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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리로, 뉴욕으로, 나는 영원한 유랑자”
2001-03-21

빔 벤더스와의 서면 인터뷰

여행을 많이 다닌 친구와의 대화는 즐겁다. 그가 돌아온 길이 길고 다채로울수록 더욱. 이 땅의 영화 마니아 1세대들이 ‘색다른’ 영화에

목말랐던 시절, <도시의 앨리스> <베를린 천사의 시>처럼 세련된 그림에 존재의 망설임을 담은 영화로 화답해왔던 벤더스는 쉰여섯이 된 신세기

벽두에 카메라 뒤에 철저히 자신을 감춘 음악 다큐멘터리 <부에나비스타 소셜 클럽>으로 서울의 극장가로 돌아왔다. 정식 개봉된 영화는 몇편

없지만 왠지 언제나 곁에 있었던 것만 같은 기묘한 감독 빔 벤더스. 그에게 이 메일을 띄우면서 우리는 마치 펜팔에게 보내는 편지를 우체통에

넣는 듯한 감정을 느꼈다. 한국 관객과의 친밀한 대화를 보물로 간직하고 있다는 ‘독일인 친구’에게서 날아온 답장을 공개한다.

우리는 언제나 당신에게 이 질문을 하고 싶었습니다. 지구상의 도시 가운데 당신이 진정 살고 싶은 곳은 어디죠.

솔직히 말하면, 오랫동안 가지 못한 모든 도시죠. 나는 베를린, 파리, 샌프란시스코, 로스앤젤레스, 뉴욕, 시드니, 도쿄, 리스본에서 살아봤는데,

그 도시들 중 한곳이라도 들른 지 오래되면, 왠지 뭔가 중요한 것을 놓치고 있다는 느낌이 듭니다. 그냥 뉴욕과 센트럴파크를 생각하는 것만으로도

향수병에 걸리고, 파리 지하철의 냄새를 떠올리자마자 1년 동안 파리에 가보지 못했다는 생각에 가슴이 찢어집니다. 그러니까 이제 아시겠죠?

나는 계속 유랑해야만 합니다. 가끔은 내가 여러 장소에서 동시에 살고 있는 것처럼 느끼기도 합니다. 하지만 그건 아마 나의 소망일 따름이겠지요?

사람들은 지금이 인터넷 시대라고들 말합니다. 의사소통의 방식이 근본적으로 변화하고 있다는 뜻이겠지요. 하지만 당신은 영화에 대해

어떤 고전적인 믿음을 갖고 있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여전히 영화가 커뮤니케이션의 한 통로일 수 있다고 믿나요? 만약 그렇다면 그 신뢰의

근거는 무엇인가요? 그런데 인터넷도 직접 자주 돌아다니나요? 어쩐지 당신은 타자기를 고집하고 있을 것만 같거든요.

난 컴퓨터 중독자예요. 헤아려보면 타자기를 쓰지 않은 지 정확히 12년이 되었네요. 나는 인터넷을 사랑하지만, 점점 더 독서할 시간을 빼앗아가고

있는 점에 대해서는 속이 상합니다. 그리고 당신 말이 맞습니다. 나는 아직도 영화, 그리고 극장에서 영화를 보는 경험이 신세기가 열리는

이 시점에서도 강력하고 심지어는 성장중인 문화라고 깊이 믿으니까요. 20세기는 정녕 움직이는 이미지의 세기였습니다. 그리고 새 시대의 문턱에서,

시청각 문화는 전반적으로 가장 거대하고 영향력 있는 전 지구적 산업이 되었습니다. 텔레비전에서 인터넷에 이르기까지 넓게 펼쳐져 있는 이

산업 내에서 영화의 역할은 여전히 중대합니다. 영화는 우리의 취향, 우리의 습관 그리고 우리의 상상력을 다른 어떤 예술이나 엔터테인먼트보다

강력하게 형성하고 있습니다. 컴퓨터와 스크린 앞에서 우리가 홀로 보내는 수많은 시간이 말해주듯, 오늘날 문화의 일부는 인간을 더 고독하고

고립되게 만들고 있지만, 영화를 보는 체험은 여전히 매우 사교적이며 타인과의 교섭을 지향하는 활동이지요. 나는 영화의 황금기는 아직 오지

않았다고 생각합니다.

당신의 영화가 지닌 시적인 이미지는 많은 이를 매혹했지요. 하지만 <세상 끝까지>에서는 마치 영화 스스로 이미지에 중독되는 일을

삼가는 듯한 인상을 풍겼습니다. 어쩌면 당신은 이미지로부터 좀 더 거리를 두고 싶었던 걸까요? 영화란 무엇인가에 대한 당신의 견해가 혹시

달라진 것은 아닐까 궁금하기도 했는데요.

아니, 전혀 아닙니다. 영화는 세계를 향해 당신의 눈을 열어주고 우리를 타인의 목마름과 꿈과 접촉할 수 있도록, 혹은 다른 많은 사람들의

필요와 소망, 공포를 공유하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게 해주지요. <세상 끝까지>가 일종의 이미지에 대한 묵시록을 보여준 것은 사실이지만,

오늘날 문학이나 연극이나 다른 분야보다 영화에서 훨씬 화려하게 꽃피고 있는 스토리텔링 예술에 대해서 의문을 제기하지는 않았습니다. 영화는

근본적으로 인류가 태곳적부터 품고 있는 이야기에 대한 욕구이며 신화의 소통입니다. 스토리는 의미를 창조하고, 스토리는 무질서에 논리를 부여합니다.

많은 사람에게 오늘날 우리의 세계는 더이상 이해가 가능한 곳이 아닙니다. 그들은 세계의 충격을 더이상 소화하지 못합니다. 영화는 그런 사람들을

종교보다 철학보다- 정치보다는 물론- 한층 훌륭하게 돕습니다.

<부에나비스타 소셜 클럽>은 예정된 결론을 향해 한발한발 나아가는 종류의 다큐멘터리가 아닙니다. 물론 그것이 이 영화의 미덕이기도

하고요. 하지만 영화를 만드는 감독의 입장에서 당신도 알지 못한 종착점을 향해 나아가는 영화를 만드는 일이 조금 두려운 경험은 아니었을까요?

쿠바를 향해 카메라를 들고 떠나면서 당신의 마음속에는 어떤 생각이 있었나요? 모든 뮤지션들을 규합해 콘서트를 개최하겠다는 계획이 처음부터

서 있었나요.

애초의 아이디어는 음악 다큐멘터리를 만들어야겠다는 데에서 출발했습니다. 실제 삶보다 더 거대한 믿기 힘든 여정에 올랐다는 사실은 뒤늦게야

깨달았지요. 늙은 쿠바 사나이들이 망각으로부터 깨어나는 여행, 아바나의 거리에서 빈털터리로 영락해 구두를 닦다가 비틀스 같은 팝 스타의

지위로 올라서는 여행 말입니다. 막바지에 와서야 나는 이 영화가 보통의 다큐멘터리들보다 훨씬 더 사람들의 심성을 건드렸다는 사실을 알았습니다.

우리가 기적을, 아니 그 말이 너무 극단적인 표현이라면 적어도 하나의 동화가 실현되는 장면을 보았다는 것도요.

그토록 오랜 시간에 걸쳐 쿠바 음악의 생명력을 지탱해온 사람들을 만났을 때, 개인적인 소감은 어땠나요. 그들과 나눈 특별한 추억이

있다면 듣고 싶고요.

그 자신을 제외하면 아무도 그들의 음악을 듣길 원치 않는 상황에서도, 자기와 자기 음악에 대해 결코 포기하지 않았던 그들의 정체성 의식이

가장 특별했습니다. 게다가 이들은 결코 불평하는 법이 없었습니다. 불평할 만한 오만 가지 이유가 있었는데도 말입니다. 자기 음악에 흠뻑

빠진 나머지 그 음악이 좋은 음악이란 것을, 성공을 확인받을 필요조차 없었던 거죠. 세상에서 제일가는 성공을 거둔 지금도 그들은 같은 연주를

합니다. 조금도 덜하지 않은 열정과 에너지로 말입니다. 무엇보다 놀라웠던 순간은, 콤파이(기타리스트)가 내게 “올해가 내 평생 최고의 해예요!”라고

말했을 때입니다. 세상에, 그는 90년을 살았다고요. 또, 그 말은 그냥 하는 소리가 아니라 진심이 담겨 있는 말이었어요. 우리의 모든

삶과 작업과 생에 대한 개념 자체를 새로운 관점에서 보게 해준 말이었지요.

<부에나비스타 소셜 클럽> 말미의 콘서트 시퀀스에 감동받지 않을 사람은 거의 없을 겁니다. 그렇지만 동시에 그 장면의 감흥은 말로

설명하려들면 무기력해집니다. 당신 스스로는 콘서트를 촬영하면서 어떤 심리 상태에 있었나요.

절망에 빠져 있었습니다. 보는 것만으로도 특권이라 할 만한 사상 최고로 위대한 콘서트가 눈앞에 벌어지고 있는데 나는 오로지 그것을 기록하기만

해야 했으니까요. 카네기홀은 조합 규율이 엄해서, 나는 단지 3대의 카메라만 들어가도록 허락받았습니다. 2대는 객석에 설치할 고정카메라였고,

1대는 스테디캠이었지만 맨끝 구역 뒤쪽에서만 촬영할 수 있었지요. 모니터도 금지돼 있어서 나머지 카메라맨들이 뭘 찍는지도 볼 수 없었어요.

무선 교신만 됐는데 그것도 도중에 자주 끊겼지요. 요컨대 콘서트는 황홀하게 진행되고 있는데 나로서는 그걸 우리가 제대로 녹화하고 있는지도

몰랐던 거죠. 완전히 악몽이었어요. 나중에 밤이 깊어서야 우리가 몇 가지 핵심을, 그것도 아름답게 포착했다는 걸 알았죠.

<부에나비스타 소셜 클럽>은 새로운 스타일의 영화입니다. 다큐멘터리이면서도 음악이 뮤지컬영화처럼 끊임없이 흐르는가 하면, 로드무비처럼

여행이 끝날 때까지 전체적인 상을 파악할 수 없습니다. 영화는 자유롭게 흘러가면서도 엄밀하게 조율된 듯도 합니다. 영화의 구조와 스타일

면에서 가장 중요했던 요소는 무엇입니까.

영화에 착수했을 때 나는 그저 아바나로 가서 3주간 촬영을 하고 돌아와 편집을 하면 끝이라고 간단하게 생각했습니다. 우리는 이 밴드가 콘서트에서

라이브 공연을 할 줄도 몰랐고, 심지어 당시 그들은 라이 쿠더의 발명품일 뿐 단일한 밴드로서 존재하지도 않았습니다. 그는 이 모든 음악인을

모아서 상상의 밴드, 부에나비스타 소셜 클럽을 만들어낸 거죠. 그들 중 몇몇은 서로를 알고 함께 연주한 적도 있었지만 대부분은 함께 작업한

적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암스테르담 공연의 가능성이 떠올랐을 때 너무 좋아서 실감이 안 났어요. 나는 아바나 촬영을 끝낸 뒤 50시간 분량의

테이프를 들고 LA로 돌아가 편집 준비에 들어간 상태에서 암스테르담에서 2회 공연을 한다는 소식을 들었습니다. 어떻게 그걸 놓칠 수 있겠어요!

그래서 다른 스탭들을 꾸려 몇주 뒤 암스테르담으로 날아갔지요. 4일간 리허설을 찍었고 그들은 평생 최초로 한 밴드의 모습으로 나타났습니다.

그들은 10대처럼 긴장해 있었어요. 무대공포증의 엄청난 습격이었죠. 하지만 청중들은 첫곡이 끝나자 이미 의자 위에 올라서 있었어요! 나는

촬영을 마치고 서른 시간의 추가 촬영분을 들고 LA로 돌아와서 생각했죠. 와, 이젠 정말 충분해. 그런데 다시 카네기홀 공연 소식이 들려왔습니다.

결국 나는 3편의 장편영화를 만들고도 남을 만한 재료를 안고 편집실에 앉아 있었습니다. 이 모든 것을 엮어낼 구조에 대한 필요성은 그 다음에야

제기됐습니다. 아바나와 암스테르담, 뉴욕을 어떻게 구별할 것인가, 관객이 길을 잃지 않게 하려면 어찌 해야 할까? 정말 우리 눈앞에서 벌어진

사건을 어떻게 들려줘야 할까? 시작할 무렵에는 이 영화가 스토리를 갖게 되리라고는 꿈도 꾸지 않았어요. 다큐멘터리란 원래 스토리가 없는

거잖아요! 구조를 정하고 암스테르담을 흑백으로 처리하고 아바나를 우편엽서 같은 원색으로 칠하고 뉴욕을 네온빛으로 꾸미겠다고 결정하기까지는

한참의 시간이 걸렸습니다. 계획없이 그저 날아오는 펀치에 맞춰 움직인 셈이죠.

이 이야기의 영화화를 제안한 라이 쿠더는 실제 촬영기간중 어떤 역할을 수행했나요.

라이는 두 번째 앨범 준비에 너무 바빠서 내가 뭘하고 있는지 쳐다볼 시간도 거의 없었어요. 오랜 친구로서 라이는 내가 제대로 잘하고 있으리라

믿은 것 같습니다. 오토바이를 타는 장면과 이브라힘과의 대화 장면을 위해서 내가 간신히 그를 스튜디오에서 끌어낸 반나절만 빼면 한번도 라이는

촬영에서 적극적인 역할을 한 적이 없습니다. 그때 찍은 장면이 뭐였는지도 1차 편집본을 보고서야 알았을 겁니다.

들리는 말로는 <부에나비스타 소셜 클럽>의 디지털카메라 사용 결과에 대해 매우 흡족해했다면서요. 디지털영화에 고유한 미학이 무엇인지에

대해 이 영화를 찍고 나서 대강의 그림을 얻었다고 할 수 있나요.

디지털영화는 아직도 발명중입니다. 우리는 그저 시작을 목격한 것에 불과하죠. 그 발명의 과정을 도울 수 있다는 것은 오늘날의 필름메이커에게

매우 신나는 일입니다. 나는 디지털영화의 도래는 유성영화의 그것에 비할 만한 이행이라고 봅니다. 이 새로운 테크놀로지를 갖고 감독들이 뭘

할 수 있는지에 관해서 우리는 아직 희미한 스케치도 갖고 있지 못합니다. 물론 스토리텔링은 새로운 도구상자를 갖고 계속될 겁니다.

당신은 미국 대중문화, 특히 팝 음악의 열정적인 팬이었습니다. 여전히 미국적인 것으로부터 영감을 얻나요.

답은 예스이기도 하고 노이기도 합니다. 미국 문학과 음악은 내게 지금도 영감을 줍니다. 미국의 풍경도 그렇습니다. 독립영화 신의 몇몇 창의적인

미국영화들도요. 어떤 판박이 영화들은 나를 죽도록 지루하게 만들긴 하지만요. 지난 몇년간 내가 본 가장 놀라운 영화들은 아시아에서 온 영화들이었습니다.

즐거운 일이지요.

오즈 야스지로에 대한 특별한 존경을 몇번이나 표현한 적이 있었지요? 오즈와 그의 영화가 당신의 영화 경력에 어떤 입김을 끼쳤나요.

나는 영화를 찍기 시작하고 나서야 오즈의 영화를 알게 됐습니다. 그러니까 감독으로서의 형성기에는 별 영향이 없지요. 하지만 일단 그 영화들을

보고, 영화 예술 역사상 다른 어떤 작품들보다 사랑하게 되고 나자, 그들은 내게 영화의 가장 신성한 보물과 같은 존재가 됐습니다. 실락원이라고

할까요.

저널리스트로서 우리는 우리가 하고 있는 일들이 대관절 어떤 의미가 있을까 늘상 자문하고 회의합니다. 지난 부산영화제에서 당신은 언론의

단독 인터뷰 요청을 뿌리치고 관객과의 대화에 더 많은 시간을 할애했지요. 기자와 평론가들에 대해 당신의 정직한 의견을 듣고 싶군요.

나는 지적인 질문들에 대해 답하는 일을 즐깁니다. 나는 말보다 글에 능숙합니다. 내가 즉흥적으로 말을 내뱉고 질문에 답해야 할 때마다,

신문 인터뷰 같은 제도화된 틀을 빌리지 않을 때 나나 동료들이 얻는 바가 많다는 사실을 발견했습니다. 물론 인터뷰도 하긴 하지요. 20년

전 처음 한국을 방문했을 때 관객과 나눈 토론의 기억이 생생했던 나로서는, 지난 부산영화제에서 또 한번 그런 특권을 누릴 기회를 포기하고

싶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비평가들- 특히 서구의- 에 대한 나의 정직한 견해를 말하자면, 비평가들은 점점 더 마케팅과 PR산업의 일부가

되어가고 있다는 것입니다. ‘진짜’ 생각하는 바를 실제로 평에 쓸 만큼 용감한 평론가들은 극소수입니다. 평론가 대부분은 이러저러한 방식으로

거대 스튜디오의 이익에 봉사하고 있습니다. 대부분의 경우, 저는 ‘비평’이라는 단어조차 쓰고 싶지 않아요. 나는 한편의 영화를 관객에게

열어주고 영화의 실상과 본인의 감정을 묘사해, 글이 한 영화에 대한 서비스가 되는 영화평을 사랑합니다. 하지만 그런 부류의 글은 희귀해졌습니다.

대부분의 평론가들은 이제 여론을 생산하는 비즈니스, 또는 가십을 제조하는 비즈니스에 속해 있습니다. 정직하게 말해 바로 이런 점이, 내가

관객에게 직접 이야기하는 편이 시간을 잘 쓰는 방법이라고 판단하게 된 이유입니다. 관객은 자력으로 판단할 만큼 성숙하며, 또한 내가 영화를

만드는 것도 그 사람들을 위해서입니다. 이 대답이 당신의 감정을 상하지나 않았는지요. 질문에 대해 감사드립니다.

정리 김혜리 기자 vermeer@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