컨텐츠 바로가기[Skip to contents]
HOME > Magazine > 스페셜 > 스페셜2
배우 길해연·정인기·이승연이 말하는 <벌새>의 힘 - 10만 돌파 <벌새>의 숨은 페이지를 열다
이화정 사진 오계옥 2019-10-03

이승연, 길해연, 정인기(왼쪽부터).

1994년 가장 보편적인 은희(박지후)의 이야기를 꺼내든 <벌새>가 10만 관객 돌파를 앞두고 있다. 2008년 <똥파리>의 12만 관객에 이어, 10여년이 흐른 후 다시 경험하는 한국 독립영화의 의미 있는 발자취다. 이 영화가 전진하기까지 주인공 은희뿐만 아니라 은희가 사는 세상, 그 공기 속 인물들 하나하나가 생생하게 살아 있고 입체적으로 그려진 점이 큰 힘이 됐다. 또한 지난 10여년, 한국 독립영화계의 고비고비마다 지치지 않고 중요한 작품을 통과하며 단단한 버팀목이 되어준 배우 길해연정인기이승연 등 세 배우의 파워를 <벌새>를 통해 새삼 확인할 수 있었다. 연기력과 열정으로 무장된 세 배우가 <벌새>라는 정교한 시나리오를 만났을 때의 파급력이야말로 이 기록적인 작품의 날갯짓을 가능하게 만든 힘센 동력이다. <똥파리>에 세 배우가 함께 참여한 지난 역사부터, 그들의 이야기가 곧 한국 독립영화계의 현재이자 미래로 짜맞춰지는, 더없이 의미 있고 흥미로운 세 배우의 대담을 전한다.

-1초에 90번의 날갯짓, 이라는 벌새의 움직임처럼 <벌새>가 관객에게 부지런히 다가가고 있다. 돌아보니 정말 좋은 제목, 걸맞은 제목이라는 생각이 든다. (웃음)

=길해연_예전에 내가 쓴 동화가 있는데, 벌새가 소재였다. 조그만 몸집으로 빠르게 날갯짓을 하는 새다. 그때 나는 좀 힘겨운 작은 새의 이미지로 그렸었는데…. 마침 <벌새>를 하자고 제안이 와서 속으로 웃었다. (웃음)

=정인기_벌새? 처음에 듣곤 제목이 궁금해서 찾아봤다. 지난해 12월 서울독립영화제에서 처음 보고 개봉 때 다시 본 뒤 감독님에게 한 말이, “그사이 새로 다듬으셨죠?”였다. “아니”라고 하시더라. 난 많이 다듬어졌다 싶었는데.

길해연_어느 관객이 그러더라. 처음엔 머리로 보면서 생각이 많았는데 두 번째는 마음으로 보게되더라고. 영화가 아니라 관객의 마음이 다듬어진 건가 보다. (웃음)

=이승연_첫 공개된 지난해 부산국제영화제 때 한 관객이 한 말이 기억난다. 자신이 자라온 것들에 대해 생각해보게 됐다고. 또 “저는 1994년생입니다. 그런데 왜 이곳은 하나도 달라진 것이 없죠” 하더라. 많은 분들이 한번도 돌보지 않았던 자신을 안아주는 것 같은 기분이라고. 그게 첫 공개 때부터 지금까지 이어지는 영화에 대한 감상평이다.

길해연_그만큼 지금 이 사회에 상처받고 있는 사람들이 많다는 이야기일 거다. 이야기할 곳도 없고 혼자 앓고 있다가 나와 같은 사람이 있다는 걸 느끼는 거고.

정인기_시나리오 받았을 때 딸내미가 중학교 3학년이었다. 내 딸의 성장통을 보는 것 같아서 눈물이 나더라. 마지막 장을 넘기며 너무 많이 울어서 바로 감독님에게 전화 드렸던 기억이 난다. 중학교 2학년 아이의 성장소설을 읽는 것 같았다. 감정이 차곡차곡 쌓이다가 나중에는 눈물을 쏟을 수밖에 없는 그런 이야기였다.

이승연_그 눈물이 줄줄 흐르는 게 아니라 깊게 뚝 떨어지는, 훑고 지나가는 느낌이 든다. 관객이 그 느낌을 공감해주고 힘을 준다. 우리는 관객 힘밖에 없다. 광고판에 광고하면 그게 1억원 든다는데 그런 걸 어떻게 하나. (웃음)

-<벌새>의 성인들, 은희의 시선에서 바라본 어른 캐릭터를 연기했다. 단선적으로 그려지지 않은 풍부한 캐릭터 설정에 어린 시절 본 우리 부모님들을 다시 소환해보는 시간을 제공해준 연기였다.

정인기_동네 분들이 많이 보러 가셨다. (정)인기씨는 평소 화를 안 내고 그냥 재밌고 즐겁고 웃기는 사람이었는데, 아내랑 싸우고 애를 쥐 잡듯 잡는 장면이 잘 안 와닿는다고 하더라. (웃음)

이승연_그래서 감독님이 더 그런 역할을 주신 거 아닐까. 너무 가부장적인 권위를 보여온 배우를 쓰지 않으려는 생각에서.

배우 길해연.

길해연_맞다. 인기씨의 원래 이미지와 상충되면서 보이는 효과가 있는 것 같다. 은희 아버지는 사회에서는 약자이기도 한데, 집에와서는 자신이 함부로 할 수 있다고 여기는 사람들을 향해 폭력적인 언어를 쓰는 거다. ‘저 사람은 나쁜 사람이야’라고 가리지만, 실은 한 사람 안에 다양한 모습이 공존해 있다. 모든 부모가 다 훌륭하지는 않다. 어쩔 수 없이 올바르지 않은 일을 하기도 하고. 내 부모를 보면서도, 왜 그런 행동을 했을까, 가시지 않은 질문들이 있다. 그런 복합적인 모습이 담겨 있는 캐릭터라 캐릭터가 더 와닿았던 것 같다.

-정인기 배우는 김보라 감독의 단편 <리코더시험>(2011)에서도 은희의 아빠 역을 했다. 권위적인 아빠의 모습 하나하나가, 1988년에 초등학생이던 <리코더시험>의 은희가 1994년에 중학생으로 자라난 연결성을 주기도 한다.

정인기_그때 영화 배경이 정릉이었다. 정릉에서 방앗간을 해 약간의 돈을 번 뒤 자식들에게 괜찮은 교육을 시키자 해서 대치동으로 이사 왔다는, 그런 생각으로 아빠 역에 임했다. (웃음)

길해연_김보라 감독이 세상을 ‘레이먼드 카버’ 식으로 바라보는 것 같다. 냉소도 있고 유머도 있고 객관적이기도 주관적이기도 하다. 시나리오 보면서 와우, 하고 감탄사가 나오더라. 그전까지 상식적으로 그려왔던 이분법적인 것에서 벗어난 지금껏 보지 못한 시나리오였다.

-은희의 엄마 숙자 역시 딸로 태어나 집안의 혜택을 받지 못하고 양보하고 자랐고, 결혼 후엔 남편과 자식들 뒷바라지하며 사는 모습이 은희의 프리즘을 통해서 애틋하게 보여진다. 이 영화가 가진 페미니즘적인 시각이 강화되는 한축을 담당하는 역할이기도 하다.

이승연_처음부터 감독님에게 “나는 전형적인 엄마 역은 하고 싶지 않다”고 했고, 감독님도 그건 당연히 싫다고 하셨다. 퍼즐을 맞추는 심정으로 했는데, 대사 전체를 은희가 바라보는 엄마로만 풀기에는 마지막 하나가 맞지 않더라. 그래서 어느 날 감독님에게 부탁했다. 감독님 어머니 좀 만나게 해달라고. 이상한 주문을 한 거다. (웃음) 뵙고 나니 제3자가 본 것과 당사자가 보는 자신이 확연히 다르더라. 그때부터 고민하지 않고 연기할 수 있었다. 나는 은희의 시점에서 바라본 엄마뿐 아니라 지금은 어른이 된, 1994년을 관통해온 그들이 봤을 때도 이해가 되는 엄마를 표현하고 싶었다. 엄마들은 너무 바빴다. 남편이랑 똑같이 일하는데, 남편은 쉬지만 엄마들은 그 시간에 아이들 도시락을 싸야 한다. 아이들이 공부를 못하면 못하는 책임을 지고, 잘하면 남편은 ‘내 피가 좋아서 그런 거지’라고 하던 시대였다. 그런 시절을 견뎌온 여성들. 그때의 여성들이 얼마나 원더우먼이었는지, 자신의 자아를 얼마나 돌보지 못하고 살았는지, 그 생채기가 있는 엄마의 모습이 나왔으면 했다.

-그렇다면 정인기 배우에게 질문을 안 할 수가 없다. 김보라 감독의 아버지는 안 만나셨나. (웃음)

정인기_이미 내 아버지가 극중 아버지와 흡사하셨다. 70, 80년 그 시절의 아버지들이 가진 가부장적인 모습은 익히 알고 있다. 자식들에게 공포의 대상이었던 아버지를 우린 보고 자랐기 때문에 연기하는 데 큰 어려움은 없었는데 나름 공들였던 장면은 은희가 수술을 받는 장면이었다. 은희가 잘못되지 않을까 걱정하며 어떻게 울까 고민을 많이 했다. 오열을 해야 할지, 아니면 옆사람들이 ‘저 사람 뭐야, 찌질해’ 하는 울음으로 갈지. 촬영한 병원에서 빨리 찍고 나가야해서 막상 촬영은 두 테이크 만에 끝냈다. 감정 연기를 하고 있는데 병원 환자들이 ‘뭐 찍는데’ 하는 소리가 자꾸 들리니 몰입하기가 힘들더라. (웃음) 그래도 우리 작품에서 아빠가 은희를 방치하는 것이 아니라 ‘너도 내가 사랑하는 자식이다’라는 걸 보여줄 수 있는 장면이었고, 관객도 그 장면에서 마음이 편해진 것 같았다.

-이 영화에서 배우들 모두가 각자의 역할을 하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그런 면에서 잠깐 등장한 영지(김새벽)의 어머니 역시 강렬하게 다가온다. “세상에 다리가 어떻게 무너지니”라는 영지 어머니의 대사는, 1994년 시대 상황을 설명하는 말이자 이 사회의 부조리, 사회를 향한 분노와 아이러니를 모두 담고 있는 영화의 상징 같은 대사다. 길해연 배우는 중요하고 어려운 고난도의 한신을 책임졌다. (웃음)

길해연_한신 나왔는데, 이상하게도 개봉하고 영화 잘 봤다는 연락이 그 어떤 작품보다도 많이 온다. 영화에 대한 좋은 감정이 있으니 그 감정을 아는 사람과 나누고 싶어 하는 게 아닐까.

이승연_그만큼 강렬한 연기를 보여줬다는 생각이 든다.

정인기_정말 같은 배우가 보기에도 훌륭한 연기였다.

길해연_김보라 감독이 정말 집요하더라. 시나리오 보고 너무 좋았는데, 그때 내가 일정이 복잡해서 나 때문에 촬영 일정이 꼬이면 민폐니 고사했다. 그런데 정말 자분자분 설명하면서 내가 나와야 한다고 그렇게 몇번이나 설득을 했다.

이승연_감독님의 캐스팅이 명확하다. ‘저 사람이었으면 좋겠어’가 아니라 ‘저 사람이어야 해’ 이렇게 접근하더라.

길해연_사실 “어떻게 다리가 무너져” 그 한마디가 예민한 대사였고, 나로서도 부담스러웠다. 자칫 잘못하면 여기서 왜 갑자기 성수대교 사건이 나오고, 이 엄마가 등장해서 이런 이야기를 할까. 극적으로 볼 때 납득이 안 갈 수 있는 전개라는 생각이 들더라. 나도 인기씨처럼 비슷한 문제에 봉착했는데, 여기서 내가 울어도 이상하고, 안 울어도 이상하고 그런 딜레마에 빠졌다. “어떻게 다리가 무너지니” 이 대사 하나로만 가자. 여타의 설정을 하지 말자 했다. 단 감독님에게 하나만 물었다. 은희가 영지 선생님 집에 갔을 때, 그 엄마가 어떻게 하고 있었을까요. 사람은 비극 앞에서도, 슬픔 안에서도 계속 울지 않는다. 얼마 전에 죽은 딸, 그 딸을 찾아온 아이를 봤을 때도 내 딸처럼, 그런 감정이 솟지 않는 거다.

-그 감정적 ‘무감각’의 상태가, 대문 앞에서 두 배우의 에너지로 빼곡히 채워져 긴장감을 형성한다.

길해연_은희 역을 한 박지후 배우, 이 배우가 보통이 아니더라. 문 밖에 서서 마주하고 눈을 보는데, 어떻게 이런 눈을 가진 배우가 있지 했다. 어떤 방식의 죽음이든, 딸이 죽었을 때 엄마가 가지는 허망함이 있겠지만 난 이 죽음에서 세월호를 봤다. 그런데 그 대사를 할 때 길에서 ‘두부~두부~’ 하는 소리가 들렸다. 지후랑 나는 서로 쳐다보고 연기를 하고 있는데 사실 의도치 않은 소리가 들어간 거다. 이 잡음이 너무 좋았다. 내가 슬퍼하고 절망하고 허무해하고 있을 때도 삶은 계속되고, 그 소리가 마치 부조리한 이 세상을 설명해주는 것 같았다.

이승연_시나리오 이야기를 하면서 감독님과 같이 운 기억이 난다. 내 역할이 어떻게 나오는지가 중요한 게 아니라 이 이야기 자체가 너무 힘들었다. 나도 이랬지, 잊고 있었던 것 같은 그 아픔을 어떻게 이렇게 표현했지, 그런 생각이 많이 들었다.

정인기_나는 은희가 병원 입원하기 전에, 복도에서 영지 선생님에게 책 선물하는 그 장면에서 그렇게 눈물이 쏟아지더라. 그렇게 슬픈 장면이 아닌데 볼 때마다 감정이 격해진다. 아마 내가 영지 선생님 같은 삶의 멘토를 만난 적이 없어서 그게 슬퍼서인 것 같기도 하다.

이승연_보면 볼수록 은희는 김보라 감독의 어린 시절, 영지 선생님은 성인이 됐을 때 감독님, 내가 이런 사람이었으면 하는 어른인 것 같다.

길혜연_20년 전 초등학생 때 공연에서 나를 봤다며 공연 후에 편지를 주고 간 관객이 있었다. 자기가 본 멋진 어른의 모습을 기억하고 있고, 지금은 의사로 성장해 있다는 내용이었다. 그걸 읽으면서 무섭더라. 매 순간을 제대로 살아야겠구나. <벌새> 속 부모가 생계 때문에 아이를 돌보지 못했던 것처럼, 누군가를 실망시키는 것은 무심코 일어날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우리가 보통 ‘폭력적’이라고 하면 나쁜 사람을 떠올리는데 이 영화에는 단순한 악인이 없다. 그냥 그 시대의 폭력, 거기에 길들여진 우리의 모습을 보여준다.

정인기_내가 은희의 나이였을 때가 80년대였다. 군사정권하였고, 가정폭력과 남성의 권위가 드센 시절이었다. 교실에서 선생들이 학생에게 가하는 폭력은 상상 초월이었는데, 육체적 폭력뿐만 아니라 모멸감도 안겼다. 그 시절에 받은 심리적 타격과 수치감은 시간이 지날수록 줄어들지 않고 더 큰 상처로 계속 기억에 남아 있다. 그렇게 폭력 이상의 폭력이 지배하던 세상을 지나왔다.

배우 이승연.

이승연_학기 초 가정환경을 조사한다는 명목으로 학생들에게 손을 들게 했던 기억이 난다. 부모님이 중졸이냐, 고졸이냐, 무학벌이냐. 집에 자동차, 피아노 있는 사람 손 들어 하면서. 반 친구들이 다 보는 데서 손 들라고 하는 그런 가학적인 일들도 아무렇지 않게 행하던 시기였다.

길해연_국어선생님이 별스럽지 않은 이유로 내 목을 졸랐던 기억이 난다. 그땐 그런 일이 너무 많았고, 선생님과 부모님은 하늘 같던 시절이었다. 이게 참 아이러니한 게 그렇게 폭력적인 국어선생님이 문예반을 담당했는데, 그땐 또 너무 잘해주시는 거다. 그런 게 이상했던 기억이 난다.

이승연_그런 폭력이 무의식 속에 남아 있는 것 같다. 그런 무의식이 불안함과 두려움으로 남아 이후의 내 성격을 형성하는 것이 아닐까.

-이런 공감의 지점 덕분에 <벌새>가 관객에게 빠르게 전파되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회차를 거듭하면서 상영관이 늘어나는 성과도 있다.

정인기_굳이 ‘독립영화’라는 분류가 아니라도 전세계 영화제에서 25개 상을 수상한 작품, 한국영화를 널리 알리는 작품인데 대형 극장 체인에서 상영하지 않는 것이 화도 나고 그런다. 예매율도 높다. 그런데도 왜 대형 영화관에서 상영하지 않는가.

이승연_관객도 화났다고 하시더라. (웃음) 상영관이 없어서 기차타고 오는 길이라며, 좀더 볼 수 있는 곳이 많았으면 한다고. ‘<벌새> 보러 가는 길, 4시간째.’ SNS에서 이런 글도 봤다. 난 독립영화만 거의 참여하고 있는데, 가령 <산다>(2014) 때는 2년 동안 강원도에서 한겨울에 스탭 모두 온 힘을 다해 찍었는데 관객이 5천명이 안 들었다. 아무리 체크해봐도 스코어가 올라가지 않을 때의 그 허무함!(웃음)

-그간 호평이 이어진 작품도 관객의 호응을 얻지 못하는 ‘기근 상태’가 오래 지속되면서 안타까운 상황이었다. 독립영화는 관객 수요층이 없다는 말이 절망처럼 나오던 차에, 영화 한편이 돌파구를 만들어준 셈이다.

길해연_<벌새>를 향한 호응이 지금, 독립영화에 대한 응원으로 이어지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이 영화 왜 이렇게 상영관이 없어, 라는 문제제기가 인식의 개혁으로 이어진다면 더 좋을 것 같다. 독립영화에 대한 일반적인 인식이, 재미없는 거, 지루한 거, 자기들끼리 예술한다는 거다. 그런데 독립영화의 사전적인 의미가 상업영화에서 다루기 어려운 주제를 깊이 들어가고, 거기서 다양성을 실험하는거다. 관객에게 다양하게 위로가 되고, 다양한 재미를 주고, 또 일반적인 방식과 다른 유머 코드도 있고, 그런 것들을 볼 수 있는 기회가 주어진다면 우리 정서도 더 안정되지 않을까.

이승연_연극도 그런데, 좋은 작품을 고를 수 있는 기회와 안목이 있으면 더 자주 볼 것 같은데, 우연히 가보면 하필 이상한 작품이 걸리고 다시 안 보게 되는 경우를 많이 봤다. 영화도 좋은 작품이 있다는 걸 알면 더 찾아서 볼 텐데, 그 기회 자체를 모르고 지나가게 된다.

길해연_‘대중화’라는 게 얼마나 더 많이 보게 할 것인가, 숫자에 중심이 더해진다면 이건 다른 문제인 것 같다. 우리는 지금 대중화에 밀려서 어떤 것을 사유하면서 보는 자유를 일정 부분 박탈당하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엔터테인먼트가 아니라 인문학적인 것에 재미를 느끼는 사람도 소수지만 분명 존재하는데 그런 부분에 재미를 느끼는 사람은 지금 어디를 가서 그런 콘텐츠를 찾을 수 있겠나. 그래서 문화는 지원이 필요하고, 또 훈련이 되어야 한다. 문화적인 소양을 기를 시기에 지금은 모두 입시 준비로 바쁘다. 숫자 싸움에서 지면 이미 가치가 없는 거야, 라는 시대에 살고 있다. 이게 지금 우리 문화가 가진 한계가 아닐까.

정인기_김보라 감독도 처음에 시나리오를 돌리면서 투자를 못 받은 시간들이 오래 지속됐다. 상업적으로 성공할 수 없는 작품이라는 판단을 내린 걸 텐데, 관객은 거기서 다른 가치를 찾아준 거다.

이승연_집 베란다에서 잡초를 키우는데, 그 꽃들이 매해 알아서 들꽃을 피운다. 그게 나는 우리 독립영화가 살아나는 움직임과 비슷하다 싶다. 잡초는 메인인 식물의 영양분을 뺏는다고 하고 버려져야 한다고 하지만 나는 그 들꽃이 메인이고 얼마나 예쁜지 모른다.

-그간 독립영화에 참여하면서 어려운 현실을 누구보다 체감해왔고, 또 개선하는 데 세 배우의 역할이 컸다. 세 배우의 인연을 거슬러 올라가보면 양익준 감독의 <똥파리>가 있다. 양익준 감독이 연기한 상훈의 누나(이승연)로, 연희(김꽃비)의 엄마(길해연)로, 반지하에 사는 아빠(정인기)로 마주하지 않고 ‘각각’ 출연했다. (웃음)

정인기_그땐 다 같이 안 찍어서 같은 작품을 하고 있는지 몰랐다. 그 작품은 지금 다시 봐도, 정말 많은 독립영화 배우들이 나왔다. 양익준 감독이 <똥파리> 찍기 전 그때 내가 단편영화에 한창 출연할 때였는데 <씨네21>에서 ‘독립영화를 사랑한 배우들’이라는 특집으로 인터뷰를 했었다. 맹봉학, 고서희, 양익준, 양은용, 나, 이렇게. 그때 양익준 감독을 알게 됐는데 어느 날 같이 작품 하나 하자고 연락이 왔다.

길해연_그때까지 나는 연극만 해오다가 장편영화는 <마파도>(2005)가 처음이었고, 지금 단편영화의 교본같이 언급되는 김보정 감독의 <생리해서 좋은 날>(2005)도 그때 찍었다. 어느 날 양익준 감독이 ‘선배님, 저 만나뵙고 싶었습니다’ 하고 연락이 왔다. 잘 모르는 사이였는데, 만나자마자 술 마시면서 한참을 이야기했다. (웃음) 정말 힘들게 찍은 작품이다. 동네 주민이 촬영 중 시비를 걸어서 경찰서에도 갔는데, 당시 다들 돈이 없었다. 그래서 촬영장 옆 맥도날드에 앉아 이걸 어떻게 해결할까 머리를 맞대고 고민했던 기억이 생생하다.

이승연_양익준 감독님과는 김종관 감독의 <낙원>(2005)에서 배우로 만났다. 메인 촬영장소가 감독님 방이었는데, 영화 찍고 방을 뺐다. 돈이 없어서. 스탭들도 중간에 하차하고, 찍다가 중단도 되고, 참 어렵게 찍었다.

-<똥파리>가 극영화 12만 관객을 동원하며 한국 독립 극영화의 흥행사를 쓰기도 했는데 그로부터 10여년이 지났는데 아직까지 그 스코어가 깨진 게 몇 번 되지 않는다. 지금 일어난 기대와 바람 한켠으로, 늘 독립영화를 선택하고 작업하면서 배우의 입장에서 한계를 많이 체감해왔을 것 같다.

이승연_올해 무주산골영화제에서 양익준 감독과 <벌새>팀이 같이 밥을 먹으면서, 이 기록만 깨면 된다 이야기를 나눴었다. (웃음)

정인기_독립영화, 저예산영화 제안을 받고 하지 않은 작품이 꽤 많다. 열심히 하면 뭘 하나 극장에 걸어줘야지. 그래야 내가 혼신의 연기를 한 걸 사람들이 볼 수 있지 싶은 거다. 지난해 <죄 많은 소녀>(2018)나 또 <돌연변이>(2015) 같은 작품도 호평에 비해 좋은 결과로 이어지지 않았다. 사라진 작품들은 더 많다. 목요일에 개봉하고 토요일이면 상영관이 빠지고 상업영화가 그 자리를 차지한다. 신인감독들은 열의가 넘쳐서 캐스팅 제안을 해주는데 배우로서 너무 고마운 일이지만 찍으면 찍을수록 현실의 벽을 체감한다.

이승연_지금의 호응이 잘 살아나면 훌륭한 작품을 만들 수 있는 친구들이 너무 많다. 독립영화의 부흥기가 다시 올 수 있다. 똑같은 트렌드의 작품만 나오는 게 아니라 다양한 색깔의 작품들이 나올 수 있다. 어쩌면 암흑기에 <벌새>가 이대로는 안 된다, 브레이크를 한번 딱 건 건데 이 기회를 그냥 흘려보내지 말고 잘 활용해야 한다.

정인기_저예산으로 만들어서 많은 사람이 보려면 결국 작품 자체가 사람의 마음을 움직이는 뭔가가 있어야 한다. 나도 만드는 사람으로서 이 부분에 대한 고민을 많이 하는 시기다.

길해연_그런 면에서 창작자들이 엄살을 떨기 시작하면 관객에게 외면받는 것 같다. 연극하면서 좀 답답하게 느낀 건 연극배우들이 힘들다는 이야기를 좀 하지 말았으면 하는 거다. 힘든 이야기는 소위 말해 잘된 사람들의 미담 같은 건데, 지금은 연극을 하는 게 가난의 대명사처럼 돼버렸다. 이 이야기가 앞서니 정작 연극 행위가 어떤 가치를 갖고 있는지 논하는 기회는 점점 줄어든다. 문화적 토양과 기반을 사회가 쌓아올리는 거에 대해서는 더 깊은 연구와 노력이 필요하다. 우리 힘드니 어떻게 해달라 이런 걸로는 바뀌지 않을 거고, 좀더 길게 보는 시각에서의 논의가 마련되어야 한다. 그 토대 안에서 자유로운 것, 창의적인 것들이 나올 수 있다.

배우 정인기.

정인기_요즘 <벌새>로 영화제에 자주 초청받고 있다. 지난해 서울독립영화제 때 오석근 영화진흥위원회 위원장님이 독립영화 열심히 지원하겠다 약속도 하셨으니 그 말에 좀 희망을 걸어본다. (웃음) 얼마 전부터 100억원 규모의 상업영화만 만들어지고 독립영화 등 저예산영화가 만들어지지 않는 상황이 우려스럽다. 30억~40억원 예산의 영화가 많이 만들어져야 우리 같은 배우들도 참여할 기회가 주어지는데 큰 규모의 작품은 단역도 다 특급 스타가 들어간다. 특별출연이라는 이름으로. (웃음) 꾸준히 연기하는 조연배우들이 점점 영화배우로 살기 힘든 세상으로 가고 있다. 그래서 <벌새>가 더더욱 자랑스럽다. <벌새>에 참여한 배우들은 오랫동안 독립영화에서 활동해온 사람들이라 이 성과가 더 값지게 느껴진다.

-연출자들이 관심있어 하는 질문, 영화적인 감각이 많이 달라지고 있다. 세 배우 역시 그 새로움을 누구보다 빨리 감지하고, 또 적응해야 하는 위치에 있다.

이승연_확실히 달라지고 있는 걸 느낀다. 예전 같으면 서사, 내가 어떤 이야기를 하고 싶다는 생각이 강했다면 요즘은 좀 과감하고 감각적인 시도들이 많이 보인다. 사람들이 이걸 알아들을까 이런 것에 대해 너무 깊게 빠지는 대신, 오히려 치고 나가는 전개도 많이 보인다. 그게 이 세대가 만드는 영화의 힘으로 보인다.

길해연_대학에서 꽤 오래 강의를 해왔다. 연출 전공하는 친구들이 수업을 들으러 오는데 그들과 대화를 하는 게 너무 즐겁다. 예전에는 선배가 이야기하면, “알겠습니다” 하지 않았나. 그런데 지금은 ‘서사구조가 맞지 않아’라고 지적하면, ‘난 이렇게 갈 거야’라고 맞받아친다. (웃음) 다들 자기 방식을 확고하게 표현할 줄 안다. 배우에게는 그런 것들이 모두 자극이 된다. 연기 스타일도 시대에 따라 바뀐다. 진정성이라는 걸 기본으로 하고 있지만 이 세대가 보는 진짜는 또 다르다. 그것들을 마음으로 이해하지 않으면 배우도 힘들다. 옛날에 배웠던 것만 고수하고 ‘난 이게 진짜야’라고 하는 순간, 이들이 만드는 구조에서 어긋나게 된다. 새로운 감독들을 만나서 그 형식 안에서 어떻게 내가 연기할 것인가 고민해야 한다. 그 소통이 없다면 결국 아무것도 아닌 게 되는 것 같다.

이승연_선배님만큼 발이 넓은 분이 없다. 필모그래피 하나하나가 다 열려 있다는 걸 보여준다. 해왔던 것에만 집착하면 다양한 걸 할 수 없는데, 늘 재밌잖아 하면서 도전한다. 나 역시 그런 지점을 놓치지 않으려고 노력을 많이 한다.

정인기_최근 클린트 이스트우드의 <라스트 미션>을 감명깊게 봤다. 나도 나이 먹으면서 이 배우처럼 늙어가야겠다 하는 결심이 서더라. 돈 되는 영화만 하는 게 아니라 시나리오가 좋고 내 마음을 움직이는 작품이라면 다 해야겠다는 마음으로 살아야겠다. <똥파리>부터 <죄 많은 소녀>에 이르기까지 탄탄한 시나리오와 좋은 작품들에 참여한 기억들을 돌아보면, 배우들은 누구나 그런 작품을 만나고 싶어 한다. 그런 운이 앞으로도 많이 따르길 바란다.

길해연_황인뢰 감독이 연출하는 <미저리> 공연을 하는데, 두 시간 동안 혼자 방방 뛰어다닌다. 다들, 저 나이의, 여배우가! 호응해주셨다. 물론 힘들다. 그런데 우린 얼마든지 할 수 있다. 연극이라서 이런 역할을 맡는 게 가능하다고 하지만 난 어느 분야에서든 가능해지길 바란다. <벌새>를 살려내는 게 관객인 것처럼, 그 관객과 다양한 콘텐츠를 주고받아야 하고 그러기 위해서 배우들도 다양한 색깔을 가지고 가야 한다. 그걸 지켜내는 게 너무 힘든 일이라 이렇게 연극도 영화도 TV도 어디든 마다않고 가게 된다.

이승연_왜 프랑스 여배우들은 나이가 들어도 매력적인가, 그런 이야기들을 하는 걸 보면서 많은 생각을 하게 된다.

길해연_그 모습을 자꾸 보여주니까 가능해지는 거다. 일전에 한 작가가 TV드라마에서 이제는 더이상 부모, 할머니가 나오는 건 사라질 거라고 하더라. 제작사도, 시청자도 싫어한다고. 부모, 어른들이 나오면 고리타분한 이야기만 해서 더이상 보기 싫다는 거다.

정인기_나도 아버지 역할을 많이 했는데, 요즘은 그래도 좀 벗어나고 있다. (웃음) 드라마 <시크릿 가든>에서 길라임 아버지 역할을 하고 나서는 그런 이미지가 생긴 것 같다. 나는 그 드라마에서 분량상으로는 그렇게 많이 나오지 않는데. (웃음)

이승연_<벌새>를 하면서 요즘 많이 듣는 이야기가, 이 영화에 나오는 배우들이 하나하나 캐릭터가 있고 너무 좋다는 거였다. 엄마, 아빠 역할도 그냥 평면적인 것에 머무르지 않았으면. 은희 엄마로서 뿐만 아니라 한 여성으로서도 의미 있는 캐릭터였으면, 감독님의 어머니가 볼 때 자신이 살아왔던 삶 속의 어떤 여자가 보여지기를 바라며 그렇게 표현하려 한 게 결실을 맺은 것 같다.

-한국 독립영화계에서 아빠, 엄마, 누나 역 전문, 베테랑 배우가 만난 역사적인 자리다. (웃음) 오늘 가족 특집으로 이렇게 만나서 속깊은 이야기를 듣는 시간이 너무 즐겁고 의미 있다.

길해연_난 <벌새>에서 한 것도 없는데 오늘 와서 무슨 이야기를 하나 감독님께 그랬는데. (웃음) 이렇게 모여서 이야기를 하니 할 이야기가 정말 많구나, 더 해야겠구나, 라는 생각이 든다.

정인기_할 이야기는 너무 많고 지금부터 시작인 것 같은데, 지금 끝나는 건가. (웃음) 조촐하게 10만 파티라도 하면서 더 많은 이야기를 나누고 싶다.

관련영화

관련인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