게 드니 빌뇌브의 설명이다. 어둡고 축축하며 무거운 분위기의 2049년 디스토피아가 생생하게 재현될 수 있었던 것도 그 덕분이다. 감독의 말은 35년 만에 모습을 드러내 전작의 명성에 기대지만은 않은 <블레이드 러너 2049>에만 해당되는 메시지는 아닐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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