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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소년분류심사원에서 영화 심리치료를 진행 중인 임종재 감독 스토리
송경원 사진 백종헌 2019-02-14

아이들의 마지막 학교, 그곳에 영화가 있다

“영화를 보고 나면 아이들의 눈빛이 달라지는 것을 느낄 수 있다.” 현재 서울소년분류심사원에서 영화를 통한 심리치료를 진행하고 있는 임종재 감독이 얼마 전 <씨네21> 앞으로 정성스러운 원고를 보내왔다. 1996년 데뷔작 <그들만의 세상>으로 평단의 주목을 한몸에 받은 임종재 감독은 그간 신중한 영화 작업으로 만날 수 있는 기회가 많지 않았다. 2002년 <스물넷>, 2010년 <소분>을 연출하며 드물게 소식을 전하던 그가 그동안 청소년들을 지도, 상담하며 쌓은 자신의 경험을 전하고 싶다는 의사를 전해왔고 이에 한달음에 달려갔다. 웃고 즐기는 것 외에 영화가 세상에서 할 수 있는 게 무엇이 있을까. 작은 파장이 끝내 변화의 씨앗이 되듯 영화는 어떤 방식으로든 현실에 영향을 미치기 마련이다. 임종재 감독은 2012년부터 꾸준히 ‘영화로 찾아가는 심리치유 프로그램’을 맡아 진행 중이다. 세상으로부터 격리된 청소년들의 가교 역할을 자처하고 있는 임종재 감독의 목소리를 전한다.

“영화는 세상을 바꾸는 데 그다지 큰 영향력이 없다. 하지만 극장에 들어간 세 사람 정도의 마음을 바꾸어놓을 수는 있을지도 모른다.” 핀란드 영화감독 아키 카우리스마키는 특유의 냉소적인 말투로 영화의 효용과 한계를 이렇게 진단했다. 사회 변두리 소외된 곳에 카메라의 등불을 밝혀온 감독은 감히 영화로 세상을 바꾸려는 무모한 시도 따윈 하지 않는다. 그저 “모든 것이 잘못되어 가고 있을 때 그 사람이 어떤 최선을 다하는지 보는 것”으로 충분하다며 우리가 외면하거나 잊고 살았던 상처를 가만히 쓰다듬는다. 곰곰이 생각해보면 ‘세 사람 정도의 마음’을 바꾸어놓는 건 평범한 일이 아니다. 한 사람의 마음을 흔드는 건 세상을 뒤흔드는 일과 다름없고 한 사람의 생각이 바뀐다는 건 하나의 우주가 변하는 것과 마찬가지다. 임종재 감독은 우연히 찾아온 기회를 통해 영화의 힘과 역할을 새삼 깨달았다며 이야기를 시작했다.

영화는 무엇을 할 수 있는가

“2012년 영화진흥위원회에서 청소년과 영화에 대한 포럼을 진행한 적 있다. 그때 소년원에서 청소년들을 대상으로 한 문화 프로그램이 필요하다는 이야기가 여러 차례 제기됐다. 이후 그 자리에 참석했던 나에게 제안이 왔다. 남양주종합촬영소의 지원을 받아 군포시에 있는 소년원에서 ‘영화로 찾아가는 심리치유 프로그램’을 시작하려는데 도와줄 수 있겠냐는 거였다.” 취지에도 십분 공감했고 필요한 일이라는 인식도 있었지만 처음엔 심리치유에 대해 제대로 아는 것이 없는 자신이 맡아도 좋을지 망설였다고 한다. 하지만 달리 적임자가 없었기에 좋은 영화를 소개해주는 것 정도는 할 수 있지 않을까 싶어 시작했다. 매주 한번씩 소년원을 방문해 아이들과 함께 영화를 보고, 촬영도 함께 해보는 프로그램은 간단해 보여도 만만치 않았다. 특히 가장 큰 난관은 아이들과의 상담시간이었다. “어깨가 벌어지고 키가 나보다 머리 하나는 더 큰 아이들의 모습에 위축이 된 것도 있지만 무엇보다 아이들의 냉담한 반응과 무표정이 넘을 수 없는 벽을 마주한 기분이었다.”

임종재 감독의 불안한 마음에 희망의 불을 지핀 것 역시 아이들과의 상담시간이었다. 처음에는 시큰둥하게 반응하던 아이들도 시간이 지나면서 조금씩 익숙해지기 시작했고 카메라를 손에 쥐자 금방 그 또래다운 장난기를 발휘하기도 했다. 그러던 중에 봉식(가명)이라는 아이와 상담을 하다가 머리를 세게 한대 얻어맞은 기분이 들었다고 한다. “봉식이는 그곳에서 암묵적인 리더 같은 존재였다. 17살이었지만 무게감이 있는 차분한 아이였는데 어딘지 불안하고 위태로운 느낌을 받았다. 이미 어느 정도 폭력조직에 연루되어 스카우트 제안을 받았던 봉식이는 나중에 조직에서 자리를 잡는 게 꿈이라고 말했다.” 6주간의 프로그램이 끝날 때 즈음 봉식이가 임 감독에게 경찰공무원과 조직원 중 뭐가 좋을지 조심스럽게 질문해왔다고 한다. ‘당연히 경찰관을 해야지’라고 답했지만 무거운 마음을 감출 수 없었다. 온몸에 문신을 새긴 봉식이는 막연히 꿈에 부풀어 있었지만 경찰관에 도전하면서 겪을 어려움이 눈에 선했기 때문이다. “봉식이는 사투리 억양이 선명한 부산 아이였다. 어디서 본 것 같은 느낌이 계속 들었는데 말투며 행동거지가 영화 <친구>(2001)의 유오성과 닮았다는 걸 나중에 깨달았다. 혹시나 하는 마음에 <친구>를 봤냐고 물었더니 제일 좋아하는 영화라며 수십번을 봤다고 했다. 그때 내가 느낀 불안감의 정체가 이거였구나 싶었다.” 임종재 감독은 <친구>의 영향을 깊게 받은 봉식이를 통해 영화가 인생에 미치는 영향에 대해 다시 생각하게 되었다고 했다. “<친구>가 나쁜 영화라는 게 아니다. 상업적인 의미도 있고 배우들의 연기도 좋다. 하지만 어떤 영화가 누군가에게 깊게 영향을 미치는 사례들을 생각해보며 영화를 함부로 다뤄선 안 된다는 생각이 확고해졌다.” 임종재 감독은 봉식이를 보며 자신의 장편 데뷔작 <그들만의 세상>을 떠올렸다. 당시 평단으로부터 신인감독의 독특한 스타일, 도전적인 작품이라는 긍정적인 반응을 이끌어냈지만 본인은 스스로에게 크게 실망했다는 것이다. “좋은 평가도 있었지만 스스로는 다른 영화들을 모방한 아류작, 가짜 같았다. 고작 이런 영화를 만들려고 십몇 년을 고생했나 싶은 생각이 들 정도로 좌절감이 컸다. 그런데 한번은 영화제에서 <그들만의 세상>을 세번이나 봤다며 이 영화가 자신의 영혼을 훔쳐버렸다고 말하는 한 아이를 만났다. 이러면 안 되는데. 앞으로 영화 공부를 하고 싶다는 그 친구에게 뭐라고 답변해야 할지 몰라 한참을 망설였던 아픈 기억이 있다.” 임종재 감독은 그때부터 개인적인 책무를 떠안은 기분이라고 토로했다. 세상을 속이지 않고 투명하게 사회의 이면을 담아내는 영화를 만들겠다는 마음으로 결국 영화 공부를 처음부터 다시 하자는 결심을 했고 2002년에야 차기작 <스물넷>을 만들 수 있었다. “사실 소년원 심리치유 프로그램을 시작할 때 절반은 호기심이었다. 시나리오에 필요한 취재를 할 수 있겠다는 생각도 있었다. 하지만 아이들을 한명씩 직접 마주하면서 <그들만의 세상> 때 들었던 위기감이 새삼 떠올랐고 내 생각이 얼마나 얄팍한지 깨달았다.” 이후 심리치유에 대한 공부를 본격적으로 하고 아이들과 눈높이를 맞추는 방식에 대해 부지런히 고민한 임종재 감독은 지금까지 거의 혼자 도맡다시피 소년원, 소년분류심사원(재판을 받기 전 범법 청소년들의 비행 경위와 가정 및 심리상태를 조사하는 기관. 보통 3주 정도 이곳에서 생활하며 대기한다.-편집자) 등에서 영화 심리치료 프로젝트에 매진 중이다.

영화와의 만남은 타이밍이다. 영화의 완성도나 메시지만큼 언제, 어떤 시기에 영화를 접하는지도 중요하다. 임종재 감독은 아이들에게 쉽게 교화를 말하지 않는다. 영화가 줄 수 있는 건 작은 계기와 가능성뿐임을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그는 소년원의 아이들에게 적절한 조언이 될 수 있는 영화를 고르는 것이 중요하다고 말한다. “훌륭한 예술이 그러하듯 좋은 영화는 마음을 흔든다. 그 순간 닫혀 있는 아이들의 마음이 조금 열리고 그 틈 사이로 어떤 정서적 체험이 기억될 것이다. 마음이 흔들린다는 것은 몸이 반응하는 것인데 그 기억은 몸으로 겪는 체험에 가깝다고 할 수 있다. 마치 부모의 따끔한 회초리처럼 말이다.” 때문에 임종재 감독은 자신이 고른 영화 한편의 무게를 매번 실감한다고 했다. 한편의 영화가 안기는 체험이 어디서 어떻게 씨앗을 틔우고 긍정적인 결과로 이어질 수 있을지 끊임없이 상상할 필요가 있다는 것이다.

그곳은 아이들의 마지막 학교

임종재 감독은 소년원에서 아이들과 만나면서 겪은 가장 놀랍고도 신비한 일은 아이들의 표정이라고 말했다. “시큰둥했던 아이들도 몇 차례 이야기를 나누고 영화를 보여주고 나면 어느새 표정이 바뀐다. 처음엔 보지 않는 척하면서도 다 보고 기억하고 있다. 수업이 진행될수록 솔직해지는 그 표정이 내가 이 일을 손에서 놓을 수 없는 이유다.” 그는 아이들이 범죄를 되풀이할 수밖에 없는 사회구조의 한가운데 놓여 있다는 사실을 잊어선 안 된다고 강조했다. 오늘의 현실은 결코 아이들이 자신의 의지로 선택한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대부분의 아이들이 결손가정에서 자랐고 범죄에 쉽게 노출될 수밖에 없는 환경에 방치되어 있기 때문에 이들이 출소한다고 해도 다시 돌아오는 악순환이 반복된다는 것이다. “소년원은 아이들이 마주할 수 있는 마지막 학교다. 그들에게 네가 뭘 잘못했는지 일방적으로 주입시키는 게 아니라 올바른 생각과 가치를 가져야 하는 이유를 스스로 깨닫도록 도와주어야 한다.”

임종재 감독이 선택한 방식은 아이들의 자존감을 북돋아주는 것이었다. “폭력에 폭력으로 대응하거나 손쉽게 분노를 표출하는 것은 결국 자신을 망치는 일일 뿐이라는 걸 알아야 한다. 물론 아이들도 그걸 모르는 게 아니다. 다만 아직 경험하지 못해 느끼지 못할 뿐이다. 아무리 바른말이라도 와닿지 않으면 의미가 없다. 좋은 영화는 말로 전달하기 어려운 것들을 공감할 수 있도록 돕는다.” 때문에 임종재 감독은 다소 불편하고 어렵더라도 아이들이 공감하고 생각할 수 있는 영화들을 고르는 데 심혈을 기울인다고 했다. “영화를 자주 보지 않는 사람들에게 다소 불친절한 영화도 과감히 고른다. 왜냐하면 처음엔 낯설어하다 가도 금세 스펀지처럼 적응하는 걸 여러 차례 봤기 때문이다. 아이들의 능력을 과소평가해선 안 된다.” 심리치료 프로그램을 시작한 지 적지 않은 시간이 흘렀지만 아직은 임종재 감독 말고 이 분야에 힘을 쏟고 있는 이들이 거의 없다. 그는 해가 갈수록 힘에 부치는 게 사실이라며 자신이 손을 놓기 전에 어떻게든 지속 가능한 체계를 만들고 싶다고 했다.

임종재 감독은 예전이나 지금이나 여전히 영화 안에서 숨 쉬는 사람이다. 다만 대중을 상대로 말을 걸던 것을 현재는 아이들 한명 한명의 표정을 보면서 실행하고 있을 따름이다. 임종재 감독은 현기영 작가의 소설 <순이 삼촌>의 영화화 작업을 오랫동안 준비해왔다. 필생의 프로젝트라 부를 만한 도전인데 그는 이미 여러 차례 제작이 무산되며 사실상 종료된 상황이라고 씁쓸한 표정으로 말을 맺었다. 하지만 영화와 삶, 그리고 사람 속에서 깊어 가는 그의 묵직한 말이 쌓일 때마다 그의 손에서 그려질 영화 <순이 삼촌>에 대한 기대도 커져만 간다. 언젠가 임종재 감독의 목소리가 다시 대중에게 와닿는 날을 기다린다.

● 임종재 감독의 추천 영화들

<로제타>(1999) 감독 장 피에르 다르덴, 뤽 다르덴_ “어느 날 수업이 끝나고 나가려는데 한 아이가 <로제타>를 밖에서도 구해 볼 수 없냐고 물었다. 자신의 동생에게도 보여주고 싶다는 것이었다. 아마도 동생 역시 같은 환경에서 비슷한 방황을 하고 있으리라 짐작했다. 이 영화를 본 아이들이 다 그런 건 아니겠지만 적어도 그 아이에게 어떤 마음의 흔적을 남겼을 것이다. 그 순간 아이의 표정이 사진처럼 내 기억에도 남아 있다.”

<더 차일드>(2005) 감독 장 피에르 다르덴, 뤽 다르덴_ “다르덴 형제의 영화는 정직하다. 특히 <더 차일드>는 현실을 정직하게 보여준다. 그런 면에서 영화가 담고 있는 희망 역시 정직하다. 이 영화를 통해 우리는 자존감을 잃으면 모든 걸 잃게 된다는 걸 새삼 깨닫는다. 진정한 위로란 자기보다 힘든 상황에 놓인 사람이 그 역경을 헤쳐나가는 모습을 볼 때 다가온다. 간혹 혹독한 계절을 혼자 견뎌야 할 때도 있지만 그러다보면 언젠가는 누군가가 말을 걸어올것이다. 우리는 그 손을 잡고 다시 한번 힘차게 걸어갈 수 있다.”

<라이프 오브 파이>(2012) 감독 리안_ “정의란 무엇인가. 생각한다는 건 무엇인가. 너희는 얼마나 소중한 존재인가. 가치를 일방적으로 전달하는 영화는 공감으로 이어지기 어렵다. 오래 남는 건 질문을 던지고 스스로 답을 찾도록 유도하는 영화들이다. 리안 감독의 <라이프 오브 파이>는 옳고 그름으로 상황을 나누지 않고 답을 찾는 과정을 알려준다. 매우 친절하고 능력 있는 철학 선생님인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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