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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국제여성영화제②] 아니타 사키시안, 페미니스트 미디어 비평가
임수연 사진 오계옥 2018-06-13

“페미니즘 비평은 주관적? 여자들을 억압하고 무시하려고 하는 말이다”

아니타 사키시안은 웹사이트 ‘페미니스트 프리퀀시’(www.feministfrequency.com)에서 게임, 만화, 영화, TV드라마, 인터넷까지 포괄한 미디어에 대한 페미니즘 비평을 하는 평론가다. 특히 게임 내 여성의 이미지를 분석한 비디오 클립 ‘트롭스 vs 비디오 게임 내의 여성’프로젝트는 16만달러 이상의 후원금이 모이고 게임 스튜디오에서 그에게 직접 강연을 요청하는 등 업계에서 큰 반향을 불러일으켰다. 하지만 그는 페미니즘 비평을 한다는 이유로 미국의 ‘게이머게이트’ 사건(게임 언론의 부패를 청산하자는 취지에서 시작됐으나, 게임 업계 여성 종사자 및 페미니스트 비평가 등을 향한 극단적인 사이버불링으로 변질됐다) 당시 살해 협박을 받는 등 끔찍한 테러를 당하기도 했다. 아니타 사키시안이 해왔고 원치 않게 겪었던 일들은 최근 한국에서 벌어지는 온갖 논란을 떠올리게 한다. 게임 일러스트레이터들이 페미니스트라는 이유로 일자리를 잃고, 게임 회사 직원이 상사로부터 페미니스트가 아니라고 SNS에 밝힐 것을 요구받은 사실이 드러나 논란이 되기도 했다. 특별 강연을 위해 여성영화제를 찾은 아니타 사키시안과의 인터뷰가 특히 흥미롭고 시의적이었던 이유다.

-미디어 비평을 시작하게 된 계기는 무엇인가. 2009년부터 유튜브에 영상을 올린 것은 남들보다 시류를 빨리 읽은 것 같다.

=석사 공부 당시 페미니즘 자체가 학계에서 제한적으로만 다루어질 뿐 대중에는 다가가기 힘들다는 점이 많이 답답했다. 그래서 페미니즘을 좀더 주류로 이끌어내고 더 많은 사람들에게 알리기 위해 대중문화 비평을 시작한 거다. 2009년 당시 비디오 블로깅은 초기 단계이긴 했지만 조금씩 퍼져나가고 있는 상황이었는데, 사람들에게 보다 접근성 높은 방식은 글보다는 비디오라는 생각이 들었다. 또한 내가 하는 일이 주로 비주얼을 해체하는 작업이기 때문에 영상으로 보여주는 게 훨씬 더 직관적이고 사람들과 소통하기가 쉬웠다.

-비디오는 글만큼 깊이 있는 분석을 하기 어렵다는 것에 대한 고민은 없었나.

=2012년 ‘트롭스 vs 비디오 게임 내의 여성’이 이슈가 되면서 영상 길이에 대한 고민이 생겼다. 콘텐츠를 제대로 분석하려면 시간이 걸리는데, 30분 정도 되는 영상을 과연 사람들이 볼까 싶었던 거다. 아직도 우리는 적당한 영상 길이에 대해 실험을 하고 있다. 그리고 영상으로 비평을 하면 글보다 깊이가 떨어질 수 있다는 우려에 나 역시 공감을 한다. 하지만 자신이 전달할 메시지가 무엇인지 정확하게 알고 있다면, 그 메시지를 가장 잘 전달할 매체를 찾는 것이 중요하다. 일종의 전략인 것이다. 블로그, 신문, 다큐멘터리, 유튜브, 팟캐스트 등 메시지에 따라 미디어가 달라질 것이다. 그리고 궁극적으로 페미니즘을 정확하고 깊이 있게 이해하기 위해서는 책을 읽고 그 이론을 공부할 수밖에 없다. 내가 공부하고 있는 내용을 온라인 활동에 접목하는 방법을 계속 고민하고 있다.

-당신이 게임에 대해 페미니즘 비평을 했다는 이유로 겪은 테러와 유사한 일이 한국 게임 업계에서도 벌어졌다. 페미니즘에 대한 억압은 사회 곳곳에서 벌어지고 있지만 유독 게임계가 더 시끄러운 것 같다.

=한국에서 벌어지고 있는 일에 대한 기사를 나 역시 미국에서 읽었다. 페미니스트라고 직접 말한 것이 아니라 그런 분위기라도 풍기면 공격을 받는다더라. 한국의 게임 문화에 대해 잘 알지 못하기 때문에 서양의 게임 산업에 대해서만 말씀드릴 수 있을 것 같다. 이곳의 남성들은 게임이 자신들의 전유물이라고 느낀다. 게임은 여자의 것이 아니고, 여자가 뭐라고 게임에 대해 왈가왈부하느냐는 것이다. 그래서 수십년간 게임 마케팅이나 콘텐츠 내용이 남자들에게 맞춰져 있었다. 여성들은 그 안에서 철저하게 배제되거나 남성 우월적인 시선하에 마구 짓밟히는 존재로 구현돼왔다. 게이머게이트에 참여했던 남자들을 살펴보니 본인 생활에 불만이 많은 자들이더라. 현실을 부정하고 게임으로 도피한 후, 게임이라는 환상의 세계에서 보상을 받으려는 이들이다. 그런데 여자들은 옛날부터 계속 게임을 해왔고, 여자들 역시 그 환상의 세계로 도피하고 싶어한다. 하지만 남자들이 생각하는 환상의 세계에서는 남자가 여자 위에 군림해야만 하기에, 여자들이 게임에 대해 무언가를 꼬집는 것 자체가 너무 싫은 거다. 이것은 게임 산업만의 문제가 아니다. 우리 사회에 뿌리 깊은 남성 우월주의와 여성 혐오가 존재했고, SNS라는 플랫폼의 익명성이 더해져 벌어지는 사건이다. 예전에는 남자들이 정말 싫어하는 여자에게 직접 가서 이야기해야 했지만, 지금은 SNS를 통해 혐오 메시지를 쉽게 보낼 수 있다. 거기에 또 다른 남자들이 우르르 동참을 하게 된다.

-게임 산업뿐만 아니라 지금 한국에서는 페미니즘에 대한 반격인 ‘백래시’가 사회 곳곳에서 공공연하게 벌어진다. 영화 기자나 평론가들 역시 작품의 젠더 감수성을 지적하는 것만으로도 욕을 먹는다. 이미 이런 일이 벌어진 전적이 있던 미국에서 보기에 이렇게까지 반발하는 사람들이 나타나는 이유가 무엇이라고 보나.

=현재 상태를 변화시키려는 움직임에 대해서는 항상 반발이 있어왔다. 흑인이면 당연히 범죄자 취급을 해도 되고 총을 맞아도 된다는 판단하에 많은 흑인들이 죽음에 이르렀고 이 때문에 ‘흑인의 생명도 중요하다’(Black Life Matters)는 운동이 시작됐는데, 당시 그에 대해서도 엄청난 반발이 있었다. 사실 지금 도널드 트럼프 같은 사람이 대통령으로 뽑힌 것도 미국이 이루어온 진보에 반발하며 과거로 거슬러 올라가 구시대적인 가치를 되찾고 싶은 이들의 영향이 컸다고 본다. 그래도 누군가는 이야기를 해야 하고, 누군가는 목소리를 높여야 한다. 그래야 다른 사람들도 나 혼자가 아니라는 것을 느끼고 동참할 것이다. 누군가가 젠더 의식을 지적하는 목소리를 낼 때 거기에 공감하는 여성들이 훨씬 많았을 것이다. 하지만 그것을 공개적으로 말하기가 두려워서 다들 조용하게 있었을 뿐이다.

-당신이 받는 공격 중에는 게임에 대해 잘 알지 못한다는 비판도 있었다.

=현 상태를 유지하기 위해서, 어떤 방식으로든 변화를 일으키려는 사람들의 입막음을 하려는 이들이 있다. 그래서 ‘너는 게임의 ㄱ자도 모르지 않느냐’, ‘fake geek girl’(오타쿠처럼 만화나 게임에 심취하는 사람들은 전부 남자들이지, 여자가 그렇게 보이는 것은 전부 가짜라는 의미)이 아니냐며 공격한다. 비평의 타당성은 서로 대화를 하며 논쟁해야 할 문제이고 제대로 싸울 자신도 있는데, ‘넌 여자라서 게임을 몰라’라는 식으로만 말하니까 대응할 가치조차 느끼지 못하고 있다. 똥이라고 생각하고 밟지 않으려고 한다. (웃음) 또한 성적이고 폭력적인 메시지만 퍼붓고 가는 사람들 중에는 실제로 게임을 하지 않는 경우도 있다. 그들은 게임 산업이나 대중문화의 발전을 위해서도 아니고 그냥 페미니스트들을 밟고 싶은 것뿐이다.

-어떤 작품을 비평할 때 다양한 요소를 고려해야지 페미니즘적으로만 접근하는 것은 시야가 좁다는 식의 의견도 있는데.

=자신들이 하는 비평은 아주 객관적이지만 페미니즘 비평은 그저 여자의 입장만 고려한다며 주관적이라고 말하는 자들이 있다. (웃음) 그냥 여자들을 억압하고 무시하기 위해 하는 말이다. 원래 사람은 그 누구도 100% 객관적인 비평을 할 수 없다. 어떤 주제든 미디어를 볼 때 각자가 가진 렌즈가 다르지 않나. 자신이 살아온 배경과 경험을 토대로 세상을 보고, 모두 주관적인 렌즈로 보고 이야기를 하는 것이다.

-예술이나 엔터테인먼트는 그 자체로 가치가 있는 것이지 어떤 사상을 실어나르는 도구가 되어서는 안 된다고 말하는 사람도 있다.

=예술은 언제나 정치적이었기 때문에 굉장히 어리석은 주장이다. 그 어디에도 가치중립적인 미디어는 없다. 미디어는 사회, 가치, 다름, 사회적인 관계 맺음을 이해하는 데 아주 큰 영향을 미치고 있다. 물론 엔터테인먼트를 그 자체로 즐길 수는 있지만, 그 안에서 우리에게 계속 전달되는 메시지를 그대로 받아들여서는 안 된다. ‘페미니스트 프리퀀시’는 미디어를 통해 사회 부조리를 고쳐나가고 많은 사람들이 서로를 더 존중하게끔 만드는 방식으로 좀더 나은 세상을 만들려고 한다. 내가 가장 좋아하는 말 중 하나가 “세상은 아담이 아니라 이야기로 만들어졌다”는 것이다. 우리는 언제나 이야기를 통해서 서로를 이해하고 서로를 이해하는 방식을 배운다. 기업이 스토리텔링을 장악했다고 해도, 오히려 그렇기 때문에 더욱 우리는 이야기에 더 민감하게 반응하고 더 비판적으로 봐야 한다.

-게이머게이트를 포함한 사이버불링 때문에 정작 당신의 다른 성과가 묻히고 있다는 불만은 없나.

=정말 짜증난다. (웃음) 지금의 나는 ‘살해 협박을 받은 피해자’로 가장 유명하다. 내가 한 것이 아니라 남들이 나에게 했던 일이 부각되는 것 아닌가. 정말 많은 남자들이 시간과 노력을 들여 온라인상에서 나에게 폭력을 행사한 결과, 구글이나 유튜브에서 내 이름을 검색하면 그들이 한 짓이 잔뜩 나온다. 유튜브에서 내 영상을 보고 나면 날 공격하는 영상이 뒤이어 자동 재생된다. 이것은 게임과 페미니즘 문제를 떠나 SNS의 역할에 대해서도 고민해야 할 문제다.

-하지만 당신을 비롯해 게임을 페미니즘적으로 비판하는 사람들이 늘어나고 있다. 그 결과 미국 내 게임 산업이 조금이라도 바뀌고 있나.

=게임 산업 내 다른 여성들도 목소리를 내고 자신의 경험을 공유하기 시작했다. 게임의 내용뿐만 아니라 온라인상에서 여성의 이미지가 폄하되고 성희롱이 만연한 상황에 대해 이야기하게 됐다. 그리고 실제로 변화가 일어났다. 여성의 이미지가 많이 달라졌고, 여성 또는 백인이 아닌 다른 인종을 주인공으로 하는 게임도 많이 생겼다. 물론 아직은 나쁜 사례가 좋은 사례보다 훨씬 많긴 하지만, 어느 정도 개선되고 있기 때문에 앞으로 희망이 있다고 본다. 게임 스튜디오나 저널리즘 내부에서도 이런 변화에 대해 많이 이야기를 하고 있다. 생각보다 빨리 변화가 시작된 것 같아서 개인적으로는 고무적으로 생각하고 있다.

-수십년이 걸린 할리우드와 비교했을 때 변화의 속도가 훨씬 빠른 것 같은데. (웃음) 전반적인 사회 분위기가 영향을 준 것 같나.

=인터넷의 발전과 뗄 수 없다. 물론 인터넷의 명암이 존재하긴 하지만, 인터넷 덕분에 많은 정보가 빠르게 확산될 수 있다. 예전에는 페미니즘 영화비평 같은 것이 학계 내에서만 이야기됐고, 대중에게 퍼져나가기까지 오랜 시간이 걸렸다. 또한 미국은 1990년대부터 2000년대 사이 페미니즘에 대한 엄청난 반격이 존재했다. 이제 우리는 평등한 대우를 받고 있으니 페미니즘은 필요 없다는 식이었다. 하지만 그것은 사실이 아니었고, 뿌리 깊은 성차별이 존재한다는 것을 인식하고 원점으로 돌아와 페미니즘 운동이 다시 부흥하고 있다. 최근 미투(#MeToo) 운동도 한몫했다. 처음에는 권력을 가진 남자들에게 성폭행을 당했다는 고백을 믿어주지 않는 사람들도 있었지만, SNS상에서 엄청난 파급 효과를 가져오면서 우리 사회의 뿌리 깊은 곳에 여성 혐오가 자리한다는 것을 다들 깨달은 것 같다. 몇 십년 뒤에 다시 지금 이때를 돌아보면 정말 흥미로운 담론이 많이 나오지 않을까.

-2015년 이후 한국에서도 페미니즘 운동이 불타올랐지만 그에 대한 반격이 너무 심해서 과연 한국도 바뀔 수 있을까 하며 미래를 비관적으로 바라보게 될 때가 있다.

=미래를 위해 지금 씨를 뿌린다고 봐야 한다. 젊은 운동가들 중에는 길게 보고 간다는 것을 이해하지 못하고 빨리 결과를 봐야 한다고 생각하는 이들도 있는데, 죽기 전에 큰 결실을 맺고 죽겠다는 마음으로 임하면 안 된다. 희망이라는 것은 불씨가 살아났다가 사라졌다가 하는 것이다. 리베카 솔닛의 <어둠 속의 희망>에서 “바람을 즐기라”는 말이 등장한다. 역풍이 몰아치는 것마저도 의미가 있고 가치가 있다는 의미다. 우리 눈에는 지금 해가 지는 것처럼 보이지만 그 반대쪽에는 해가 뜨고 있다. 우리가 하고 있는 이 일은 결코 쓸데없는 짓이 아니고, 어떻게든 진보에 기여를 하고 있다는 점을 굉장히 잘 짚어낸 책이다. 항상 넓은 시야를 갖고, 큰 그림을 보면서, 장기적으로 볼 필요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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