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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현진, 이윤정, 모지은 감독이 ‘한국영화감독조합 중·지·신’ 행동 강령에 대해 말하다
임수연 사진 오계옥 2019-04-04

“새로운 인식을 반영하지 못하는 영화는 도태된다”

이윤정, 모지은, 박현진 감독(왼쪽부터).

한국영화감독조합(이하 DGK)이 먼저 움직였다. 2016년 영화계_내_성폭력 해시태그 운동 이후 업계 전반에서 성희롱·성폭력에 대한 문제의식이 공유되면서, DGK는 2017년 초 성폭력방지위원회를 신설해 성폭력 문제 방지 및 해결 방안 마련에 나섰다. 그 결과물 중 하나가 지난 2월 27일 DGK 총회 때 발표된 중·지·신(중지(Stop)·지지(Support)·신고(Report)) 행동 강령이다. “모든 영화인은 성희롱, 성추행을 포함한 성폭력 혹은 원치 않은 성적 관심이 없는 환경에서 일할 권리가 있다”는 내용을 공식 문서화한 것으로, ‘성적 괴롭힘’의 범주를 보다 넓게 규정하고 감독조합은 영화계의 다른 주체들과 협력할 준비가 되어 있다는 점을 밝히고 있다. 총회 당시 조합원들 앞에서 행동 강령을 발표한 성폭력방지위원회의 박현진, 이윤정 감독 그리고 DGK 부대표 모지은 감독을 만났다. 중·지·신 행동 강령이 의미하는 바를 꼼꼼하게 짚은 이 대담은 영화계에 남은 중요한 숙제를 고민한 시간이기도 했다. 이와 함께 DGK 조합원들이 공유한 중·지·신 행동 강령 전문을 덧붙인다.

-지난 2월 27일 한국영화감독조합(이하 DGK) 총회 때 박현진, 이윤정 감독의 프레젠테이션과 함께 중·지·신 행동 강령이 공유됐다. 언제 어떻게 시작된 건인지 먼저 이야기를 듣고 싶다.

=이윤정_ 2016년 영화계_내_성폭력 해시태그 운동에 대한 조합의 반응으로 성폭력방지위원회가 만들어졌다. 원래 가이드라인의 형태를 염두에 두며 이야기를 나눴는데, 그때가 2017년 초였다. 처음에는 성폭력 예방 교육 활동을 많이 하는 분들이 쓰는 체계적인 자료처럼, 감독 대상의 교육용 문서가 되어야 한다는 거대한 목표를 잡고 접근했다. 다른 곳에 용역을 발주하거나 외부 전문가의 도움을 받아 진행해야 하나 계속 고민하고 있었다.

=박현진_ 사실 내가 성폭력방지위원회에 들어온 건 <씨네21> 영화계_내_성폭력 해시태그 대담 기사 때문이다. 원래 조합에서 회비만 내는 유령회원이었는데, 그 기사가 나가고 DGK 사무국에서 성폭력방지위원회에 들어오지 않겠냐며 전화가 왔다. 그래서 원래 있던 이윤정 감독님과 함께 일을 하게 된 거다. 우선은 나와보라고 해서 나갔다가 지금까지 이렇게…. (웃음) 그때부터 관련 전공자나 여성 활동가에게 자료를 받아 보며 준비했는데, 사실 굉장히 지지부진했다. 계속 마음속에 돌처럼 있었다.

이윤정_ 너무 거대한 목표를 잡지 말고 총회를 기점으로 무언가를 발표하자, 거기에 의의를 두자고 마음을 먹었다. 초반에 자료를 찾아 봤을 때만 해도 영화계 관련 문건이 얼마 없었다. 기업이나 조직을 대상으로 하는 책자 같은 것은 거리감도 느껴지고 영화계 상황과 잘 붙는 느낌도 없었다. 그런데 2년 정도 시간이 흐르면서 미투(#MeToo) 운동의 영향으로 참고할 만한 해외 문건이 많이 생겼고, 해외 자료를 보니 한국에서 어떻게 해야겠다는 게 좀 보이더라. 또 총회라는 목표가 생기지 않았나. 원래 데드라인이 있어야 일도 잘 진행된다. 아, 좀더 멋있게 말해야 하는데. (웃음)

박현진_ 우리 성폭력방지위원회의 숙원사업이었다고 하자.

“감독도 환경 조성을 위해 요구하는 주체”

-당시 참고한 해외 사례는 구체적으로 어떤 게 있었나. 중·지·신 행동 강령의 방향에 어떤 영향을 미쳤는지도 궁금하다.

이윤정_ 미국 연예산업노조의 행동 강령(code of conduct) 형식을 가장 많이 참고했다. 두 페이지 정도로 노조의 입장과 원칙을 밝혀둔 문서다. 그다음에는 시카고 연극 규범을 많이 봤다. 정말 자세하고 세세하게, 어떤 상황에서는 무엇을 지켜야 하고 어떤 것이 보장되어야 하는지 서술해놓았다. 가이드라인에서 행동 강령으로 넘어오면서 환경 조성을 목적으로 한다는 것으로 개념도 바뀌었다. 해외의 경우 이를 제작자, 엄밀히 말하면 고용주의 의무로 두고 있다. 노동관계로 보는 거다. 영미권에서는 안전한 환경 조성에 실패한 고용주가 민사적 책임을 진다. 사법체계가 받쳐주고 있기 때문에 따라올 수 있는 행동 강령이다. 한국에서는 민사소송을 걸 수 없지만, 개념적으로는 굉장히 와닿았다. 안전한 환경 제공을 의무로 하고 있는 자가 없는 한국 상황에 맞게끔, 우리는 영화인의 권리라고 표현했다. 영화인은 이런 환경을 제공받고 그 환경에서 일할 권리가 있다는 점을 기반으로 작성하면 훨씬 우리에게 와닿는 문건이 되겠더라.

박현진_ 행동 강령을 잘 살펴보면 감독만의 이야기로 풀지 않았다. 감독도 환경 조성을 위해 요구하는 주체라는 전제로 작성한 거다. 엄밀히 말하면 조합원이 행동 강령을 지키지 않는다고 우리가 뭘 어떻게 할 수는 없다. 하지만 이것을 시작하는 게 중요한 거고, 여러 단체와 협약을 통해 힘을 가지려면 좀더 시간이 필요하다. 제작사나 프로듀서 입장에서도 위험부담을 낮추려면 이런 고민을 해야 하는 상황이고, 지금 고민을 하고 있을 거다. 고용주가 책임을 지지 않을 때 어떤 패널티를 받느냐는 법적 체계로 들어가야 한다.

-행동 강령에서 “조합원이 따라야 하고, 또한 타인으로부터 보장받아야 하는 구체적인 행동은 다음을 포함한다”는 부분이 감독이 노동자로서 가진 권리에 관한 것인가.

이윤정_ 조합원 개인의 책임이 아니라 안전한 환경에서 연출할 수 있도록 감독은 요구해야 하고 보장받아야 한다는 거다. 우리가 행동 강령을 작성한 후 한국영화프로듀서조합(이하 PGK)과 연락해서 이 내용을 공유했다. PGK 내부에서도 내용을 공유했고, 이 취지에 동의해서 일을 진행하겠다는 답변을 받았다. 이 문건에서 중요한 건 성적괴롭힘 없는 환경 조성이 프로덕션의 업무가 되어야 한다고 공유하는 것이다. 그렇게 되면 일을 담당하는 프로듀서와 그 상위에 있는 제작자들이 움직일 거라고 본다. 업무는 담당자와 매뉴얼을 필요로 하고, 행동 강령은 그것이 있다는 전제하에 우리가 어떻게 행동하겠다는 점을 밝힌 것이다.

=모지은_ 개인의 문제가 아닌 시스템의 문제라는 것을 지적하고, 감독도 제작진의 한 사람으로서 위험성이 있다는 것을 다같이 알자는 것이다. 그런데 한국 영화산업이 그렇게 문제를 방지하고 문제 발생시 이를 해결할 수 있는 안정적인 시스템을 갖추고 있지 않다. 프로덕션을 맡고 있는 한국영화제작가협회(KFPA)나 PGK에서 무언가 하기를 기다리다가, 우리가 먼저 하게 됐다. 그리고 그 시스템은 DGK만으로 구축할 수 없다.

-‘신고’는 “제작부서의 담당자를 통하여 한국영화성평등센터 든든, 경찰 등의 공적 기관과 연계한 공정한 사건 처리 절차가 시작되도록 공식화하는 것”을 의미한다. 그런데 무엇이 신고 가능 범주에 들어가는지 사람마다 이견이 있을 수 있다.

박현진 감독.

박현진_ 경찰서에 갈 만한 큰 사건은 오히려 그대로 진행하면 된다. 우리의 행동 강령은 현장 혹은 준비 과정에서 벌어지는 노동권 침해를 막아보자는 일종의 캠페인에 가깝다. 이를테면 “술자리에서 술을 따르게 하거나, 특정한 자리에 앉기를 강요하거나, 특정인의 구애를 받아들이도록 강요하거나, 제3자의 연애관계를 이어주려고 하거나, 술자리 이후에 개인적인 만남을 강요하지 않는다”는 것을 지키지 않았을 때가 애매할 것이다. 우리는 행동 강령에서 이것이 성적 괴롭힘이라고 규정했고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 문화가 아직 남아 있다면 이를 바꾸려는 거다.

이윤정_ 그런데 그 처리 기준에 대해 제작자가 담당자를 정해놓고 “네가 알아서 잘해봐라”라고 하면 안 된다. 우리가 한 것 이상으로 훨씬 심도 있는 논의를 하고, 더 책임 있는 매뉴얼이 만들어져야 하고, 그에 대한 교육도 이루어져야 한다. 이것이 금방 해결될 일이라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지금 영화산업에는 제작부 담당자가 이런 문제 제기가 있을 때 어떻게 처리할지 개인적으로 대응하고 있을 뿐 전체적인 합의가 없다.

모지은_ 냉정하게 생각하면 문제가 생기면 경찰서에 가면 된다. 그런데 이 시스템은 피해자 혹은 다른 누군가가 경찰서에 가지 못하게 만든다. 이게 문제라는 인식조차 없으면 “겨우 이거 가지고 내가 경찰서에 가야 하나?”라는 미묘한 자기 검열이 시작되는 것이다. 그리고 이 사회는 사법기관이 날 도와주지 않을 거라고 생각하게 만든다. 일단은 이것이 문제라는 것을 모두가 인식하고 문제의 소지가 될 일을 없애는 행동을 취해야 한다.

박현진_ 개인이 말할 수 없는 문제를 막기 위해서는, 이것이 문제라는 인식을 공유하고 감독이 제작사와 계속 논의하며 이런 일이 일어나지 않도록 해야 한다. 우리가 이것을 내놓은 이상 함께 문제 해결을 요구하는 주체가 되어야 한다. 현장에서 스탭은 감독을 바라보고 있기 때문에 감독이 ‘우리 현장은 폭력적인 문제가 발생하지 않도록 노력하겠다’는 메시지를 주는 것이 필요하다. 우리도 요구하는 사람이지만, 감독은 상징적인 위치에 있지 않나.

모지은 감독.

모지은_ 그것 역시 시스템의 일부다. 감독이라는 직군 자체가 예술가인지 노동자인지 모호한 특수성 안에서 문제가 발생할 때마다 어떤 대표성을 갖는 것처럼 돼버린다. 프로덕션 현장의 책임자는 프로덕션을 운영하는 제작자다. 시스템이 올곧게 갖추어지지 않은 환경에서 감독도 피해자일 수 있다. 이런 환경은 감독에게도 굉장히 폭력적이다. 어쨌든 시간 내에 정해진 분량을 찍어야 하는데 불안전한 환경에서는 감독이 압박을 받게 된다. 그러니 감독도 이런 환경을 용인하지 말라는 게 의도인 거다.

이윤정_ 가해자와 피해자의 그림 대신 안전한 환경을 강조해야 피해자가 나올 가능성이 적고 감독 역시 마음 편하게 연출을 할 수 있다. 이런 일이 발생하면 연출자에게도 엄청난 리스크다. 이런 일이 발생하지 않을 환경에서 일할 권리가 있다는 거다. 결국 개인의 인격에 의존하는 것은 미봉책에 불과하다. 아직 많은 체계가 갖추어지지 않은 시점이기 때문에 우리가 캠페인적으로,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우리가 하자'고 얘기를 하는 거다. 결국 이 문건은 산업 자체가 움직여야 한다는 방향으로 가고 있다. 그게 훨씬 안전한 방법이다. 이 행동 강령의 자명한 한계는, 누구나 납득할 만한 신고 체계가 갑자기 뿅 하고 나타날 수 없다는 데 있다. 특정 단체가 그냥 선의를 갖고 진행한다고 가능한 일이 아니고, 충분한 토론이 이루어져야 한다. 제작자나 프로듀서의 인격의 문제로 넘어가는 구조가 되면 또 안전하지가 못하다. 사실 영화계가 이런 문제에 취약한 이유가 있다. 프리랜서들의 집단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실체가 있는 사람들이고 어떤 그룹이지만 기업처럼 강력한 조직은 또 아니다. 기업에서는 이런 일이 발생하면 감사팀이 오겠지만, 영화계는 그럴 수 없다. 더 안전한 방향으로 가기 위해서는 공적 기관이 존재해야 하고, 그 이전에 처리 매뉴얼이나 기준을 구체화해 다같이 공유하는 게 중요하다. 산업 안에 뚜렷한 기준을 같이 만들고, 개별 제작사가 문제를 해결하지 못하고 프로젝트가 끝날 시에도 공적 절차가 계속 이루어질 수 있도록 공적 기구가 있어야 한다.

-‘성적 괴롭힘’의 개념을 어떻게 규정해야 할지 고민이 많았을 듯하다. “성차별적이거나 폭력적인 언어, 행위가 일상적으로 허용되는 분위기를 조성하는 행위”가 포함되는 등 일반적으로 사람들이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넓은 범주로 정의했다.

이윤정_ 행동 강령의 목적은 누가 책임이 있는지 밝혀내는 것이 아니라 이런 일이 없는 환경을 조성하기 위해 무엇을 해야 하는지 밝혀놓는 데 있다. 그러니 ‘성적 괴롭힘’의 범위도 넓어야 했다. 한국에서는 ‘sexual harassment’가 ‘성희롱’으로 번역되면서 그 의미가 협소해지기도 했고, 성폭력 사건이 형사소송으로 이어지지 않으면 가시화되지 않았던 문제도 있어서 많은 이들에게 협의의 의미로 각인됐다. 형사적으로 가해행위로 분류될 행동만 하지 않으면 ‘난 이 문제로부터 자유롭다’라는 식의 인식이 많았다. 그런데 실제 영화 제작 환경에서 내가 안전하지 않다고 느끼게 하는 많은 사건은 그 협의의 의미에 그치지 않는다. 광의의 의미의 성적 괴롭힘으로 인해 많은 여자 스탭들이 현장을 떠났다. 약자인 스탭들이 현장을 떠나지 않고, 자신이 약자라는 기분이 들지 않게 하려면 역으로 떠나게 하는 행위를 생각해야 한다. 그것을 성적 괴롭힘으로 규정했고, 영미권 문서도 많이 참고했다.

-단체톡방이나 술자리 회식에서의 성적 괴롭힘 등 한국 특유의 문화가 반영된 항목도 눈에 띈다. 실제 사례를 분석한 후 만들어진 리스트인가.

박현진_ 2017년 영화진흥위원회와 여성영화인모임에서 실시한 ‘영화인의 성평등 환경 조성을 위한 성폭력(성차별) 실태조사’를 보면 신체 추행보다 언어적 성희롱 비율이 더 높다. 그런데 미디어에서 다루는 성희롱·성폭력은 적용 범위가 너무 좁다. 성희롱이라는 단어는 일대일, 면대면 등 사적 범주로 머물게 하는 경향이 있고, 그것만 아니면 괜찮다고 생각하게 만든다. 또한 총회 전에 초안을 짠 후 이사진 회의 때 자료를 올려서 회의를 한번 했다. 다들 현장 경험이 많은 감독이다보니 이것은 현실적으로 가능할 거 같다, 이런 것도 있었으면 좋겠다는 식의 의견을 줬다. 오디션 항목은 회의에서 의견이 나온 거다.

이윤정_ 오디션 같은 경우 명백히 우리가 권위의 위치에 있는 직군이다. 나는 스탭이었던 적은 있지만 배우였던 경험은 없다. 배우들에게 직접 물어보고 그 내용을 참고했다. 사실 우리가 알 수 있는 것만 적었기 때문에 한계가 있다. 처음에는 이에 대한 회의도 있었다. 공신력과 원칙을 밝히는 문건에서 협소하게 리스팅을 해도 될까 싶은 거다.

박현진_ 구체적으로 항목을 만드는 것에 대한 두려움이 있었지만, 이것은 완성되지 않았고 계속 업데이트할 예정이다. 시대가 바뀌어서 지금 행동 강령에 포함된 성적 괴롭힘 유형 중 반 이상이 사라지면 또 내용이 달라질 수 있고, 다른 문제가 발생하면 그것으로 채워넣을 수 있다. 완벽하게 하기보다는 우선 시작하자는 마음으로 했기 때문에 행동 강령이 만들어질 수 있었다.

이윤정_ 동시에 옳은 소리만 하는 게 아니라 실질적으로 도움이 되어야 하는 문건이기 때문에 이 리스팅을 반기는 분들이 의외로 많다. 행동 강령을 작성하면서 우리 능력이 부족하다는 점이 드러나지 않을까 걱정했는데, 그냥 마음 편하게 업데이트하려고 한다.

-특히 위험을 동반한 촬영의 안전한 환경 요건을 구체화했다는 점에서 의미가 크다. 연출자에게 필요한 가이드라인을 명시했다. 감독들이 실제로 가장 궁금해하는 내용일 수 있다.

이윤정_ 현장 구성원 중 일부가 위험한 상황에 놓이게 될 때 어떤 것을 조심해야 하는지 서술한 것이다. 폭력, 섹스, 성적인 접촉, 노출이 있는 장면이 액션 신 같은 카테고리로, 위험한 촬영이라고 묶이는 게 중요하다고 생각했다. 액션에서는 당연히 조심하고 합의가 되어 있는 부분이 있는데, 성적인 함의가 있는 장면은 그렇지 않다. 사실 이후 내용은 좀 포괄적이기는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렇게 접근해야 한다. 안전장치가 필요한 촬영이기 때문에 감독들이 합의를 하면 이후에 구체적인 방법론도 개발될 수 있다.

-총회 때 참석해 성폭력방지위원회의 발표를 지켜본 감독 조합원들의 반응은 어땠나.

이윤정_ 총회 전체 내용 중 우리 발표가 가장 재미있다는 반응도 있었다. (웃음) 지금 한국 사회가 이 이슈를 빨리 따라잡고 있지 않나. 지지난해에는 성폭력의 형사법적 정의부터 성폭력 방지 운동의 역사 등 포괄적인 것을 먼저 강의로 들었다면, 지난해에는 든든에서 성희롱과 성추행이란 무엇인가 등 개념 위주로 진행됐고, 이번에는 영화계에 포커스를 맞췄다.

박현진_ 성폭력방지위원회가 생긴 후 총회 때마다 성폭력 예방 교육을 받았다. 지지난해에는 한국성폭력상담소 이미경 소장님, 지난 해에는 든든의 한유림 전문위원이 와서 강연을 했는데 올해는 우리가 프로그램을 짰다. 2017년 실태조사 결과를 보여주고 해시태그 운동으로부터 최근 2~3년간 있었던 일을 짚어본 후 중·지·신 행동 강령을 소개하며 1시간 정도 강의했다. 내가 맡은 파트가 과거와 현재에 포커스를 맞췄다면 이윤정 감독님은 미래에 어떻게 할 것이냐를 다룬, 나름 흐름을 짜서 넣은 거다. 이준익 감독님이 좋았다는 얘기를 개인적으로 해줬고, <씨네21> 1196호에 실린 한국영화성평등센터 든든 1주기 대담 기사에서 임순례 감독님이 언급해주신 것도 봤다. 사실 개별적으로 어떤 연락이 오지는 않았지만 현장에서 다들 관심 있게 듣는다는 느낌을 받았다. 이제 우리가 이 정도 얘기는 할 때가 됐다는 화두를 던지고, 행동 강령을 하나하나 읽으며 머릿속에 새긴다는 의미가 있을 것 같다.

모지은_ 사실 DGK에 들어올 때 사인해야 할 가입서에 성추행 관련 내용이 있다. 지난해 성폭력방지위원회에서 만든 문장인데, 이게 총회에서 통과될 때 이슈가 오히려 더 컸다.

박현진_ DGK는 감독들의 이익을 추구하는 단체이지만 같은 동료들의 인권을 침해하는 행동까지 보장할 수 없다는 식의 코멘트가 있었다. 이것을 어디까지 적용할 수 있을까 긴 고민 끝에 우리가 정한 기준은 ‘가입한 이후부터’였다. 정말 큰 사건이면 형사고발로 해결할 수 있겠지만 조합이 그것까지 할 수는 없다. 하지만 인권 침해에까지 이르는 행동은 우리가 보장해줄 수 없다는 점을 가입 이후 시점부터 적용하는 거다. 법적인 처벌은 하지 못해도 조합원 자격을 박탈할 수 있다.

-행동 강령의 내용에 동의를 하는 분위기가 중요한데, 현역 감독으로서 감독들의 성인지 감수성이 예전보다 나아진 것을 느끼고 있나.

모지은_ 여기 계신 다른 감독님들보다 내가 더 오래 영화업계에 있었는데, 성인지 감수성이 가장 많이 변화한 직군은 감독이라고 생각한다. DGK 내 이사회나 감독 모임 때 보면 인식을 바꿔야 한다고 인지하고 있다. 아직까지 행동 강령 내용에 대한 반발은 없다. 관념적으로 애매하게 알고 있던 것을, 구체적인 강령으로 보여주면 2019년 한국에서 조심해야 할 행동을 인지할 수 있는 기회가 될 것이다.

이윤정 감독.

이윤정_ 사실 행동 강령이 발표되기 전까지 너무 포괄적인 책임 주체가 돼버린 감독들이 느낀 부담이 상당했다고 본다. 감독으로서 이 문제에 있어 잘하고 있는지 알 수 없고 어려웠던 거다. 감독이 영향력을 발휘해서 이런 일이 발생하지 않게끔 하고 싶은데, 어디까지 못하게 해야 하는지 잘 몰랐던 거다. 이런 걸 보면 내가 제지해도 되겠다는 것을 알고 오히려 좀 반가워하는 것 같다.

박현진_ 사실 처음에는 반반이었다. 이런 게 필요하다고 생각하지만 너무 구체적으로 제시하는 것은 부담이 됐다. 지킬 게 더 많은데 협소해 보이면 어떡할까 걱정했는데, 오히려 구체적이어서 좋다는 의견이 많았다. 그리고 성인지 감수성이란 개념은 결국 한 사람의 인격에 기대는 건데, 그보다는 어떤 위협이 발생할 환경을 막다 보면 개인의 감수성도 자연스럽게 올라간다는 생각이 든다. 인간과 제도는 상호작용한다.

-관객 입장에서는 결과물을 주로 보게 되고, 작품에서 느껴지는 감독들의 의식 수준이 있다. 성적 괴롭힘 없는 분위기가 조성되면 영화에도 영향을 주지 않을까 하는 기대가 있다. 실제로 할리우드에서는 요즘 가장 투자를 잘 받는 작품이 여성 주연 혹은 인종 다양성을 확보한 프로젝트라고 하더라. 미투 운동으로부터 촉발된 움직임이 여기까지 왔다.

모지은_ 어쨌든 영화는 현재 사회를 반영할 수밖에 없는, 여러 매체를 통틀어 가장 현재를 얘기하는 예술이다. 옛날에는 아무렇지 않았던 게 지금은 문제가 될 수 있는 시대고, 새로운 인식을 반영하지 못하는 영화는 도태된다.

박현진_ 관객이 선택하지 않을 테니까. 이익에 부합하기 위해서라도 움직일 수밖에 없는 게 영화산업 아닐까. 한국에서 2016년 해시태그 운동이 있었고, 미국은 2017년 하비 와인스타인의 미투가 터졌다. 우리보다 1년 늦었는데 미국프로듀서조합(PGA)은 바로 가이드라인을 만들었다. 굉장히 힘 있는 제작자, 배우, 감독, 특히 여자감독들이 탄원서를 내고 말이다. 정말 빠르게 산업이 움직인다는 것을 그 계보를 공부하다가 알았다.

이윤정_ 하비 와인스타인 사건이 터지자마자 두달 안에 PGA의 가이드라인이 나왔다. 영화산업은 다수의 대중을 상대로 하고 있고 소비자의 스펙트럼이 무척 넓다. 사회의 인식 변화에 빠르게 대응하는 것이 산업 자체가 살아남는 길인데, 미국은 더 큰 시장을 상대로 하는 곳이기 때문에 더 발빠르게 대응한 것 같다. 그리고 그것을 대중에 공표한다. 우리 할리우드가 이렇게 자성한다, 바뀔 것이라고 말이다. 이게 한국 영화산업에도 필요하다고 본다. 관객은 분명히 계속 발언하고 요구하고 있으니, 우리 내부에서 실질적으로 상황이 나아진 것 그리고 어떻게 나아갈지를 관객에게 보여주는 게 필요하다.

모지은_ 사실 무언가를 대외적으로 발표하는 것보다 사고를 바꾸는게 중요하다. 일단 내실 있게 내용을 다지고 내부적으로 스며들어서 인식의 변화를 일으켜야 한다.

박현진_ 사실 이런 일을 하면서 내 나름의 명분이 필요하지 않나 생각했다. 주 52시간 근로제 등 예전에는 정말 가능할까 싶었던 일들이 지금 이루어지는 것을 목격했다. 항상 강의할 때 하는 말이, 앞서 투쟁하신 분들이 있었기 때문에 지금 영화 제작 환경이 진보했다는 것이다. 그리고 남아 있는 다른 한축이 ‘성적 괴롭힘 없는 현장’이다. 시간이 좀 필요하겠지만, 나 역시 앞서 힘쓴 사람들의 수혜를 입은 사람이기에 계속 움직이면 나아질 거라고 보고, 나아질 것이다.

※ 아래는 2월 27일 한국영화감독조합(DGK)총회에서 조합원들이 공유한 중·지·신(중지(Stop)·지지(Support)·신고(Report)) 행동 강령 전문이다. 조합원이 성적 괴롭힘 행위를 인지하거나 목격할 시 해야 할 행동을 서술하고 있다.

〈중·지·신 행동 강령〉

중지(Stop)·지지(Support)·신고(Report)의 원칙: 조합원이 성적 괴롭힘 행위를 인지하거나 목격할 시에는 즉각적으로 행위를 멈추게 하고, 피해자나 문제제기한 사람 편에 서는 발언과 행동을 하며, 신고할 책임이 있다. ‘신고’는 제작부서의 담당자를 통하여 한국영화성평등센터 든든, 경찰 등의 공적 기관과 연계한 공정한 사건 처리 절차가 시작되도록 공식화하는 것을 의미한다.

-성적 괴롭힘이 없는 영화 제작 환경 조성을 위하여-

한국영화감독조합은 모든 영화인은 성희롱, 성추행을 포함하는 성폭력 혹은 원치 않은 성적 관심(이하 ‘성적 괴롭힘’으로 통일)이 없는 환경에서 일할 권리가 있다고 믿는다. 이것은 모든 영화인은 인간의 존엄성 및 신체적, 정신적 안전이 보장된 환경에서 일할 권리가 있다는 것의 다른 표현이다. 우리는 이같은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 영화계의 다른 주체들과 협력할 준비가 되어 있다.

한국영화감독조합 성폭력 예방 행동 강령은 우리 조합원들과 우리의 동료들 중 다수가 일상적으로 직면하는 인권침해적인 근로 문화에 대응하여 영화계 내부에서 영화계에 적합한 기준을 세워야 한다는 우리의 결의를 집약한 것이다.

한국영화감독조합은 영화 현장 문화에 특수한 영향력을 행사하는 감독들의 집합으로서 집단적인 책임을 인식하고 그에 적합한 활동을 이어 나가며, 조합원은 “중지하라, 지지하라, 신고하라”는 기초 행동 강령을 비롯하여 아래 기술된 내용을 숙지하고 실행한다.

➊ 영화 현장에서의 ‘성적 괴롭힘’은 다음과 같은 행위를 포함한다.

• 고용 관계 혹은 업무상 수혜 관계에 있는 윗사람이 성적인 요구나 애정 공세를 조건으로 업무상 이익, 불이익을 결정하는 행위.

• 성차별적이거나 폭력적인 언어, 행위가 일상적으로 허용되는 분위기를 조성하는 행위.

• 성적 괴롭힘에 관하여 피해 사실을 신고하거나 문제를 제기하는 사람에게 업무상의 불이익을 주거나 사적인 앙갚음을 하는 행위.

➋ 조합은 ‘성적 괴롭힘’이 없는 환경 조성을 위해 다음과 같은 활동을 한다.

• ‘성적 괴롭힘’ 발생 시 제작부서에서 신고를 받고 공식적으로 적절한 조치를 취하도록 하는 통상적인 신고체계를 수립하여 영화계 전반적으로 원활히 작동할 수 있도록 단체간 협상에 적극적으로 나서고 이를 협약으로 명문화하는 것을 목표로 한다.

• 프로젝트가 끝난 후 제작사가 해체되어 신고체계 자체가 존재하지 않게 될 경우에 대비하여 업계 전체를 포괄하는 신고체계를 수립하도록 요구하며 업계와 협력하여 그러한 신고체계의 개발을 지원한다. 그러한 체계가 수립되기 전까지는 조합원이 조합에 연락하여 변호사와 함께 이후의 절차를 마무리할 수 있도록 지원한다.

➌ 조합원은 ‘성적 괴롭힘’이 없는 환경 조성을 위해 다음과 같은 원칙을 따른다.

• 조합원은 성적 괴롭힘에 가담하지 않는다.

• 조합원의 행위에 대해 상대가 거부의사를 표현하면 즉각적으로 중단하고 나의 행위가 성적 괴롭힘인지 행위자 스스로 판단하려 하지 않는다.

• 업무 관계자들 사이에는 사적인 경계를 두고 이를 존중하며 합의에 기반한 소통만 할 것을 권장한다.

• 조합원이 성적 괴롭힘 행위에 가담한 것으로 신고되어 처리 절차가 시작될 경우에도 동일한 원칙에 따라 공정하게 다뤄질 것을 요구한다.

• 조합원이 성적 괴롭힘의 피해자, 목격자 혹은 가해자로서 관계되어 신고처리 절차가 시작될 경우 조합을 통해 조합 변호사와 상의할 것을 권장한다.

➍ 조합원이 따라야 하고, 또한 타인으로부터 보장받아야 하는 구체적인 행동은 다음을 포함한다.

A. 소규모 미팅의 안전한 환경 요건

• 안전한 장소를 제공한다. 예를 들어 거주 목적이 포함된 공간에서는 미팅을 진행하지 않는다.

• 편안한 복장이라는 이유로 속옷을 노출하거나 속옷 노출을 강요하지 않는다.

B. 오디션의 안전한 환경 요건

• 촬영이 가시화된 프로젝트의 특정 배역의 캐스팅을 위한 미팅에만 오디션이라는 용어를 사용한다.

• 프로젝트명과 배역명을 사전 고지한다. 성적인 내용이나 신체 노출, 폭력적인 장면이 있는 배역의 경우 관련 내용을 사전고지한다.

• 오디션에서 신체가 더 잘 보이게 하기 위한 목적으로 옷을 벗도록 요청하지 않는다.

• 사전에 고지하지 않은 경우, 정해진 배역 외에 성적인 내용, 구애하는 내용이 담긴 즉흥연기를 현장에서 요구하지 않는다.

• 오디션 결과는 공식적인 채널을 통해 공지하고 이후 SNS, 개인 전화 등을 통해 사적으로 연락하지 않는다.

C. 위험을 동반한 촬영의 안전한 환경 요건

• 폭력, 섹스, 성적인 접촉, 노출이 있는 장면을 설정할 때 감독과 배우는 동등한 지위에서 참여한다.

• 이와 같은 장면을 촬영할 시 현장에 참여하는 모든 참가자들은 촬영 상황과 내용에 대하여 분명한 합의를 도출한 후에 작업을 시작한다.

• 섹스, 성적인 접촉, 노출이 있는 장면의 촬영본은 최소한의 제작 관계자들만 확인하고 공개된 장소에서 재생하지 않는다.

D. 제작 전반에서 지켜져야 할 업무 관계자들 사이의 안전한 관계

• 원치 않는 접촉, 키스, 마사지, 건드리기, 껴안기 등을 행하거나 요구하지 않는다.

• 온/오프라인 대화, 개인톡, 단체톡방을 포함하여 특정인의 신체, 복장, 젠더 또는 성적 지향에 대하여 원치 않는 발언이나 일반화, 농담, 조롱, 평가를 하지 않는다.

• 모니터 혹은 촬영본 속에 보이는 특정인에 대하여 작품 콘텐츠를 벗어나서 신체, 복장, 젠더 또는 성적 지향에 대하여 원치 않는 발언이나 일반화, 농담, 조롱, 평가를 하지 않는다.

• 오프라인 현장, 온라인 커뮤니티, 개인톡, 단체톡방을 포함하여 작품 콘텐츠를 벗어난 성적인 자료나 글을 게시하지 않는다.

• 작품 속의 성적이거나, 폭력적이거나, 위협적이거나, 불쾌한 표현을 리허설이나 촬영장 밖의 대화에서 이용하지 않는다.

• 작품 콘텐츠와 직접적인 관련이 없는 개인의 성적 경험을 공개하거나 공개하도록 강요하지 않는다.

E. 술자리나 단체 회식에서 지켜져야 할 업무 관계자들 사이의 안전한 관계

• 술자리나 단체 회식은 참석을 강요하지 않는다.

• 술자리에서 술을 따르게 하거나, 특정한 자리에 앉기를 강요하거나, 특정인의 구애를 받아들이도록 강요하거나, 제3자의 연애관계를 이어주려고 하거나, 술자리 이후에 개인적인 만남을 강요하지 않는다.

이상의 행동 강령은 한국영화감독조합원이라면 (2019년 2월 27일 오후 3시 이후로) 마땅히 지켜야 하며, 조합원이 관계된 분쟁 발생 시 다음의 기관에 연락하여 공적인 절차를 밟기로 한다.

* 기관 연락처

① 한국영화감독조합 사무국_ 전화번호: 02-6080-4422 / 이메일: dgk2013@hanmail.net

② 한국영화성평등센터 든든_ 전화번호: 1855-0511(내선번호 2번)/ 사무실 02-730-1087 / 이메일: with@solido / 홈페이지: http://solido.kr/harassment (비공개 게시판)

③ 국가인권위원회_ 전화번호: 1331 홈페이지: www.humanrights.go.kr

④ 각 지역 경찰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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