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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생충> 제작기] 최세연 의상감독, “문광의 옷… 집에 가장 밀착한 컬러와 패턴”
임수연 2019-06-12

봉준호 감독은 칸국제영화제 황금종려상 수상소감 당시 “독특하고 새로운 영화를 만드는 작업에 함께한 아티스트”로 “홍경표 촬영감독, 이하준 미술감독, 그리고 최세연 의상감독”을 특별히 언급했다. 이중 최세연 의상감독은 <마더>(2009), <해무>(2014), <옥자>(2017), <기생충> 등을 봉준호 감독과 함께하며 10년 넘게 연을 맺은 핵심 스탭이다. 봉준호 감독이 배우 이정은을 알게 된 계기가 된 뮤지컬 <빨래>의 제작사 대표도 역임하고 있다. <마더>의 혜자(김혜자)나 <옥자>의 미자(안서현)가 입은 레드 색상의 옷처럼 시각적 잔상을 남기는 의상이 <기생충>에는 의도적으로 배제되어 있다. 이같은 변화를 추적하는 것은 곧 봉준호의 세계를 이해하는 근사한 열쇠가 될 것이다.

-전작에서도 소시민 집단은 등장하지만, 강렬한 색상의 옷을 입은 <마더>의 혜자나 <옥자>의 미자와 달리 <기생충>은 캐릭터들의 의상 컬러가 튀지 않는다.

=보통 영화를 보면 공간에 의상이 묻히지 않도록 질감과 컬러, 소재에 신경을 써서 일부러 존재감을 키운다. 가령 <마더>는 혜자의 옷이 레드에서 바이올렛으로 변주되는 컨셉이 있었다. 보조출연자 몇 백명을 모두 그레이로 처리하고 혜자만 레드로 남겨두는 식으로 공간에서 인물을 소외시킬 수 있는 컬러를 제시했다. 반면 <기생충>은 두 가족이 사는 집이 무척 중요하기 때문에 인물들의 의상이 마치 수채화처럼 공간에 녹아들어가야 했다. 캐릭터들이 입는 옷이 가구나 소품의 일부인 것처럼 색깔과 질감에 접근했고, 그러기 위해서 미술과 조명, 의상 파트가 긴밀하게 함께 움직였다.

-접근 방식이 달라질 수밖에 없던 이유는 무엇이라고 보나.

=전에는 집중할 수 있는 인물들이 있었다면, <기생충>은 인물들이 동시다발적으로 나온다. <도둑들>(2012)도 주연이 여럿이었지만 각각의 캐릭터를 살렸는데, <기생충>은 기택(송강호) 가족과 박 사장(이선균) 가족을 각각의 덩어리로 생각해 접근해야 했다. 어떤 부분에서는 그 안에서 변별력을 줘야 하고, 어떨 때는 같이 뭉쳐놓아야 한다. 두 집안이 분리되어 있다가 어느 순간부터 모두가 모였을 때의 조합도 생각해야 한다.

-기택 가족은 반지하 집에 살지만 매일 옷이 바뀐다.

=기택의 집에서 찍는 신을 보면 매일 공간이 바뀐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어떤 날은 마루에만, 어떤 날은 방 안에만, 어떤 날은 밖에만 있다. 공간에 따라 인물의 옷도 바꿔준 것이다. 한 가족이 연달아 사업이 망하면서 점점 궁핍해진 거지 그들이 최빈층은 아니기도 하고. 실제 시장에서 파는 옷은 패턴이나 색감이 굉장히 센데, <기생충>의 의상 컨셉과 맞지 않아서 직접 제작을 많이 했다. 거기에 생활감을 주기 위해 염색하고 간지 내고(소품에 오래된 느낌을 주는 것) 세탁도 여러 번 했고. 또한 영화를 끝까지 보면 이들이 박 사장 집에서 실제 받은 돈은 200만원도 채 되지 않는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기존에 갖고 있는 옷이 있을 테니 이를 활용해서 옷 입는 설정으로 접근했다. 그래서 막판까지 봐도 이들이 옷을 새로 사서 입었다는 느낌은 없다.

-영화 초반 기우(최우식)를 찾아오는 민혁(박서준)은 기택 집과 대비되는 깔끔한 캐주얼 정장을 입는다. 기우가 박 사장 집에 첫 과외 면접을 갈 때 이와 비슷한 옷을 입었고, 가족 구성원이 한명씩 박 사장 집으로 이동할 때 역시 스타일링이 달라진다.

=민혁의 옷은 그가 연교(조여정)의 신임을 듬뿍 받고 있다는 느낌을 주면서 기우의 미래 모습을 대변한다. 기우가 첫 과외 면접을 갈 때 입는 옷은 민혁의 옷에서 컬러만 다르게 한 거다. 기택 가족이 박 사장 집에 갈 때마다 그 공간에 점차 흡수되는 느낌을 주는 게 주 컨셉이었다. 기택 집에 있을 때는 옷 패턴이나 컬러가 서로 충돌되면서 히스테리한 느낌을 보여주는데, 면접을 보러 갈 때는 그걸 하나씩 버리고 들어가는 거다. 기우와 기정(박소담)은 아예 제로에서 시작하는 느낌을 주려고 일부러 처음에 블랙 의상을 입혔다.

-예고편에서도 등장하는, 박 사장이 자동차 안에서 발견하고 불쾌감을 느끼는 ‘싸구려 팬티’는 어떻게 찾았나.

=저가 브랜드 속옷을 보면 엉덩이 부분이 좀 둥그렇고 크고, 고가로 갈수록 라인을 살려준다. 그 점에 집중해 팬티를 수배했고, 너무 튀는 패턴보다는 의자 시트 밑에 ‘이게 뭐지?’ 싶을 정도로만 보이는 무늬를 찾았다.

-박 사장 집 식구들은 흔히 드라마에 나오는 부잣집과 접근 방식이 달랐던 것 같다. 고가의 옷이라는 느낌은 있지만 너무 화려하지는 않다.

=딱 봐도 너무 명품 같은 의상은 배제했다. 두 사람이 감히 범접하지 못할 재벌의 이미지는 아니라고 봤고, 부자도 집에 있을 때는 정말 평범한 옷을 입지 않겠나. 집 분위기에 맞게 모던하고 심플한 느낌을 살리려고 했다. 그래서 인디언 컨셉이 명확한 박 사장 아들 다송이 빼고는 옷에 패턴이 하나도 없다. 캐릭터들이 모두 튀기 때문에 거기서 나오는 언밸런스함이 더 재미있을 거라고 봤다. IT 업계에서 일하는 박 사장은 세미슈트를 입혔고, 특히 연교는 기존에 조여정이 갖고 있는 이미지를 어떻게 변화시킬 수 있을까 고민을 많이 했다. 지금까지 입었던 옷을 검색해보니 아주 짧거나 A라인을 살리는 스커트 같은 것을 많이 입었더라. <기생충>에서는 아예 긴 치마를 입혔다. 보통 여자배우들에게는 이른바 비율이 좋아 보이는 의상을 입히는 경우가 많다. 연교는 몸매가 드러나지 않는 방향으로 가겠다고 미리 배우와 얘기도 나눴다. 고급스러운 느낌을 살리기 위해 따로 가공도 많이 했다.

-기택네 식구들도 원래는 이른바 비율 좋다는 말을 매체에서 자주 듣던 배우들인데, 이들에게 허름하고 헐렁한 옷을 입힌다는 것도 색다른 경험이었겠다.

=엄청난 희열이었다. (웃음) 제대로 핏한 옷 하나 없이 늘어난 티셔츠나 바지만 입고 있으니 집 안에 있을 때는 키도 안 커 보이고. 충숙(장혜진)의 경우 뱃살을 보여주기 위해 손을 들면 배가 드러나도록 바지를 내려 입히기도 했다. 나중에는 배우들도 이런 옷을 입는 것을 편하게 생각해서 박 사장 집에 갈 때보다 더 좋아하더라. (웃음)

-문광(이정은) 캐릭터 얘기를 하지 않을 수가 없다. 끈 있는 안경에 업스타일의 헤어를 하고 브라운 정장을 입었다. 일반적으로 생각하는 입주 가정부와는 스타일링이 달랐다.

=가장 심혈을 기울여서 옷을 제작한 캐릭터였다. 첫 등장하는 순간 가정부라는 느낌이 전혀 들지 않고, 장모나 시어머니 혹은 사모님으로 착각하게끔 만드는 게 애초부터 목표였다. 문광은 영화 속 남궁현자 건축가가 지은 박 사장 집에 제일 오래 살았던, 가장 공간에 흡수되어 있는 인물이다. 집에 가장 밀착한 컬러와 패턴의 의상을 입혔다. 문광은 양쪽 집 사이에서 중심을 잡아야 하는 위치에 있기 때문에 의상을 만들면서 보람을 많이 느꼈다.

-영화의 장르가 확 바뀌는 부분이 있다. 그때 ‘그 인물’이 입고 나오는 의상은 어떻게 정했나.

=<마더>에서 김혜자 선생님이 입은 우비처럼, 직접 제작한 바바리다. 사람의 존재는 보이지 않는데 누군가 말만 하고 있는 섬뜩한 느낌이 필요했다. 머리도 몸도 검은 옷으로 감싸고 누군가 비에 흠뻑 젖었다는 것만 보이도록 만들었는데, 너무 설정처럼 보일 수 있는 스타일링이라 스카프를 추가로 씌웠다.

-지난해 <기생충>을 끝낸 후 근황은.

=시나리오를 보면서 시간을 보내고 있다. <마더> <옥자> 때도 그랬는데, 봉 감독님 작품을 하고 나면 버퍼링 시간을 꽤 가져야 한다. (웃음)

● 내가 꼽은 이 장면!_ 폭우 속의 민소매와 흰 운동화

“폭우가 쏟아지던 밤 시퀀스 전부. 배우들과 스탭들의 애정과 노고가 집합돼 있다. 영화를 보면서 내 얘기 같은 느낌을 받아서 기술 시사회 때도, 칸국제영화제 상영 때도 울면서 봤다. 미끄러운 계단을 내려가다 넘어지는 등 액션이 많아서 그 부분에 집중했던 의상이다. 기정(박소담)은 일부러 비를 흠뻑 맞아 안에 입은 민소매가 비치도록 했다. 빗물에 씻긴 기우(최우식)의 흰 운동화는 생활감 있어야 할 신발이 너무 눈에 띄게 돼서 좀 아쉽다고 생각했는데, 막상 영화를 보니 이중적인 느낌이 생겨 오히려 뭉클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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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씨에이치수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