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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년 주목받은 신진 여성 상업영화 감독 3인의 연말 결산 토크 <돈> 박누리 감독•<생일> 이종언 감독•<82년생 김지영> 김도영 감독, “몇년 후에는 여성감독 대담을 안 해도 되지 않을까?”
임수연 사진 최성열 2020-03-12

김도영, 이종언, 박누리 감독(왼쪽부터).

갈 길이 멀지만, 느리게나마 균형추가 맞춰지는 길목에 선 상징적인 해였다. 2014년부터 2018년까지 상업영화 평균 개봉작 76편 중 여성감독이 연출한 작품은 7.9%에 불과했지만 2019년은 한국영화 흥행 순위 10위권 중 네 작품이 여성감독의 연출작인 반전의 해였다. <82년생 김지영>(367만명), <>(338만명), <가장 보통의 연애>(292만명), <말모이>(281만명)의 스코어는 역대 여성감독 흥행 순위 3, 4, 6, 7위에 해당하며, 모두 감독의 첫 장편영화라는 점에서 충무로의 미래까지 기대케 한다(이상 영화진흥위원회 통합전산망 12월 18일 기준). 또한 한국영화평론가협회상 ‘영평 10선’, 부일영화상 여우주연상, 올해의 여성영화인상 각본상 등을 받으며 여성감독이 연출한 상업영화 중 올해 시상식에 가장 자주 소환된 <생일>은 이창동 감독의 연출부를 거친 이종언 감독의 데뷔작이다. 한국영화계의 기념비적인 한해를 장식한 주인공들을 한자리에 모아 데뷔 스토리부터 각자의 경험을 공유하는 시간을 마련했다. <>의 박누리 감독, <생일>의 이종언 감독, <82년생 김지영>의 김도영 감독은 서로 얼굴을 본 적은 없지만 예전부터 서로에게 호기심을 갖고 있었다며 기꺼이 참석에 응했다. <생일> 개봉을 준비하던 당시 이종언 감독은 <82년생 김지영>의 크랭크인 소식을 전해 들으며 작품을 기다렸고, 박누리 감독은 <생일> 시나리오까지 미리 구해 읽을 만큼 영화를 궁금해했으며, 배우 출신인 김도영 감독은 <>을 보며 배우의 액팅을 탁월하게 보여준 감독에게 감탄했다고 전했다. 세 감독은 대담이 끝난 즉시 휴대전화번호부터 교환하며 대담보다 긴 뒤풀이로 훈훈한 시간을 보냈다. 이 대담은 <씨네21>이 2019년을 결산하고 2020년을 맞이하며 마련한 라운드테이블 중 첫 번째 자리이기도 하다. 앞으로 <씨네21>이 주선할 영화인들의 만남은 한국영화의 현재와 미래를 읽을 수 있는 중요한 자리가 될 것이다.

-세분은 올해 첫 장편 상업영화를 만들었고 그 결과물도 다양한 측면에서 만족스러운 평가를 받았다. 오늘 이 자리에 어떤 점을 기대하고 왔나.

=김도영_친구를 만들었으면 좋겠다. 영화계에 들어온 지 얼마 되지도 않았지만 동료 여자감독들을 잘 모른다. 나중에 속깊은 이야기까지 할 수 있는 관계가 되면 좋겠다. 우리가 각자의 경험을 나누고 그렇게 나눈 이야기를 누군가가 기사로 읽을 수 있다면 좋지 않을까. 미리 알 수 있다면 좋을 이야기를 잘 공유하고 싶다.

=이종언_비슷한 마음이다. 동료 여자감독들과 이야기할 기회가 별로 없었다. 다들 비슷한 경험이 있었을 테니 친구처럼 편하게 얘기할 수 있을 것 같다.

=박누리_나도 같은 생각이다. 알게 모르게 같은 여성감독의 작품이 개봉할 때 가깝게 느껴지고 응원하고픈 마음이 있었다. 이렇게 직접 만나서 친해지면 더 좋을 것 같다는 기대감으로 왔다.

김도영_얘기하다보니 뭔가 외로운 사람들이 모인 것 같네. (웃음)

-첫 장편영화 개봉을 준비하고 관객을 만나기까지 정신없는 한해를 보냈을 것 같다. 그에 대한 소회를 듣고 싶다.

김도영_올해 어떻게 달렸는지 정신이 하나도 없고 남의 일 같은 느낌마저 든다. 잘돼서 좋다기보다는 제작사나 함께한 많은 분들에게 특별히 폐를 많이 끼치지 않아 다행이라는 안도감이 더 크다. 1월부터 4월까지 영화를 찍고, 끝나자마자 미친 듯이 후반작업한 후 개봉까지 했다. 겨우 숨돌린 지 2~3주밖에 안됐다. 육아를 도와준 가족이 없었으면 절대 할 수 없었을 일이다. 사실은 지금도 완전히 일상을 회복하지 못했다. 한국예술종합학교 전문사 과정을 시작하면서부터 너무 달리기만 했다. 어떤 터널에 들어가서 1년 동안 하드한 교육을 받은 것 같다. 경험해본 적 없던 일을 계속 겪느라 정신이 없었지만 동시에 굉장한 보람이 있었다. 앞으로 다른 영화를 찍는다 해도 이 모든 과정을 처음 경험한 2019년은 영원히 기억에 남을 것 같다.

이종언_2018년 1월부터 프리 프로덕션을 시작해서 4월부터 7월까지 촬영했고, 지난해 가을에 편집을 끝냈다. 올해 4월 초 개봉하고부터 시간이 꽤 많이 지나서 한 템포 쉬면서 시간을 보냈다. 뭐라도 쓰고 싶어서 책도 읽고, 그러다 한참 멍때리고. (웃음) 어제는 여성영화인축제에 참석했다. 정유미 배우가 연기상을 받았는데 그게 굉장히 의미 있더라. <82년생 김지영>의 의미와 여성영화인모임의 성격, 모든 게 잘 맞아떨어져 더 좋았다.

박누리_2015년에 <> 시나리오를 썼고 촬영은 2017년에 했다. 후반작업부터 좋은 개봉 시기를 잡기 위해 기다린 시간이 1년 반 정도 됐고, 올해 3월에 개봉했다. 5년 넘게 주야장천 <>이라는 작품만 생각한 거다. 영화가 극장에서 내리기 직전 마지막 모습을 차마 볼 수 없을 것 같아서 비행기 티켓을 끊어 계획도 세우지 않고 여행을 떠났다. <베를린>(2012) 조감독을 할 때 베를린 현지에서 오래 생활했는데 일만 하느라 클럽도 못 가고 논 적이 없어서 왠지 그곳에 다시 가고 싶다는 생각이 들더라. 그렇게 한달 정도 놀았는데 한국에 돌아와서도 마음이 잡히지 않아 놀고, 그리고 또 놀고, 생애 첫 가족여행도 갔다오고. 그렇게 올해는 원 없이 놀았다. 놀다보니 어느덧 연말이 됐다. 새해부터는 정말 일을 해야겠다. (웃음)

성별이 아닌 연출의 힘!

-세분 모두 각자의 작품 소식을 제작 단계부터 접하며 궁금해한 것으로 안다. 서로의 작품을 어떻게 봤는지도 듣고 싶다.

이종언_<>은 개봉 당시 극장에서 봤다. 배우들도 너무 좋지만, 한 템포도 쉬지 않고 몰입감 있게 쭉 이끌어가는 박누리 감독님의 연출이 기억에 남았다. 내가 그런 능력을 좋아도 하고 부러워도 한다. 여성감독 작품이라는 걸 알고 봤는데도 성별을 떠나 연출이 굉장히 힘 있다는 생각을 했다.

김도영_나 역시 그게 참 인상적이었다. 흔히 여성감독에 대해 갖고 있는 편견이 있지 않나. 부드럽고 섬세하다는 선입견과 전혀 다른 결을 긴장감 있게 밀고 나가는 즐거운 쾌감이 있었다. 그리고 배우! 류준열씨는 다른 데서도 좋았지만 <>에서는 정말 깜짝 놀랐다. ‘어, 잘하잖아?’ (웃음)

박누리_닭살이 돋는다. 지금 기분이 너무 좋다. 윤종빈 감독님이 <>의 원작 소설 판권을 샀다. 사나이픽처스에서 다른 작품을 준비하며 한재덕 대표님을 귀찮게 했더니, 이거 어떠냐며 <>의 원작 소설을 한번 읽어보라고 건네주더라. 책을 받은 당일에 한 호흡으로 완독하고 하고 싶다고 했다.

이종언_왜 사람은 자기가 가지지 못한 것을 부러워할까. 내가 가지지 못한 것을 박누리 감독이 갖고 있는 것 같다. 나도 저런 거 하고 싶은데. (웃음)

박누리_반대로 난 두분의 영화를 보며 너무 부러웠다. 인물의 감정을 아주 섬세하게, 서정적인 숏에 담아내 생각할 수 있는 여지를 준다. 나도 그런 거 하고 싶었는데~! (웃음) 가령 <생일>에서 고등어 굽는 인서트숏은 그 자체로 아이를 잃은 순남(전도연)의 감정을 보여주지 않나. 그런 디테일에 완전히 반했다. 생선 굽는 장면 하나도 고민하고 연출하는 이종언 감독님의 재능이 무척 부러웠다. <82년생 김지영>은 주인공뿐만 아니라 주변 캐릭터 하나하나의 감정을 놓치지 않고 보여준다. 개인적으로는 김 팀장(박상연)에게 너무 몰입하며 봤다. 회의실에서 여자는 어쩌니 하는 말을 들을 때 웃음으로 넘기는 신이 너무 슬펐다.

김도영 감독.

김도영_<생일>은 시작한 지 5분 지나고부터 울기 시작해서, 그냥 계속 울다가… 그렇게 울다가 깨어났던 기억이 있다. 그게 오리지널 시나리오여서 놀라웠다. ‘어떤 일을 겪었기에 이런 글을 쓸 수 있지?’ 여러 가지 생각이 들더라. 감정을 건드리는 지점이 많은데, 또 되게 잔잔했다. 무언가를 더 하려고 하지 않아서 많은 생각이 들게 한 작품이다. 사실 <생일>에 대해서는 생각을 하면 안된다. 떠올리기만 해도 눈물이 나서…. (잠시 울컥)

박누리_이종언 감독님에게는 비밀이었는데, 사실 작품이 너무 궁금해서 <생일> 시나리오를 미리 구해서 읽었다. 너무 많이 울어서 이십 몇 페이지 읽을 때쯤 책을 덮었다. 더이상 읽을 수가 없더라. 뒷부분은 나중에 영화가 나오고 나서 겨우 봤다.

-각자 입봉을 하기까지의 스토리도 궁금하다. 먼저 박누리 감독은 <부당거래>(2009)의 스크립터, <베를린>과 <남자가 사랑할 때>(2013)의 조감독을 거쳐 사나이픽처스에서 첫 장편영화를 만들었다. 사나이픽처스에는 유능한 여성 영화인들이 많지만, 사정을 모르는 분들은 저런 마초적인 이름을 가진 제작사가 여성감독을 데뷔시켰다며 신기하게 생각하기도 한다. (웃음)

박누리_실제로 어떻게 사나이픽처스에서 여자감독이 나왔냐며 궁금해하는 분들이 많았는데, 굉장히 자연스럽게 데뷔했다. <부당거래>의 스크립터를 맡으며 한재덕 대표님과 인연을 맺었고, <부당거래>의 한동욱 조감독이 연출한 <남자가 사랑할 때>의 조감독을 했다. <>의 박민정 프로듀서도 <부당거래> 때부터 함께했다. 다만 다수의 남자 스탭들과 함께 생활하다보니 내가 습관적으로 간과한 부분도 있을 거다. 그들은 나에게 여성성을 요구하지 않았는데 이 세계에 잘 묻혀 지내기 위해 나를 변형시키거나 기분이 나빠도 티 안 내고 웃음으로 승화시킨 순간이 있었던 게 아닐까. 그렇게 요구된 건가, 아니면 내가 적응을 잘한 걸까. 그게 너무 습관이 돼서 기억이 안 날 정도가 된 게 아닐까. 그렇게 생각하니 슬픔이 몰려오더라. <82년생 김지영>의 김 팀장을 보며 몹시 공감한 이유다.

-이종언 감독은 이창동 감독의 <밀양>(2007) 스크립터로 시작해 그가 제작한 <여행자>(2009)의 연출부, <>(2010)의 연출부를 했다. 그리고 이창동 감독의 동생 이준동 대표가 있는 나우필름에서 첫 장편영화를 만들었다.

이종언_대학원에서 영화를 전공해 단편영화를 만들다가 30대 초반 이창동 감독님 현장에 연출부로 들어갔다. 감독님이 작품을 드문드문 하시다보니 나 역시 작업 사이의 공백이 길었는데, 그건 내 선택이었다. 다른 데 가서 연출부 경험을 더 쌓을 수도 있었는데 그러지 않은 이유는… 잘 모르겠다. 더 다양한 경험을 해보는 게 좋았을 수도 있지만 당시에는 한곳에서 일하는 것의 의미를 중요하게 생각했다. 그곳에서 이창동 감독님께 정말 많은 것을 배웠다. 영화뿐 아니라 감독님이 사람을 대하는 태도까지. 원래 다른 작품을 준비하고 있었는데 2014년에 ‘그 일’(세월호 참사)이 벌어졌다. 왜 그랬는지는 모르겠지만, 진도에 가서 뭐라도 해야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듬해 안산의 ‘치유공간 이웃’에 가서 1년 넘게 생일 모임(세월호 참사로 세상을 떠난 학생들의 생일을 기억하는 모임)에 참석하며 시간을 보냈다. 그러다가 이 경험을 영화로 만들어야겠다고 생각한 거다. <생일>은 제작사도 투자사도 배우들도, 다들 뭐라도 하고 싶은 마음을 보태고 보태서 온 작품이다.

-배우 출신인 김도영 감독은 다른 두 감독과는 조금 다른 데뷔를 했다. 사나이픽처스, 나우필름 등 잔뼈 굵은 제작사에서 수 년간 데뷔를 준비한 두분과 달리, 봄바람 영화사의 창립작으로 첫 장편영화를 만들었다.

김도영_원래 무대에서 연기하는 연극배우였다. 그러다가 애를 낳으니 연극을 할 수가 없었다. 연극은 굉장히 많은 시간을 들여 리허설을 해야 한다. 그래서 대신 글을 썼다. 평생 보아온 게 희곡과 시나리오였으니 희곡 형태로 썼는데, 이런 글의 특징은 만들어지지 않으면 딱히 의미가 없다는 거다. 첫째는 시험관아기 시술로 가졌다. 시험관아기 시술을 준비할 때 단편 <가정방문>(2012)을 찍었고, 아이를 가진 상태에서 편집을 했고, 아기를 낳은 후 미쟝센단편영화제에 갔는데 그 경험이 너무 즐거웠다. 그리고 남편과 고민이 많아졌다. 연극배우로는 살 수 없다는 생각에 한양대학교 대학원 연극학 박사 과정을 시작했다. 아이를 키우면서 박사 학위를 따고 연기 개인 레슨으로 돈을 벌고 교수 임용을 노려보자는 생각으로 말이다. 근데 마음이 콩밭에 가 있는 바람에 대학원에서 영화과 수업도 동시에 들었다. 장비를 빌려 1회차로 하루 만에 찍은 단편 <낫씽>(2014)을 한국예술종합학교에 냈는데, 전문사 과정에 합격하면서 2017년부터 학교에 다니게 됐다. 내가 최고령 입학자라고 한다. (웃음) 중급과정에서 만든 단편 <자유연기>(2018)를 영화제에서 본 영화사가 <82년생 김지영>을 연출해보지 않겠느냐고 연락을 해왔다. 사실 이 작품을 연출해야 하나 고민을 많이했다. 아마 스탭 중 내가 가장 늦게 계약했을 거다. 시나리오 수정부터 프리 프로덕션까지, 심지어 졸업영화도 같이 찍느라 정신없이 시간을 보냈다. 어깨에 무언가를 짊어진 듯한 느낌이 들었고, 찍으면서도 내가 잘하고 있는 걸까 고민했다. 그런데 어느 순간 <82년생 김지영>이 나에게 운명이었다는 생각이 들더라. ‘김지영’이라는 인물이 이 작품에 참여한 사람들을 택했다고 말이다.

나 역시 누군가에게 힘이 됐으리라

-그간 기자로서 만난 여성감독들이 늘 하던 말이 있다. 투자자들은 아직 여성감독의 능력을 확신하지 못한다고 말이다. 그리고 윗세대 감독들은 여자가 영화판에서 살아남으려면 남자처럼 행세해야 한다고 믿던 시절이 있었다는 말도 전해주더라.

이종언_올해의 여성영화인상에서 <메기>의 김희진 미술감독, <벌새>의 김보라 감독, 그리고 내가 무대 위에 올라가 상을 받으니 사회를 맡은 문소리 배우가 “과거에는 여성감독이나 스탭들의 의상이 되게 비슷했는데, 이제는 아닌 것 같다”고 말하더라. 각자의 매력을 잘 구현해낸다는 의미로 받아들였는데 매우 공감한다. 30대 초반쯤이었나, 속이 비치는 옷을 입고 갔다가 굉장히 오랜 시간 동료 스탭에게 혼난 적이 있다. 그때 그 일로 인해 꾸미고 다니면 안된다는 강박이 생겼다. 어떤 동료는 프리 프로덕션을 한창 할 때 구두를 신고 출근했다가 혼나기도 했다. ‘남자’처럼 하고 다녀야 한다는 말이 있던 시기가 분명히 있었다. 누군가를 탓하고 싶진 않다. 당시 우릴 혼낸 분들은 아마 그럴 만한 이유가 있었을 것이다. 본인이 같은 이유로 혼났거나, 그땐 분위기가 그랬거나, 어쩔 수 없었을 거다. 지금은 머리를 기르든 파마를 하든 영화계에서 자신을 드러낼 수 있는 분위기가 된 게 참 좋은 것 같다. <82년생 김지영> 같은 작품도 나오고. (웃음)

김도영_전보다 사회가 나아지는 건 사실인 것 같고, 조금씩이나마 앞으로 나가는 건 무척 의미 있다. 나도 현장에서 머리를 짧게 자르고 맨날 시커먼 옷만 입었는데 어느 날 문득 그런 고민이 생기더라. 내가 갑자기 현장에 치마를 입고 오면 다들 날 미친 여자라고 생각하겠지? (일동 폭소) 기본적으로 현장 자체가 남성적으로 하고 다닐 때 일의 효율이 높아진다는 식의 편견이 있는 것 같은데…. 잘 모르겠다. 다른 감독님들은 현장에서 옷을 어떻게 입으시나?

이종언_현장에서는 기동성 좋은 옷을 입는 게 좋은 것 같다. 하지만 프리 프로덕션 할 때 하루 종일 사무실에만 있는 경우라면 자기 성향을 드러내도 좋지 않을까, 그게 왜 문제가 될까.

김도영_어쨌든 여러 가지 생각을 하게 됐다. 심지어 굉장히 근본적인 질문도 던지게 됐다. 여성성은 무엇이고 남성성은 무엇일까. 인간은 복잡하고 수많은 결이 있는데. 어쨌든 현장에서 이런 고민을 할 수 있다는 것 자체가 예전보다 더 나은 사회가 된 건 확실하다. 그런데 이보다 더 좋아질 수 있을 것 같다. 그러길 바란다.

박누리_얘기를 듣다보니 정말 생각이 많아진다.(웃음) 난 이런 말도 정말 많이 들었다. 내 이름이 여자 이름 같지 않다고. <> 시나리오를 보고도 여자가 썼다고 생각 못하는 분들이 있었다. 그러다가 감독이 여자라고 하면 굉장히 당황하면서 우려하는 듯한 시선을 보내는 거다. 예전부터 그런 말을 하도 많이 들어서인지, 언제부턴가 기분이 나쁜 대신 ‘성별이 무슨 상관인데, 두고 보자’는 식이 됐다. 그런데 내가 이런 마음을 갖는 게 좋은 건가 싶다. <> 개봉 당시 만난 기자님들이 여성감독이 연출했다는 걸 전혀 몰랐다는 말을 많이 했다. 분명 칭찬으로 해준 말이고 나도 기분이 좋았는데, 그냥 좋게만 받아들여도 되는 건가 고민되더라. 나의 여성성이 영화에서 느껴지지 않았다는 말을 듣고 기분이 좋은 건 어딘가 잘못된 게 아닐까 싶기도 하고…. 모르겠다. 여성감독이라는 걸 알고 걱정하는 사람들을 보면 싸우고 싶은 마음이 들면서도 굳이 그러지 않아도 되는데 싶기도 하고. 이런 경계가 참 애매하다.

김도영_박누리 감독님 같은 분이 영화계에 많아질수록 후배 감독들은 여자인 줄 몰랐다는 식의 말을 듣지 않아도 될 거다. 그래서 난 박누리 감독님 같은 사람이 많아졌으면 좋겠다.

-올해 상업영화는 물론 독립영화 진영에서도 유의미한 성과를 낸 여성감독들이 대거 등장했다. 지지난해 <미씽: 사라진 여자>의 이언희 감독, 지난해 <미쓰백>의 이지원 감독이 보여준 활약에 이어 올해 많은 여성 영화인들이 자신의 작품으로 관객을 만났다. ‘올해의 영화인’을 호명할 때 이 사람들 중 한명만 꼽아야 한다는 게 아쉬울 정도다. 산업 분위기가 눈에 띄게 변할 수 있었던 이유가 뭐라고 생각하나.

이종언 감독.

이종언_내가 영화를 공부한 지 22년 됐고, 현장에서 일한 지는 15년이 됐다. 박누리 감독님은 23살 때부터 현장에 있었고, 김도영 감독님도 연기를 했던 시절부터 계산하면 정말 긴 세월 동안 이 업계에 있었다. 이렇게 떠나지 않고 자기 일을 해왔던 사람들이 자기에게 맞는 때가 돼서 나온 거다. 어쩌면 자연스러운 흐름이다. 우리가 어렸을 때만 해도 주로 남자들이 사회활동을 했고, 문화는 어떤 사람들이 경제활동을 하느냐에 따라 바뀐다. 사회 전반적으로 여성의 사회활동이 늘어나면서 자연스럽게 분위기가 변한 영향도 있을 거다.

김도영_몇년 전부터 많은 여성감독들이 씨를 뿌리고 있었다. 올해 갑자기 튀어나온 게 아니라 많은 분들이 노력하고 쌓아온 게 모여서 물줄기가 바뀐 느낌이 든다. 하지만 아직 많이 부족하다. 더 많이 나와야 한다. 연극영화과 학생 성비가 비슷해도 졸업 후 동등한 기회가 주어지지 않는 건 사실이다. 많이 좋아진 건 맞지만 더 좋아져야 한다.

-<벌새>의 김보라 감독이 디렉터스컷 어워즈에서 남긴 수상 소감이 화제가 됐다. 여성감독을 시상식에서 보는 일이 많지 않았기 때문에 정재은, 임순례, 변영주 감독의 존재가 매우 큰 힘이 됐다고. 여기 계신 분들도 연출부나 조감독 시절을 거칠 때 기성 여성감독이 많지 않다는 것을 지각했을 것이다.

박누리_그런 선례가 많지 않아서, ‘왜 여자감독이 별로 없지? 그러면 내가 해야지!’ 하며 더 의지를 불태웠다. (웃음) 나는 더 빨리 감독이 될 줄 알았는데, 어느덧 내년이면 마흔이다. 지금 활동하는 여성감독 수가 늘어나면서, 나처럼 겁없이 뛰어들지 못하고 차마 용기를 내지 못했던 분들이 감독을 꿈꿀 수 있게 고무된 것도 있을 테다. 독립영화제 상영작들을 보면 확실히 여성감독 수가 늘어났다. 너무 반갑다. 이제 막 영화과를 졸업하거나 경력을 시작한 분들이 더 자유롭게 활동할 수 있는 상황이 된 것 같다. 다만 이게 어떤 대결처럼 보이기보다는 자연스럽게 서로의 능력을 응원하며 화합했으면 좋겠다. 다 같이 성공해서 파이가 커졌으면 좋겠다.

김도영_서로 직접 알고 지내는 게 아니더라도 여성감독들이 존재하는 것 자체가 굉장한 힘이 된다. 나 역시 누군가에게 힘이 됐을 거라 믿는다. 그 사람의 성별 때문에 위치가 바뀌지 않는 게 중요하다. 너무 기울어진 운동장 위에 있었기 때문에 이제야 슬슬 변화가 일어나고 있는 거다. 일상의 모든 부분에 차별이 만연해 있어서 차별이라고 생각조차 안했던 일들이 너무 많았다. 요즘 시대엔 사람들이 점점 차별 문제를 예민하게 고민하게 됐는데 그 자체가 되게 놀라우면서 더 짚어야 하는 문제는 없나 구석구석 살피게 된다. 영화계도 그렇고 모두가 이런 면에서 자유로울 수 있는 날이 올 때까지 진보해가고 있다고 믿는다.

여성감독은 여성 서사만 다뤄야 하나

-여성감독이나 여성 서사가 부족한 현실을 지적하는 목소리가 높아지면서 여성감독이면 여성 서사를 다뤄야 한다는 식으로 말하는 이들도 있다. 그렇지 않을 경우 약간 속상해하거나 배신감을 느끼기도 하고. 혹자는 여성감독이 어떻게 남자 캐릭터 위주의, 여성 캐릭터에 소홀한 작품을 만들 수 있느냐며 더 혹독하게 비판한다. 어떤 면에서 여성감독에게 더 엄격한 기준을 내밀고 다루는 소재를 한정짓는다는 생각은 안 해봤나.

박누리_내가 <> 개봉 당시에 그 말을 들었다. 여자감독이기 때문에 <>의 여성 캐릭터를 더 비중 있고 섬세하게 다뤘어야 했다고…. 남자감독이 여성 서사를 잘 다뤘다고 하면 그걸 특별나게 바라보지 않는데 여자감독이 여성 서사를 다루지 않는다고 물음표를 갖는 분들이 있다. <>은 여자감독이 만든 남자주인공 영화가 아니라, 그냥 어떤 감독이 만든 남자주인공 영화로 봐주면 안되는 걸까. 소재나 주인공의 성별은 원래 감독이 하려고 했던 이야기에 따라 결정된다. 내가 여자라는 건 출신 지역이나 취향처럼 나를 구성하는 요소 중 하나인 거지, 내가 여자라는 사실이 나의 모든 것을 지배하지는 않는다. 여성 캐릭터가 턱없이 부족한 것은 현실이며, 여성 서사가 많이 나오는 건 영화계에 꼭 필요하고 모든 사람에게 중요한 일이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여자감독이 반드시, 무조건 그 일을 해야 한다고 연결시킬 필요는 없지 않을까. 그 밖에도 내 주변에는 아직도 여성감독이기 때문에 어떠할 것이라는 선입견을 갖는 이들이 있다. 꼭 그렇게 연결 짓지 않았으면 한다.

이종언_여성감독이 만들었기 때문에 여성 캐릭터를 더 디테일하게 만들거라는 것도 편견일 수 있다. <>을 두고 그런 말이 있었다는데 나는 전혀 신경 쓰이지 않았다. 그냥 감독님이 너무 멋있다.

박누리_솔직히… 여성 캐릭터를 다루는 게 더 어려울 때도 있다. 같은 성이니까 더 잘 알면서도 더 조심스럽고 모르겠는 부분이 있더라. 그래서 <82년생 김지영>과 <생일>을 보며 대단하다고 감탄하고 두 감독님이 부러웠던 거다. 혹시 김도영 감독님은 <82년생 김지영>이 여성의 이야기여서 더 끌리셨나.

김도영_배우였을 때부터 여성 캐릭터가 너무 부족하다고 느꼈다. 어딜 가도 여성 캐릭터는 아주 멋지거나 섹시하거나 아줌마이거나, 너무 단순하고 납작했다. 주변 여성들을 보면 굉장히 재미있고 각자 개성이 넘치는데 왜 이런 캐릭터가 영화에서 만들어지지 않는 걸까 의아해했다. 영화 오디션을 보러 다닐 때 남자 이야기가 80% 이상이었다. 그때에 비하면 지금은 여성서사가 많아졌는데 더 많아져도 괜찮을 것 같다. 모두가 지긋지긋해할 정도로 여성의 이야기가 많아져서 제발 남자 이야기 좀 하고 싶다고 하는 날이 올 만큼. (일동 폭소) 박누리 감독님이 <>을 만든 게 어떤 이벤트처럼 보이지 않으려면 여성 서사가 충분히 많이 나와야 한다. 나보고 그 일을 하라고 한다면 기꺼이 하고 싶다. 물론 다른 이야기도 할 게 많고, 어떤 이야기가 됐든지 남자든 여자든 캐릭터를 입체적으로 그리는 건 중요하다. 그런데 그동안 여성 캐릭터가 워낙 단순하게 재현됐으니 지금 다양한 여성 캐릭터를 보여주는데 집중하는 게 좋지 않을까 싶은 거다. 우리 모두 이 이슈로부터 자유로워지려면 우선 양적 균형을 맞춰야 한다.

-지난해 영화진흥위원회의 한국영화 결산자료를 보니까, 여성감독이 연출하거나 여성 서사를 다룬 작품의 수익률이 절대 떨어지지 않는다. 오히려 중급 예산 규모에서 효율적으로 돈을 벌어다준다는 분석 결과가 나왔다.

박누리 감독.

박누리_남자 캐릭터 위주의 범죄물이라든지 관객이 당연히 보러 가야 한다고들 생각하는 유의 영화들이 여전히 버티고 있다. 결국 다방면의 다양성이 중요하다. 다양한 계층, 직업군, 성별까지. 그리고 역으로 이렇게 생각할 수도 있겠다. 남자감독 작품은 규모가 크든 작든 투자를 다양하게 받는데, 여자감독은 그중에 추리고 추려서 진짜 돈이 될 것 같은 작품만 골라 투자가 성사돼서 수익률이 높게 나오는 거라고. 음… 내가 너무 삐뚤어진 말을 하는 걸까. (웃음)

이종언_맞는 말 같다. 어쨌든 영화는 대중을 상대로 한 산업이라 수요자를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그런데 대중의 흐름이 변하기는 하는 것 같다. 어떤 선동이나 운동에 의한 게 아니라 너무나도 자연스럽게 말이다. 아주 느리지만, 그래서 좀 안타깝지만 그 속도가 느리다고 뭐라고 말하기도 참 어렵다. <>이나 <82년생 김지영>처럼 훌륭한 작품들이 올해 나왔고 언젠가 다른 감독님들도 좋은 작품을 내놓을 거다. 올해 이 결과물들은 칭찬받아야 마땅한 일 같다.

김도영_몇년 후에는 이렇게 여성감독 대담을 굳이 안 해도 됐으면 좋겠다.

이종언, 박누리_(몹시 공감하며) 그 생각을 나도 했다!

김도영_우리가 ‘여성감독’이라고 따로 모여서 이런 대화를 나누는 것 자체를 봐도 우리가 발 담그고 있는 사회가 아직 그 정도로 진보한 건 아닌 거다. 딱 이 정도의 선 안에 있는 거다. 몇년 후에는 전혀 다른 부분, 다른 다양성 이슈에 초점을 맞춰 논의가 진행됐으면 한다. 예전엔 여성감독의 활약이 이슈가 됐다는 것 자체가 우스울 정도가 됐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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