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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픽션> 과거와 미래의 암묵적 공존
장영엽 2019-05-16

픽션 같은 현실, 현실 같은 픽션이 공존하는 세계의 풍경 담아낸 올리비에 아사야스의 <논-픽션>

올리비에 아사야스의 신작 <논-픽션>이 5월16일 개봉한다. 변화의 기로에 놓인 출판 전문가들과 그들의 가족을 중심에 놓는 이 영화는 관객을 혼란의 미궁 속으로 몰아넣었던 아사야스의 전작 <퍼스널 쇼퍼>(2016)와 마찬가지로 현대사회에 대한 거장의 성찰을 반영한 작품이다. 올리비에 아사야스의 첫 코미디영화이자, ‘말의 영화’인 이 작품을 통해 우리는 동시대의 무엇을 발견하고 체험하며 느낄 것인가. 이 질문에 답하기 위해 우리는 먼저 격렬한 토론이 벌어지고 있는 파리 한복판의 살롱으로 자리를 옮겨야 한다.

한 무리의 사람들이 모여 앉아 이야기를 나누고 있다. 이들은 출판업계에 종사하는 작가이자 편집자이며 또는 그들과 함께 살고 있는 가족이다. 이들은 지금 책과 예술의 현재와 미래에 대해 격렬한 토론을 벌이는 중이다. 누군가가 자신이 낸 책의 독자보다 시시콜콜한 일상을 끄적인 블로그의 조회수가 더 많다고 푸념하면, 누군가는 그래도 생각하는 법을 배우기 위해 책을 읽어야 한다고 응수한다. 또 다른 누군가는 인터넷 덕분에 더 많이 쓰고 말할 자유가 생겼다고 말하는 반면 콘텐츠는 유료여야 존중받는다고 말하는 사람도 있다. 질문은 전방위로 확장되고, 생각은 자유롭게 흐른다. 블로그에 쓴 글은 기사나 평론과 마찬가지로 공적인 가치를 가지는가? 전자책은 종이책을 대체할 것인가? 국내 문화예술계에서도 여전히 뜨거운 이슈인 이러한 질문에 대해 극중 등장인물들은 한명도 빠짐없이 말을 보탠다. 영화의 초반부에 등장하는 이와 같은 대화 장면은 <논-픽션>의 러닝타임 전반에 걸쳐 반복되고 변주된다.

<논-픽션>은 ‘말의 영화’다. 프랑스 파리가 극의 주요 무대인 이 작품은 집과 카페, 펍과 호텔, 회사와 포럼장 등 도시의 다양한 장소에서 펼쳐지는 지식인들의 대화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거의 모든 장면이 어떤 사안에 대해 이야기하는 등장인물과 그의 말에 반응하는 상대방의 숏 리버스 숏으로 구성된 이 영화는 형식적으로도 간결하고 대담하게 말의 흐름에 집중하고 있다. 누군가는 문화의 도시를 배경으로 부르주아들의 지적이고 위트 있는 대화를 조명한다는 점에서 우디 앨런의 영화를 떠올릴 수도 있겠다. 그러나 ‘말’의 목적과 활용법에 있어 <논-픽션>은 우디 앨런의 작품과 명확하게 다른 목적을 가지고 있다.

디지털과 물질주의에 대처하는 출판계의 자세

우디 앨런의 영화 속 인물들의 대화는 궁극적으로 창작자 자신의 강박증과 불안감, 그리고 두려움을 예술적으로 승화하거나 해소하려는 과정에서 만들어진 것이다. 그러므로 우디 앨런의 영화를 볼 때 관객은 인물들이 나누는 대화를 듣고 있지만 사실은 각기 다른 가면을 쓴 같은 사람의 이야기를 듣고 있는 것이나 마찬가지다. 반면 올리비에 아사야스의 관심은 외부의 세계에 머물러 있다. 아사야스는 변화하는 세계의 풍경 속에서 변모하는 삶과 인간관계의 양상을 면밀하게 포착해온 관찰자이자, 어떤 형식을 통해 이러한 변화를 영화적으로 구현할 것인지를 치열하게 고민하는 예술가다. 그런 그가 <논-픽션>에서는 현존하는 사회적 이슈에 대한 관객의 사유를 자극하고 확장하기 위한 수단으로, 이러한 사유를 담아내는 미학적인 도구로 ‘말’을 선택한 것 같다. 시골 마을의 개발을 둘러싸고 마을을 대표하는 지식인들이 설전을 벌이는 모습이 러닝타임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에릭 로메르의 영화 <나무, 시장, 메디아테크>(1993)가 <논-픽션>의 중요한 레퍼런스였다는 아사야스의 말은 <논-픽션>의 목적이 동시대의 변화를 둘러싼 치열한 논쟁을 기록하고 이러한 변화의 흐름 속 인간의 역할을 사유하며, 대사라는 영화의 핵심적인 요소를 미학의 경지로 끌어올리는 데 있음을 짐작하게 한다.

<논-픽션>에서 아사야스가 주목하는 동시대의 변화는 디지털과 물질주의다. 이는 <클라우즈 오브 실스마리아>(2014), <퍼스널 쇼퍼> 등 아사야스의 최근작으로부터 이어지는 문제의식이다. 유명 출판사의 편집자 알랭(기욤 카네)은 이러한 변화를 출판업계의 최전선에서 체감하는 인물이다. 그는 여전히 종이책을 사랑하지만, 갈수록 책을 읽지 않으며 디지털 기기를 자유자재로 사용하는 대중의 변화에 발맞춰 변화해야 할 필요성을 느낀다. 그의 출판사에 새로 부임한 디지털 마케팅 담당자 로르(크리스타 테렛)는 종이책 대신 애플리케이션으로 책을 구매할 수 있는 시스템이 필요하다며 문자메시지와 SNS의 내용을 엮은 글을 시집으로 내자고 알랭에게 제안한다. 한편 알랭의 부인 셀레나(줄리엣 비노쉬)는 인기 액션 드라마의 주연을 맡은 배우다. 그는 자신을 스타덤에 오르게 한 그 작품에 임하는 데 더이상의 감동도 성취도 없지만 명성을 유지하기 위해 드라마의 다음 시즌을 촬영하기로 마음먹는다.

자신의 신념을 좇을 것인가, 아니면 대세를 따를 것인가. 영화는 알랭과 로르, 셀레나의 대화를 통해 변화의 기로에 놓인 인물들의 고민을 현실적인 에피소드로 풀어내는 한편 알랭-셀레나 부부의 절친한 커플, 레오나르-발레리 부부의 사연을 통해 디지털 시대의 탈진실에 대한 이야기로 문제의식을 확장한다. 작가 레오나르(뱅상 매케인)는 자신의 사생활을 노골적으로 반영한 소설로 늘 구설에 오른다. 그는 모든 작가의 창작물은 얼마간 자전적인 것이라며 변명하지만, 대중은 누가 봐도 실존 인물을 모델로 한 레오나르의 소설이 타인의 사생활을 침해하는 것이 아니냐며 그를 비판한다. 레오나르의 아내 발레리는 진보 정당 국회의원의 비서다. 그는 정치가 현실을 바꿀 수 있다고 믿지만, 남편 레오나르와 친구들은 실제로 어떤 행동을 하느냐보다 그 행동이 어떻게 보여지느냐가 더 중요하다고 발레리에게 말한다. 정보가 사방에서 쏟아지며 매 순간 벌어지는 일들을 하나의 잣대로 판단할 수 없는 불확실한 세계에서는 모두가 확신을 원하며, 그 확신이 진실과는 거리가 있더라도 사람들은 그것을 진실보다 더욱 편안하고 안정적인 것으로 받아들인다는 것이다. 각자의 선입관에 의해 정해진 허구의 세계에 머물러 있길 원하는, 다시 말해 탈진실의 세계에서 살아가는 현대인들의 모습을 지적하는 <논-픽션>의 대화는 픽션 같은 현실, 현실 같은 픽션이 우리의 삶에 공존할 수밖에 없는 이유를 암시한다.

‘이중생활’(Double Vies)이라는 원제처럼, <논-픽션>은 아날로그와 디지털 사이에서, 현실과 픽션 사이에서, 명성과 신념 사이에서, 부부와 연인 사이에서 갈팡질팡하는 인물들의 모습을 위트 있는 필치로 그려낸다. 알랭과 로르, 레오나르와 셀레나의 불륜은 이 영화에서 꽤 비중 있게 다뤄지는데, 이는 의도적인 설정처럼 보인다. 각자 오래 만난 파트너를 두고 있는 네 사람은 새로운 존재에게서 자극과 열정을 찾지만 그렇다고 자신의 파트너를 떠나 불륜 상대에게 정착할 생각은 없다. 이러한 인물들의 양상은 변화의 기점에서 이들이 내리는 선택과도 정확히 맞닿아 있다. <논-픽션>의 등장인물들은 변화의 필요성을 절감하고 이를 어느 정도 수용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과거의 매체와 생활방식을 완전히 외면하지 못한다. 아사야스는 발레리의 말을 통해 이러한 동시대의 양상을 ‘암묵’이라고 정의하고 있는 것 같다. 자신의 외도를 고백하기 위해 운을 떼면서, 레오나르는 “은폐나 위선이 있다고 믿어?”라고 발레리에게 묻는다. 발레리는 “그보다는 암묵이 있다고 믿는다”며 “서로 알지만 말려들고 싶지 않은 것”이 암묵이라고 말한다. 영화의 말미에 이르면 이러한 암묵을 거부하고 모든 관계를 깨끗이 청산한 뒤 새로운 직장에서 업무를 시작하려는 로르만이 극중에서 퇴장하는데, 아사야스는 그러한 선택을 통해 과거와 미래가 ‘암묵’적인 방식으로 공존하는 세계의 풍경에 집중하려 한 것이 아닐까 생각하게 된다.

<논-픽션>이 슈퍼 16mm 카메라로 촬영되었다는 점이 흥미롭다. 아사야스가 1990년대에 즐겨 사용했던 이 카메라는 35mm 필름카메라와 디지털카메라 사이에 위치한 기종으로, 기동성과 가성비로 인해 디지털카메라가 본격적으로 출현하기 전까지 영화학도들의 사랑을 받았다. 슈퍼 16mm 카메라로 촬영한 영화를 상영하려면 35mm로 블로업해서 극장에 걸어야 했는데, 이처럼 완전한 오리지널이 될 수 없는 슈퍼 16mm 카메라의 이중적인 특성을 아사야스는 <논-픽션>의 미학적 수단으로 사용하고 있다.

아직 희망은 잘 보이지 않지만

전자책이 종이책을 금세 대체할 것 같았지만 오히려 전자책의 판매량이 감소하고 종이책의 판매량이 늘어났다는 극중 대사처럼, 미래는 여전히 정해지지 않았으며 아날로그와 디지털은 공존하고 있다. 이처럼 불확실성과 모순으로 가득 차 있는 세계에서 우리 자신을 잃지 않는 방법은, 텅 빈 교회에서 목회를 하는 <겨울빛>(감독 잉마르 베리만, 1963)의 목사처럼 믿음을 잃지 않는 태도라고 아사야스는 <논-픽션>을 통해 말하고 있다. 누군가는 아사야스의 이러한 태도가 동시대의 속도를 인지하지 못하는 예술가의 나이브한 태도라고 비판할 수도 있겠지만, <논-픽션>이 제시하는 이 잿빛 희망은 인간의 신념에 다시 한번 기대를 걸어보게 만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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