컨텐츠 바로가기[Skip to contents]
HOME > Magazine > 스페셜 > 스페셜2
노아 바움백 감독의 넷플릭스 오리지널 영화 <결혼 이야기>
김소미 2019-11-28

결혼만큼 아름다운 이혼의 경치

솔직히 말하면 노아 바움백 감독의 영화를 ‘걸작’이라고 부르고 싶어지는 날이 올 줄은 몰랐다. <아이리시맨>에 이은 올해 넷플릭스 오리지널 최대 기대작이었던 <결혼 이야기>는 그래서 감탄과 반성을 동시에 자아내는 마스터피스다. 무척 자연스럽고 현실적인 장면을 해체하면, 그 안에 정교하고 치밀한 구조도가 숨어 있는 경지로 노아 바움백이 나아가고 있다. 여기에 미국 아트하우스 영화의 화신이 되어가고 있는 배우 애덤 드라이버와 필모그래피 내 최고의 연기를 선보인 스칼렛 요한슨의 만남이 <결혼 이야기> 관람을 생생한 흥분으로 이끈다. 가족과 결혼이라는 테마를 반복하고 변주해온 바움백은 스스로 어떻게 진화했나. 그리고 <결혼 이야기>는 과거의 영화 유산으로부터 어떤 영감을 받았나. 11월 27일 한국 극장에서 개봉한 뒤 12월 넷플릭스에서 릴리스되는 <결혼 이야기>의 매력과 모티브를 정리해봤다.

<결혼 이야기>는 사실 이혼 이야기다. 연극 연출가 찰리(애덤 드라이버)와 배우 니콜(스칼렛 요한슨) 부부는 아들 헨리와 뉴욕에 산다. 연애와 결혼, 임신과 출산, 점점 격차가 벌어지는 남녀의 커리어 곡선을 마주하게 된 두 사람은 뉴욕에 사는 예술가 부부의 특수성만큼이나 여느 부부들이 겪는 만연한 위기를 겪고 있다. 익숙함은 무심함으로, 갈등은 싫증으로 변모한 관계. 불쑥 솟아나는 상대의 섬뜩하고도 치명적인 악의를 확인하면서도, 머리가 알리는 위기 신호와 달리 몸과 마음은 여전히 애정에 고착된 상태라 혼란스럽다. <결혼 이야기>의 경우 여러 동료들에 둘러싸여 상대적으로 더 바쁘고 주목받는 삶을 살고 있는 찰리로부터 니콜이 돌이킬 수 없는 상처를 확인하면서 파경 여로가 확정된다. 도화선에 불이 붙은 것은 니콜이 찰리의 불륜 사실을 알게 되면서부터다. LA출신 니콜이 고향으로 돌아가 배우 생활의 전환점을 갖기로 결심하고, 부부가 아들 헨리의 양육권을 다투게 되면서 그렇게 뉴욕과 LA를 잇는 멀고 지난한 이혼 소송이 시작된다.

한집에서 살아가는 동안 찰리가 자연스레 우위를 점했다면, 이혼 과정 초기에는 먼저 소송을 결심한 니콜이 유리한 위치를 점한다. 서로 모른척하지만, 관계의 시소는 감정적으로나 이해관계 면에서나 매번 너무 투명한 나머지 극중 인물과 관객 모두에게 자잘한 고통을 안긴다. 언제나 누군가는 좀더 잔혹해지고 누군가는 좀더 상처를 받는다. <결혼 이야기> 속 두 사람은 뒤엉킨 삶의 고리를 끊어내는 매우 개인적이고 감정적인 작업과, 양육권자로서의 우수함을 가리기 위해 서로의 잘잘못을 들춰내는 사법제도의 지시를 동시에 따라야 한다. 여기서 이런 질문이 붙을 법하다. 이 영화의 제목은 왜 디보스(divorce) 스토리가 아니라 메리지(marriage) 스토리가 되었을까. 말장난 같지만 이혼은 그 기간을 끝까지 통과하기 전까지는 여전히 결혼을 지속하는 활동이기 때문이다. 노아 바움백 감독의 표현을 빌리자면 <결혼 이야기>의 드라마는 “낮에는 법정에서 싸우다 밤에는 아들의 숙제를 봐줘야 하는” 광경 속에서 탄생한다.

베리만의 시선과 루비치의 코미디

노아 바움백 영화엔 두 갈래가 있다. 하나는 <프란시스 하> <미스트리스 아메리카> 같은 청춘의 정체성 찾기 영화이고, 또 하나는 <오징어와 고래> <마고 앳 더 웨딩> <위아영> <더 마이어로위츠 스토리스> 등으로 꾸준히 이어진 가족과 결혼생활의 풍경이다. 그가 각본을 쓴 애니메이션 <판타스틱 Mr. 폭스>조차 아이를 기르는 부부 여우의 이야기였다. 창작자에게 천착할 만한 컨셉과 주제가 있다는 것은 대개 축복일 터다. 특히 <결혼 이야기>의 사례는 작가가 자기 궤적을 계승하고 스스로 확장하는 좋은 예시를 보여준다. 그의 초기 대표작인 <오징어와 고래>(2005)가 부부의 이혼을 자녀의 시점에서 다룬 이후 <결혼 이야기>에 이르러 같은 주제를 어른의 숙제로 집약했다는 점에서 바움백의 긴 탐험 하나가 마무리된 것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감독이 이제는 새로운 주제로 나아가지 않을까 하는 이른 추측도 가능해진다.

바움백은 배우 스칼렛 요한슨, 로라 던, 그리고 자신의 이혼 경험을 작품에 반영했고 무수한 ‘여자 친구들’의 입장을 들었으며 잉마르 베리만, 에른스트 루비치, 장 르누아르 등 선배 영화들의 영혼에도 귀를 기울였다. 우선 잉마르 베리만의 <페르소나>(1966)의 카메라에서 깊은 인상을 받고 1.66:1의 화면에 배우들의 얼굴을 클로즈업으로 담아냈다. 대개 답답한 방 안에서 싸우는 부부의 정서적 거리를 표현하는 데 있어서도, 두개의 자아가 집합과 대치를 이루는 <페르소나>의 프레임 구성이 적절한 레퍼런스였을 것이다. 정서적으로는 당연히 베리만의 <결혼의 풍경>(1973)의 현대 미국식 버전이라 할 수도 있다. 가족의 실내 생활을 담는 일상 장면에서는 <화니와 알렉산더>(1982)의 숏들을 오마주한 장면도 일부 눈에 띈다. 그러나 무엇보다 <결혼 이야기>에서 베리만의 흔적을 찾게 되는 지점은 노아 바움백이 침묵의 리듬감을 고려하는 작가가 되었다는 사실이다. <결혼 이야기>의 러닝타임은 137분으로 마틴 스코시즈 같은 감독에 비하면 대단히 평이한 길이지만, 바움백 자신에게는 이번 영화가 최장 시간이다. 역시 넷플릭스 오리지널인 전작 <더 마이어 로위츠 스토리스>(2018) 또한 이와 비슷한 러닝타임을 지닌다. 짧게는 80분, 대개 100분 내에서 마무리되던 그의 영화가 최근 길어진 데에는 인물의 무거운 침묵이나 남몰래 흘리는 눈물과 같은, 잉여의 감정과 서사를 더욱 폭넓게 끌어안으려는 포부가 깃들어 있다.

상징적이게도 찰리와 니콜의 이혼 스토리는 전쟁영화에서 촉발됐다. 바로 장 르누아르의 <위대한 환상>(1937)이다. 이 영화의 첫 장면, 프랑스가 독일 영토를 공격하고 있는 첨예한 전시 상황 와중에 독일군이 프랑스군을 식사에 초대해 평화로운 오찬을 가진다. <결혼 이야기>에는 이를 슬며시 오마주한 듯한, 감정적으로 훨씬 더 가슴 아픈 장면이 하나 있다. LA 법원의 미팅룸에서 니콜과 찰리가 변호사들과 마주 앉아 대치하는 신이다. 베테랑 이혼 전문 변호사들은 서로 팽팽한 접전을 펼치다 말고 갑자기 사람 좋은 얼굴로 런치 타임을 갖자고 합의를 본다. 때가 되었으니 밥은 먹고 하자는 상식적인 제안이지만, 예상치 못한 지점까지 서로의 치부를 긁게 된 부부에게 태연히 음식이 넘어갈 리 없다. 직전까지 부부의 발언권을 대리해 상황을 주도했던 변호사들이 철저한 비즈니스 상황임을 은연중에 공표한 상황, 찰리와 니콜은 그제야 이 전쟁의 주인공이 바로 자신들이라는 사실을 깨닫는다. 막대한 감정과 시간, 그리고 돈을 잃는 것은 오직 그들 자신뿐이다. 찰리 대 니콜, 변호사 대 변호사로 테이블을 사이에 두고 형성되었던 전선이 부부 대 변호사로 일순 90도 꺾이는 이 장면에서 두 배우의 얼굴은 벌겋게 상기된 채 미세하게 떨리고 있다. 얼빠진 찰리가 메뉴판을 제대로 읽지 못하고 횡설수설하자 맞은편에서 이를 안타깝게 지켜보던 니콜은 찰리의 입맛에 꼭 맞게 대신 메뉴를 결정해준다.

장르적인 관점에서도 <결혼 이야기>는 풍성하다. 이 영화에 달콤함과 비극성을 교차시키는 힘은 복합 장르의 특성을 노련하게 이끄는 솜씨로부터 나온다. 영화는 <크레이머 대 크레이머>(1979)를 떠올리게 하는 차분한 할리우드표 가족(이혼) 드라마이면서, 여전히 낭만성을 잃지 않은 멜로드라마이고, 냉담한 법정물이다. 애덤 드라이버와 스칼렛 요한슨이 각기 노래를 부르는 장면에선 그 순간에 도달하기까지의 유려한 세트피스 구성에 힘입어 마치 뮤지컬영화를 보는 것 같은 착각을 일으키기도 한다. LA의 니콜 집에서 그녀의 쾌활한 가족들이 등장하는 구간은 에른스트 루비치와 하워드 혹스 감독에게서 영향받은 스크루볼 코미디 장르가 빛나는 기지를 발휘한다. 아마도 영화를 다 보고나면 니콜과 찰리만큼이나 그들의 가족을, 그들의 극단 사람들을 사랑하게 될 것이다. 시끌벅적하게 일상의 공간을 채우는 부부의 주변 사람들은, 섬세한 블로킹을 따라 쉼없이 이동하며, 여기저기서 대사를 겹쳐놓아 기분 좋은 정신없음을 만든다. 그리고 그런 와중에야 영화는 종종 걷잡을 수 없이 슬퍼진다. <결혼 이야기>에서 슬랩스틱까지 더해 대놓고 관객을 웃기기로 작정한 한 장면은, 찰리가 니콜이 준비한 이혼 서류를 발견하기 직전에 벌어진다. 스크루볼 코미디가 대사의 주고받음에 있어 일말의 연극성을 담보로 한다면, <결혼 이야기>에서는 주인공 부부가 연극계 사람들이라는 점이 더해져, 이들이 마치 현실에서도 연극조를 버리지 못한 게 아닌가 싶은 이중의 코미디까지 발생한다. 미국 인디영화의 태도에 근거한 노아 바움백은 소탈한 리얼리즘을 유지하면서도 갖가지 장르적 활기를 끌어와 영화의 역동성을 시험한다. 너무나 미국적인, 그리고 지극히 개인적인 부부의 스토리가 절절히 공감할 만한 결혼의 풍경이 되는 과정은 바로 이 영화적 유려함에 근거하고 있다.

올해의 배우들

<결혼 이야기>에는 잊을 수 없는 독백 장면이 있다. 변호사 노라(로라던)가 자신의 사무실을 찾아온 니콜에게 취재와 심리 상담을 겸한 이런저런 질문을 더하자, 니콜이 갑자기 방언이 트이듯 자신의 잃어버린 세월을 쏟아낸다. 캄캄한 무대 위에 홀로 선 배우 위로 눈부신 스포트라이트 조명이 켜지는 것과 같은 순간이다. 숏을 끊지 않고 단숨에 전개되는 이 강력한 독백 장면은 사랑의 마력과 절대성이 여성의 경우에는 어떻게 쉽게 가스라이팅으로 변질되는지, 혹은 애초에 사랑과 가스라이팅은 뗄 수 없는 무엇이 아닌지를 애절하게 토로한다. 두서없고 감정적인 자기 서사를 발설한 끝에 니콜은 그동안 자신이 잃어버린 것은 무엇인지, 비틀린 부분은 어느 지점인지 스스로 감지할 수 있게 된다. 관객에게 카타르시스를 자아낼 뿐 아니라 니콜 자신에게도 대단한 해소와 결심의 모멘텀으로 자리하는 이 장면 하나만으로 스칼렛 요한슨은 올해의 배우가 될 만하다. 미리 설계된 동선을 따라 노라의 사무실을 배회하는 배우는 관객의 시야에서 잠시 사라졌다 다시 등장할 때마다 종전과 전혀 다른 얼굴을 보여준다.

노아 바움백의 오랜 친구인 로라 던은 이번 영화에서 감독과 첫 작품 호흡을 맞추면서 기량을 마음껏 과시한다. 유능하고 부유하며 자기 표현력이 뛰어난 이혼 전문 변호사 노라는 로라 던이 출연한 <HBO> 드라마 <빅 리틀 라이즈>의 캐릭터를 반쯤 패러디한 결과물이다. 대체로 코믹한 방식으로 의도된 것 같다가도, 이혼 전문 변호사라는 직업적 특성으로 인해 노라는 묘한 불신과 긴장감을 자아내는 주체다. 그녀를 온전히 믿어야 할지, 아니면 조금 거리를 두어야 할지 고민하게 되는 행간에 처할 때마다 로라 던은 끝까지 진심인지 직업적 수완인지 구분하기 힘든 모호함을 남긴다. 동시에 특유의 긴 팔다리로 호쾌한 제스처를 취하며 거부할 수 없는 유머들을 뿜어낸다. 감독의 표현에 따르면 “하루 종일 볼 수도 있을 것 같은” 연기다. 시원하다 못해 약간은 경망스럽게까지 느껴지는 노라의 박력 넘치는 애티튜드는 결정적인 순간에 누군가를 온건히 수용하거나 격려함으로써 끝내 미더워진다.

한편 애덤 드라이버는 이번 영화에서 드물게 노래를 완창하는 모습을 보여준다. 그가 동료들 앞에서 갑자기 결혼생활을 다룬 뮤지컬 <컴퍼니>의 <Being Alive>를 부르는 장면은, 이혼 과정의 두려움과 피로에 시달리던 찰리가 일상의 균형을 놓치기 시작했음이 분명한 시점에 제동을 걸 듯 등장한다. 니콜의 독백과 마찬가지로 찰리가 스스로 바로 서는 순간이다. 이 순간 뉴욕 그리니치 빌리지의 레스토랑 무대 위에는 잠시간 완연한 고전 뮤지컬영화의 필치가 감돈다. 리드미컬한 숏의 구성과 더불어 애덤 드라이버의 마력이 잘 발현된 경우다. <돈키호테를 죽인 사나이>(2018), <데드 돈 다이>(2019)에서 현실과 환상(허구) 사이를 태연하게 오간 적 있는 애덤 드라이버에겐 짧은 장면에 잠시 뮤지컬의 기운을 불어넣는 일쯤이야 별로 대수롭지 않은 것일지도 모른다. 노아 바움백은 배우 스칼렛 요한슨과 애덤 드라이버의 두 가지 결정적 순간을 모두 슬로 돌리 카메라로 처리해, 부부의 마법에서 풀려난 개인들이 점진적으로 자기 내면의 중심에 진입하는 모습을 표식했다.

관련영화

관련인물

사진 넷플릭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