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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령가 소년 살인사건> 착각하지 마라 모든 것을 말할 수 있다고
송경원 2017-11-29

에드워드 양 감독의 타이베이 3부작의 마지막 영화 <고령가 소년 살인사건>을 드디어 극장에서 만나다

<고령가 소년 살인사건>(1991)이 26년 만에 정식으로 국내에서 개봉한다. 대만 뉴웨이브의 기수 에드워드 양 감독은 2007년 우리 곁을 떠났지만 그의 영화들은 시간이 지날수록 점점 더 영롱하게 빛난다. 타이베이 3부작의 마지막에 해당하는 <고령가 소년 살인사건>은 대만 사회를 떠들썩하게 했던 실제 사건을 경유하여 시대의 불안과 부평초 같은 대만인의 심리를 그리고 있다. 2000년 연출한 <하나 그리고 둘>이 다음 세대에 거는 희망에 관한 영화라면 <고령가 소년 살인사건>은 에드워드 양이 직시하는 어둠에 관한 영화다. 사실 이 영화에 관해 어떤 수식어를 더한다 해도 본질에서 멀어질 뿐이다. 다만 영화의 역사가 얼마나 장대해지건 이 영화가 반드시 봐야 할 영화 리스트에서 빠질 일은 없다는 것 정도는 단언할 수 있을 것 같다. “인생의 하루를 바칠 충분한 가치가 있는 작품”(<뉴욕 타임스>), 그걸로 충분하다. 당신이 영화에 관심이 있다며 이 영화는 봐야 한다. 관심이 없다면 이 영화를 보고 영화에 대한 관심이 생길 것이다. 그저 한 가지 당부하자면 반드시 스크린에서 보길 권한다.

그래봤자, 영화다. 세계의 형태를 있는 그대로 그릴 수 없고 한 사람의 생을 온전히 담을 수도 없다. 계급적인 모순을 짚는다 해도 왜곡과 편집을 피할 수 없고 실화를 있는 그대로 재현한다는 건 물리적으로 불가능하다. 개인의 비극, 역사의 흐름, 고독과 불안 속 인간의 성장을 표현한다고 하지만 우리가 목격하는 건 조각난 극히 일부일 따름이다. 다시 말해 영화는 현실이 아니다. 적지 않은 영화들이 바로 이 진실을 외면한 채 스스로를 과대평가한다. 영화를 통해 세계를 바꾸고, 영화를 통해 진실을 발굴하고, 영화가 역사가 될 수 있다고 믿는 영화들을 나는 믿지 않는다. 하지만 한없이 그에 가까워지는 영화들은 있다. 한편의 영화가 모든 걸 담아낼 순 없지만 모든 사유의 시작이 되는 씨앗이 될 수는 있다. 에드워드 양 감독의 <고령가 소년 살인사건>은 그런 종류의 영화다. 이 영화에는 대만의 역사와 개인의 비극이 겹쳐 있다. 사회의 모순을 비판하는 문제의식이 녹아 있고, 한 사람의 성장을 따라가는 비극의 드라마가 있다. 어떤 측면에서는 실화에 기초한 범죄물이면서 아버지와 아들에 관한 전통적인 드라마이기도 하다. 이 모든 것의 총합이 <고령가 소년 살인사건>이다. 이 영화는 역사에 대한 통찰, 화면의 디테일, 이야기의 집중력, 전개의 구성력 등 어떤 통로로 접근해도 거의 완벽하다. 왜냐하면 모방이 불가능한, 의미 없는, 에드워드 양이란 개인이 세계와 관계 맺는 방식을 풀어낸 ‘유일한’ 영화이기 때문이다. 그래봤자 영화, 그 사실을 자각하고 있기에 한편의 영화가 해낼 수 있는 거의 모든 것을 해내는 영화다.

237분이 필요한 이유

대만 뉴웨이브를 대표하는 감독 중 하나인 에드워드 양의 화두는 현대 대만인의 삶을 영화로 빚어내는 일이었다. 사실 영화는 애매한 물건이다. 표현주의와 사실주의, 오락과 예술, 이야기와 현실 사이 두 마리 토끼를 다 잡고 싶어 하고 대부분의 경우 둘 다 놓친다. 영화가 현실에 대응하는 방법은 스스로의 한계를 인지하고 거짓말을 하지 않는 것 정도다. 영화는 영화만의 방식으로 시대의 공기, 공간의 형태, 지역의 정서를 담아낼 수 있다. 밤하늘의 별처럼 제각각인 리얼리즘 영화의 개념을 내 마음대로 정의해보자면 ‘땅에 발을 붙이고 사람의 꼴을 담아낸 영화’라고 생각한다. 그런 의미에서 에드워드 양의 영화, 특히 <타이베이 이야기>(1985)에서 <공포분자>(1986), <고령가 소년 살인사건>으로 이어지는 타이베이 3부작은 그야말로 대만, 대만인이라는 ‘리얼’을 포착한다. 어린 시절 공산당 집권을 피해 본토에서 대만으로 탈출한 에드워드 양의 체험은 곧 자신의 영화에 충실히 반영된다. 에드워드 양에게 영화란 대만이라는 이름의 공간, 역사, 사람, 기억의 혼합이라고 해도 좋을 것이다. <고령가 소년 살인사건>을 이해하기 위해 대만의 역사적 상황과 흐름을 어느 정도 알아두는 것이 필수적인 이유가 여기에 있다.

영화는 표면적으론 1961년 대만에서 실제로 일어난 미성년자에 의한 살인사건을 소재로 했다. 감독 자신에게도 적지 않은 영향을 미쳤던 그 사건을 촉매로 에드워드 양은 역사의 뿌리와 개인의 삶이 관계 맺는 방식을 탐색한다. 대만에는 다양한 집단이 섞여 있다. 원래 대만에서 살고 있었던 토착인이 있고, 청나라 때 대만에서 건너온 내성인, 공산당 정권 수립 후 본토에서 탈출해 이주한 외성인이 있다. 어떤 의미에서 대만의 역사는 고향을 찾아 떠도는 유랑인들의 시간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매우 짧은 간격으로 형성된 부모와 자식 세대간의 서로 다른 체험은 언제든 터져도 좋을 불씨들을 품고 있다. 거칠게 축약하자면 에드워드 양은 그 균열과 틈새에 맺힌 불안을 모아 영화로 조각해낸다.

<고령가 소년 살인사건>은 장장 4시간에 달하는 영화다. 이유는 단순하다. 물리적으로 그 정도의 시간은 필요한 규모의 이야기이기 때문이다. 긴 것과 지루한 것은 별개다. <고령가 소년 살인사건>은 유기적인 이야기 구조 덕분에 시종일관 팽팽한 긴장을 형성한다. 영화는 14살 소년 샤오쓰(장첸)를 주인공으로 하고 있지만 그 주변인물 개개인의 삶의 태도와 흔적을 균형감 있게 담아낸다. 샤오쓰는 중국공산당 집권 뒤 부모를 따라 탈출한 외성인이다. 대만에서 새로운 삶을 꾸려야 하지만 현실은 녹록지 않다. 대만 사회에서 소년이 선택할 수 있는 길은 두 가지다. 하나는 높은 성적을 받아 선택된 엘리트 집단에 진입하는 것, 다른 하나는 패거리 집단에 의탁해 스스로의 몸을 보호하는 것이다. 국문 성적에서 낮은 점수를 받은 샤오쓰는 야간 학교로 진학하고 그곳에서 소공원파로 불리는 무리의 친구들과 어울린다. 하지만 샤오쓰는 적극적으로 가입하지 않고 늘 거리를 둔다. 샤오쓰는 친구들의 선망의 대상이기도 한 소녀 밍(양정이)에게 마음을 품지만 밍이 소공원파의 전설적인 두목 허니(임홍명)의 연인임을 알게 되며 마찬가지로 거리를 둔다. 얼마 뒤 소공원파와 적대적인 271파의 두목을 죽인 후 피신했던 허니가 돌아오고 샤오쓰는 그를 친형처럼 따른다. 하지만 허니가 어이없는 죽음을 맞이하자 샤오쓰는 허니의 복수와 함께 밍을 지켜주기 위해 싸움에 적극적으로 끼어든다. 그 결과 샤오쓰는 퇴학까지 당하고 잠시 외톨이가 되는데 이후 믿기 힘든 소식을 접한다. 밍이 군 간부의 아들 샤오마와 사귄다는 소문을 들은 것이다. 이에 격분한 샤오쓰는 샤오마를 죽이기 위해 찾아가지만 운명의 장난으로 샤오마 대신 밍을 만나고 결국 우발적인 살인을 저지른다.

철저히 샤오쓰의 시점으로 정리한 이야기는 대략 이와 같은 흐름이다. 하지만 어떤 의미에서 샤오쓰와 실제 살인사건은 거의 맥거핀에 가깝다고 해도 좋을 방아쇠에 불과하다. 이 영화는 서사를 유장하게 이어가는 스토리텔링이라기보다는 인물들의 매 순간을 적당한 거리에서 묘사한 기록, 혹은 풍경화에 가깝다. 샤오쓰 가족의 이야기, 아버지와의 애틋하고 안타까운 연결고리, 소공원파의 멤버들 개개의 사연과 드라마가 씨줄과 날줄로 촘촘하게 엮여 펼쳐지기 때문에 특정 인물의 서사만 부여잡고 따라가는 건 크게 의미가 없다. 중요한 건 시대의 격류 주변 물결처럼 드러나는 발버둥의 형태다. 거의 조각난 몽타주라고 해도 좋은데 이 개별 사건과 장면들은 영화의 막바지로 갈수록 거대한 프레스코화처럼 맞춰진다. 그리하여 237분의 기록 끝에 휘몰아치는 감정은 단지 살인의 이유나 개인적인 비극에 대한 충격과 동정, 회한, 연민 이상의 복잡 미묘한 상태에 다다른다. 영화가 현실을 고스란히 옮길 수 없는 것처럼 몇 문단의 짧은 글로 그 감정을 묘사하는 건 불가능하다. 비극, 시대의 압박과 발버둥, 불안과 고독 그리고 황폐함, 흔들림과 안간힘. 어떤 단어를 갖다붙여도 그 이상을 발견할 수 있다. 부분의 합을 전체보다 크게 만드는 것, 그것이 <고령가 소년 살인사건>이 시대를 읽는 씨앗이 되는 비결이다.

손전등 하나 분량의 진실

감히 단언컨대 <고령가 소년 살인사건>은 거의 모든 장면이 아름답다. 단순히 미장센을 예쁘게 치장한다거나 화면을 화사하게 찍었다는 의미가 아니다. 이 영화는 구조적으로 조화와 균형을 이룬다. 얼핏 불균질해 보이는 이야기가 맞춰졌을 때 그들의 사연은 곧 나의 감정이 된다. 샤오쓰는 기본적으로 관찰자다. 그는 항상 무언가를 바라본다. 영화촬영소의 대들보에 올라가 촬영현장을 바라보는 걸 즐기는 소년은 허니의 복수극이 벌어질 때도 외부에서 망을 보는 역할을 한다. 샤오쓰는 감독의 분신이자 어쩌면 일종의 시대정신에 가깝다. 그는 마치 롱숏의 카메라처럼 어느 만치 떨어져 인물, 사건, 시대를 ‘본다’. 클로즈업이 거의 등장하지 않는 이유도 이런 샤오쓰의 위치와 무관하지 않다. 감독은 인물의 감정상태를 설명하는 대신 인물을 둘러싼 시대의 공기를 목격시킨다. 가령 샤오쓰의 어머니가 옆 가게에서 흘러나오는 일본 노래를 들으며 “일본을 쫓아내기 위해 피 흘린 사람들이 얼마인데 아직도 일본의 잔재가 흘러넘친다”고 푸념하는 장면이야말로 <고령가 소년 살인사건>이 카메라에 봉인한 1950년대 대만의 공기다. 흘러들어온 것들, 남겨진 것들, 남기고 간 것들 위에 떠 있는 섬. 본토인, 내성인, 외성인, 일본이 남기고 간 것들과 미국 문화가 뒤섞인 혼란. 함께 살아가야 하기에 더 고독한 사람들.

<고령가 소년 살인사건>은 소년이 살인사건을 벌일 수밖에 없는 심리를 따라가는 영화가 아니다. 소년에게 면죄부를 주려는 의도도 없고 시대의 희생양인 양 포장하지도 않는다. 누군가는 허니처럼 달관하고 누군가는 샤오쓰의 친구 캣(왕계찬)처럼 노래와 춤, 미국으로 대표되는 서구의 것에 심취한다. 밍처럼 자신을 선망하는 남자들을 경멸하면서도 살아남기 위해 그들을 활용하는 자도 있고 샤오쓰의 아버지처럼 과거를 그리워하다 망가져버리는 사람도 있다. 이 모든 드라마는 매우 개인적이면서도 상징적이다. 시대를 그리면서 개인도 놓치지 않는 것, 에드워드 양은 마치 오른쪽을 보면서 동시에 왼쪽을 보는 것처럼 불가능해 보이는 작업을 해낸다. 때문에 이 영화는 설명되거나 옮기는 것이 불가능하다. 기술적으로 가능하다 해도 큰 의미는 없다. <고령가 소년 살인사건>을 글로 옮기려면 아마도 몇 백만자 이상의 활자가 필요할 것이다. 설사 그렇다 해도 영화에 한없이 가까워질 뿐이지 영화가 될 순 없다. 마찬가지로 이 영화는 현실이 아니다. 영화라는 형식을 통해 현실에 한없이 가까워지고 있을 따름이다. <고령가 소년 살인사건>이 시간의 풍화와 무관하게, 아니 시간이 지날수록 걸작으로서 그 진가를 드러낼 수밖에 없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이건 영화가 역사, 기억, 현재를 묘사할 수 있는 거의 모든 방식에 관한 영화다.

샤오쓰가 영화촬영소에서 손전등을 훔쳐왔을 때 영화라는 불이 밝혀진다. 에드워드 양은 샤오쓰라는 이름의 손전등을 따라 시대를 비춘다. 손전등에 비춰진 부분은 부분적으로 형태를 드러내지만 반대로 그건 주변에 보이지 않는 어둠이 훨씬 넓게 펼쳐져 있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에드워드 양은 이 어둠을 굳이 없애거나 있는 척 꾸미지 않는다. 시대를 보여주되 그것이 전부라는 태도를 취하지 않는 것이야말로 이 영화가 역사의 흐름과 상처에 접근하는 미덕이다. 손전등을 이리저리 비추며 진실을 찾고자 하지만 끝내 실패할 수밖에 없던 소년에 대한 영화. 샤오쓰는 영화 속 다른 영화감독에게 외친다. “진짜랑 가짜도 구분 못하면서 영화를 찍는다고? 네가 뭘 찍고 있는지 알고 있기나 해?” 에드워드 양은 샤오쓰의 입을 빌려 고백을 한다. 그는 알고있다. 자신이 전부를 알지 못한다는 걸. 우리가 볼 수 있는 건 겨우 손전등 하나, 한 사람의 시선 분량의 시대다. 그거면 충분하다. 애초에 인간이 신의 시점으로 역사를 조망할 필요는 없다. 그건 신의 몫으로 남겨두라. 한 사람이 겪는 하잘것없어 보이는 일도, 아니 그거야말로 영화가 사랑해온 대안의 역사다. 그 사건이, 그들이 거기 있었음을 증명하는 카메라들의 힘으로 영화는 세상의 일부가 된다. 살해당하기 직전 밍은 외친다. “네가 날 바꾸겠다고? 난 이 세계랑 똑같아. 이 세계는 변하지 않아. 대체 네가 뭐라고 생각하는 거야?” 26년 만에 정식으로 개봉하는 에드워드 양의 걸작은 그렇게 세상 모든 영화에 충고한다. 현실이 되려 하지 마라. 모든 것을 말할 수 있다고 착각하지 마라. 진정 유일무이한 목소리를 통해 스스로 역사가 되는 영화는 거기서부터 출발한다. 에드워드 양이 남긴 <고령가 소년 살인사건>이 그랬던 것처럼.

역사와 나

대만 뉴웨이브 영화

어떤 변화도 시작은 작은 균열부터다. 1970년대 대만영화는 정부의 엄격한 검열과 급속한 경제성장이 맞물리며 할리우드 스타일의 오락영화가 주류를 이뤘다. 관객이 진짜 자신들의 이야기를 외면하는 가벼움에 지쳐갈 무렵 대만의 사회현실을 비판하거나 있는 그대로를 그리는 영화들이 등장하기 시작했다. 1980년 초 해외 유학파 감독들이 하나둘 귀국하고 정부의 검열도 느슨해지는 시기가 되자 새로운 영화들이 싹튼다. 1982년 에드워드 양, 타도우 첸, 추안잉, 코이첸 4인의 신인감독이 연출한 옴니버스영화 <광음적고사>를 시작으로 ‘있는 그대로’를 찍고자 하는 영화들이 나와 관객과 평단의 호평을 받았다. 대만 뉴웨이브는 마치 이탈리아 네오리얼리즘 영화처럼 로케이션 촬영을 통해 얻어진 생생한 화면, 역사를 정면으로 응시하는 태도, 스타 시스템의 배제 등을 통해 시대를 읽어나가는 흐름을 형성해나간다. 대만 근현대사 속 개인의 초상을 그린 허우샤우시엔을 필두로 현대 도시인들의 방황과 불안, 붕괴된 삶을 다룬 에드워드 양, 상업영화 틀 속에서 뉴웨이브의 정신을 녹여낸 왕퉁 감독의 대만 역사 3부작(<허수아비>(1987), <바나나천국>(1989), <돌아오지 않는 산하>(1992)) 등이 대표적이다. 대만 뉴웨이브영화는 할리우드가 지향하는 보편타당한 감성의 상업영화를 벗어나 대만이라는 공간과 기억이 녹아든 내셔널 시네마로서의 ‘대만영화’를 전세계 영화인들에게 각인시키고 영감을 제공했다. 어쩌면 대만인이라야 완벽하게 이해할 수 있을 독자적이고도 대체 불가능한 장면들을 통해 우리를 되돌아보는 영화. 하나에서 전체로 퍼져나가는 파도. 하지만 모든 파도는 역사와 기억에 대한 각자의 반응처럼 제각각 유일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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