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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기영 감독 막내아들 김동양씨, 아버지 김기영을 추억하다
김성훈 사진 최성열 2018-02-09

영화적 동지였던 어머니, 가족과 언제나 함께였던 영화

강변의 한 사무실에서 사업을 하고 있는, 김기영 감독의 막내아들 김동양씨. 그는 올림픽대로를 내려다보며 아버지의 유작 <천사여 악녀가 되라>를 떠올렸다.

컬트의 대가, 괴짜, 기인 등. 고 김기영 감독의 이름 옆에 항상 따라다니는 수식어는 영화처럼 살다간 그를 빗댄 표현이다. 영화를 육체화한 삶을 살았던 그이기에 아주 틀린 묘사는 아니지만, 그와 그가 만든 영화를 다룬 책 몇권과 글들을 읽으면서 그가 어떤 사람이었는지 항상 궁금했다. 김기영 감독의 20주기를 앞두고 김 감독의 장남 김동원씨에게 만남을 청한 것도 그래서다. 하지만 김동원씨는 “우리 막내가 아버지를 쏙 빼닮았다”고 자신 대신 동생 김동양씨를 떠밀었다. 올림픽대로가 한눈에 내려다보이는 강변 테크노마트에서 만난 김동양씨는 “유작 <천사여 악녀가 되라>(1990)를 찍을 때 아버지가 당시 올림픽대로를 계속 보여주려고 많이 노력하셨다. 진짜 저예산으로 찍었는데 극장 개봉은 못하고 비디오로 출시된 영화다. 올림픽대로를 보니 이 영화가 생각난다”고 당시를 떠올렸다. 막내아들의 눈에 비친 아버지 김기영 감독은 어떤 사람이었을까. 그와의 대화를 1인칭 시점으로 구성하였다.

다가오는 2월 5일이 아버지의 20주기다. 마침 한국영상자료원에서 열리는 아버지의 20주기 기념전을 둘러봤는데 잘 구성됐더라. 나는 아버지 김기영과 어머니 김유봉 사이에서 태어난 2남1녀 중 막내 김동양이다. 제약회사 근무, 여성용 주방용품 사업 등 여러 미국 회사에서 오랫동안 근무했다. 유니버설픽처스코리아 사장도 약 3년간 맡았었다. 누나는 치과의사였던 어머니와 같은 길을 걸었다. 3대째 여성 치과의사인 셈이다. 형과 나는 아버지의 영향을 받아 영화감독이 되어야겠다는 생각을 감히 못했다. 젊었을 때 음악쪽에 관심이 있었는데… 아버지는 자식들이 개인 사업을 하길 바라셨다. 떠올려보면 아버지는 자기 관리가 철저하셨다. 얼마나 철저하셨냐 하면 술을 입에 전혀 대지 않으셨다. 매일 밤 10시에 주무시고, 새벽 2시에 일어나 작업을 하셨다. 새벽 2시부터 6시까지가 골든타임이다. 여러 편의 시나리오를 동시에 쓰고, 콘티를 작업하셨다. 가족들이 일어날 6시 반쯤, 아버지는 아침식사를 손수 준비하셨다. 요리를 좋아하셨고 손맛도 뛰어나셨다. 어느 해 크리스마스엔 직접 하신 요리가 너무 많아서 일일이 세본 적도 있다. 음식 가짓수가 무려 100가지였다. 아버지의 요리 때문에 어머니가 집과 시장을 4번이나 오가야 했다. (웃음) 아버지가 음식을 잘하신 건 해방 전 일본 유학 시절 자취 생활을 오래했기 때문인 것 같다. 당시 남자들이 요리는커녕 부엌에조차 발을 들이지 않았던 시대임을 감안하면 아버지는 굉장히 리버럴하셨다. 낮에는 모습을 거의 본 적이 없다. 낮에는 대체로 밖에 나가서 커뮤니케이션을 했다. 아버지는 ‘개똥철학가’가 아니었다. 다양한 분야의 책을 어마어마하게 읽으셨다. 특히 영화에 대한 집중력이 컸던 까닭에 화제가 영화라면 10시간이고, 20시간이고 얘기하실 수 있었다. 아직 살아 계셨다면 인공지능(AI)에 관심이 많으셨을지도 모르겠다. 저녁식사를 하고 나서는 TV를 보셨는데 항상 미국 만 보셨다.

"막걸리 더블"을 외치던 시절

어린 시절, 우리 가족은 서울시 중구 필동에 살았다. 집이 영화사라서 제작부, 연출부가 매일 출근했다. 많은 소품들을 직접 제작했던 까닭에 미술부도 왔다. 합기도 5단 유단자도 영화를 배우겠다며 시골에서 올라와 우리 집을 찾아왔다. (웃음) 사방에서 많은 사람들이 몰려들었지만 아버지에게 뭘 배우는 게 쉽지 않았다. 아버지의 조감독 출신 중에서 안일남 감독이라고 아주 좋은 분이 있었다. 그가 아버지 밑에서 나가 <당나귀 무법자>(1970)라는 코미디영화를 만들었는데 히트를 쳤다. <황야의 무법자>(감독 세르지오 레오네, 1964)를 패러디한 영화로, 시가 대신 곰방대를 문 ‘클린트 이스트우드’ 구봉서가 산초(‘뚱뚱이’ 양훈이 연기했다) 패거리가 득실거리는 말죽거리의 주막에 들어가 “쇠죽거리에서 왔다”며 자리에 앉아 “막걸리 더블”을 외치던 장면으로 유명했다. (웃음) 그를 제외하면 아버지의 조감독 출신 중에서 성공한 감독은 없었다.

“난 본래 조감독을 인정하지 않는 감독 중의 하나야. 왜냐하면 영화란 누가 가르쳐줘서 하는 게 아니라 스스로 깨쳐 얻어야 하는 거거든. 그래서 평소에 내 조감독들을 인위적으로 구박하고 학대하는 경향이 있었어. 그러면 그 사람들이 몹시 섭섭해하지. 내가 왜 그러느냐 하면 조감독 생활을 잘못하면 감독의 단점까지도 배워버려 자기의 독창적 아이덴티티를 잃어버리게 되거든. 그래서 난 내 조감독한테, 나한테 더이상 배우지 말고 극장에 가서 영화를 보고 또 보고 분석하고 연구하면 좋은 감독이 될 수 있다고 조언하지.”_ 김기영 감독 인터뷰집 <24년간의 대화>(유지형 지음) 중에서

집에 자주 오셨던 손님은 이름을 굳이 밝힐 필요는 없는 어느 촬영감독님이다. 막내인 나는 안방에서 자곤 했는데 아침에 커피 끓이는 소리에 잠을 깨면 그가 아버지와 소곤소곤 얘기하신 기억이 난다. 지금도, 그때도 부드러운 분이다. 반면, 배우들은 집에 오지 않고 충무로 근처 풍전아파트에서 아버지로부터 연기수업을 따로 받았다. 그곳에서 연기수업을 받은 사람이 이화시(<파계>(1974), <혈육애>(1976), <이어도>(1977), <살인나비를 쫓는 여자>(1978), <>(1978), <느미>(1979), <반금련>(1981) 등 출연), 임예진(<파계> 출연)씨 등이었다. 연기수업을 직접 본 적은 없지만 굉장히 엄격하고 빡빡했다고 한다. 아버지는 자신의 콘티를 배우들에게 절대 보여주지 않았다. 콘티를 미리 보여주면 배우가 집에서 자신의 색깔을 집어넣어 연습을 해올 게 빤하니까. 잘 알려진 대로 아버지는 촬영 전에 콘티를 완벽하게 작업하시는 걸로 유명했다. 당시 영화기자나 평론가가 아버지께 ‘그 장면은 왜 그렇게 찍었습니까?’라고 물어보면 촬영 의도를 정확하게 대답하셨다. 당시 그렇게 대답하는 분이 거의 없었던 것으로 알고 있다. 편집도 콘티를 100% 반영하셨다. 풍전아파트는 처음에는 배우들의 연기수업이 열리는 곳이었지만 나중에 누나가 고3이 되면서 누나의 공부방으로 쓰였다. 한국영상자료원에서 오랜만에 아버지의 콘티를 보았는데 암호 같은 글씨가 여전했다. 자세히 보니 아버지 글씨 옆에 어머니의 글씨도 보였다.

“콘티는 리버티 뉴스 시절 단편영화를 찍으면서 자연스럽게 터득하게 되었지. 난 촬영을 하기 4~5일 전쯤에 콘티가 나와야 해. 그걸 내 식으로 수정하고 받아들이는 마음의 작업을 다시 하곤 하지. 그러나 지금도 그렇듯 내 콘티는 나만 아는 부호의 암호로 기록되어 있어. 거기다 난 지독히 악필이라 사람들은 내 필체를 지렁이가 꿈틀거리며 기어나는 필체라고 해. 다른 사람들이 결코 못 알아보지. 단지 컷마다 삽화를 그리고 있는데 그것도 철저하게 날 위해 하는 작업이야.”_ 김기영 감독 인터뷰집 <24년간의 대화> 중에서

아버지에게 어머니는 아내 그 이상의 존재였다. 영화적 동지라고나 할까. 해방되자마자 일본 유학 생활을 마치고 서울대 의대에 입학한 아버지는 대학 연극인들의 모임인 고려예술좌를 만들어 입센의 <유령>, 셰익스피어의 <햄릿> 등 여러 작품들을 무대에 올렸다. <베니스의 상인>을 준비할 때 같은 연극반 친구인 박암(영화배우) 선생님으로부터 어머니를 추천받았다. 함께 연극을 하면서 두 사람은 가까워질 수 있었다. 어머니는 팔방미인이셨다. 아버지가 영화에 전념하고, 가정의 살림을 도맡기 위해 종로2가에 치과를 개업했다. 여자라고 우습게 봤는지 화곡동에서 온 손님이 금(니)을 붙인 뒤 치료비를 떼어먹고 줄행랑을 친 사건은 아직도 기억난다. 어머니가 치과를 운영하느라 많이 힘들어했는데도 사람을 잘 다뤘다. 퇴근하면 집에 와서 사무실을 방문한 손님들에게 과일을 내놓으셨다. 아버지가 시나리오를 쓰면 어머니가 적절한 표현을 찾아 수정한 뒤 누나가 교열을 보았다. 집에서 가족들이 나누는 대화의 90%가 영화 얘기였다. 그중에서 어떤 대화는 시나리오에 반영되기도 했다. (웃음) 두분은 영화를 보러 프랑스 문화원에 종종 가셨다. 아버지가 바쁠 때는 어머니가 혼자 가서 영화를 보고 메모를 한 뒤 집에 돌아와 아버지께 영화가 어땠는지 얘기해주었다. 반대로 아버지 혼자 영화를 보고 어머니께 얘기를 들려주는 경우도 많았다.

“함께 예술을 하자고 다짐했었죠. 그러나 누구 하나는 현실에 발붙여야 해서 제가 생활쪽을 떠맡았죠. 바깥어른을 뒷바라지하는 보람은 누구나 마찬가지겠지만 감독님이 창작 과정에서 저를 토의 상대로 대해줄 때 말할 수 없는 기쁨을 느낀답니다. 감독님이 방황할 때면 저도 방황하게 되고 작품이 개봉될 때는 함께 단두대에 서는 느낌이에요.”_ <동아일보> 1973년 11월 27일자 기사에서 김유봉 여사의 말

아버지는 다작을 못하셨다(김기영 감독은 35년 동안 32편의 영화를 만들었다. 1960년대 유명한 감독들이 1년에 서너편씩 만들기도 했던 상황을 감안하면 작품 수가 그리 많지 않다.-편집자). 다작을… 할 수가 없었다. 아버지가 영화 한편에 쏟는 시간이 평균 3년이었다. 항상 여러 작품을 쓰셨고, 본인이 직접 제작을 하셨다. 자신의 돈이 조금이라도 안 들어가면 영화를 완성조차 못하는 거다. 1960년대 당시, 한국영화 한편을 만드는 데 필름이 1만5천자 정도 소요됐다. 아버지는 그보다 세배 이상인 3만5천자 내지는 4만자를 쓰셨다. 영화의 질이 다를 수밖에 없었다. 아직도 기억나는 게 <현해탄은 알고 있다>(1961)가 성공한 뒤 찍었던 <고려장>(1963), <아스팔트>(1964), <병사는 죽어서 말한다>(1966) 등 세편은 필름이 어마어마하게 들어간 영화였다. 특히, <병사는 죽어서 말한다>는 몇번이나 검열에서 보류돼 극장 개봉이 연기됐었다. 아버지는 이 영화를 반공영화가 아닌 반전영화로 만들려고 하셨다. 결국 영화는 상영됐지만 흥행에서 크게 실패하는 바람에 집에 타격이 컸다. 전기도 여러 번 끊겼고, 가족들이 비참하게 살았던 시절이다. 검열은 아버지를 가장 좌절하게 했다. <금병매>는 검열에 걸려 개봉하지 못한 채 창고에 들어갔다가 2년이나 지난 뒤에야 <반금련>이라는 제목으로 개봉하게 되었다. 난도질당한 영화는 전혀 다른 내용의 이야기가 된 채로 세상의 빛을 보았지만, 흥행에 처참하게 실패했다. <이어도> 또한 검열에 걸려 대수술(?)을 받았고, 저주받은 걸작이 되어 관객의 무관심 속에 개봉 2주 만에 종영됐다. 검열에서 필름이 잘려나갈 때마다 아버지는 굉장히 괴로워하셨는데 남들처럼 술을 안 드시니까… (속으로 삭일 수밖에 없었던 것 같다).

명륜동 자택에서 담배를 피우고 있는 김기영 감독(사진 한겨레)

부모님과의 작별

1980, 90년대에 들어서면서 아버지의 작품 활동이 뜸한 것을 두고 사람들은 아버지가 영화를 쉬고 있었던 것으로 알고 있지만, 아버지는 영화를 계속하고 계셨다. 내가 아버지를 낙원동 덕성여대 앞에 위치한 한옥 여관에 매일 모셔다드렸고, 어머니 또한 여관비를 항상 챙겨주셨다. 아버지는 저녁식사 때를 제외하면 항상 그곳에서 작업을 하셨다. 어린 시절 가족여행을 간 적도 있는데, 아버지는 며칠 지나지 않아 서울로 돌아오시곤 하셨다. 시간 가는 걸 무척 아까워하셔서. 가족 행사에 가면 절대 오래 못 앉아 계셨다. 아버지가 갑자기 “갑시다!” 그러면 가족들이 우르르 따라 나갔다. (웃음)

지금으로부터 20년 전인 1998년 2월 5일, 아버지와 어머니는 명륜동 자택에서 화재 사고로 돌아가셨다. 아버지는 1960, 70년대를 대표하는 영화감독이었지만, 긴 시간 동안 잊혀졌다가 1997년 제2회 부산국제영화제에서 열린 회고전을 통해 젊은 관객 사이에서 재평가받으며 복권됐다. 덕분에 베를린국제영화제에서 회고전을 열기로 했고, 베를린으로 떠나기 전에 사고를 당해 가족도, 영화인도 충격이 컸었다. 생전 아버지께서 습관적으로 하시던 얘기가 있다. ‘너희 어머니가 죽으면 나는 요트를 타고 바다로 가겠다.’ 어머니가 돌아가시면 언제라도 따라가겠다는 뜻으로 하신 얘기였다. 둘 중 한명이 먼저 떠났다면 다른 한분이 무척 힘들어하셨을 텐데…. 자녀로서 우리는 두분이 같은 날 돌아가셨다는 사실이 다행스러울 뿐이다. 아버지를 잘 모르는 사람들은 아버지의 작업방식이나 행동을 두고 기인이라고 얘기했지만, 자식으로서 아버지의 그런 모습이 언제나 좋았다.

김기영 감독의 단골집

김동양씨의 회상에 따르면 김기영 감독은 매우 규칙적인 사람이었다. 아내 김유봉 여사와 영화를 보러가는 시간을 제외하면 그가 외출을 하는 시간은 대체로 낮시간대였다. 김유봉 여사는 매일 “커피값, 점심값입니다” 하며 진행비를 챙겨주었다고 한다. 김 감독이 자주 찾았던 곳은 충무로 아스토리아 호텔 지하 다방이었다(스타다방, 벤허다방과 함께 충무로에서 영화인들이 많이 찾기로 유명했던 다방이다.-편집자). 촬영할 때는 아침에 촬영을 끝낸 뒤 스타다방(충무로 사랑방 칼국수 골목에 위치해 있었다) 옆에 있는 닭곰탕집에 들러 속을 채운 뒤 집에 갔다. 평양냉면을 무척 좋아했던 김기영 감독이 1990년대 들어서 즐겨 찾았던 식당은 을지면옥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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