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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페셜] <맹크> 깊이 보기 - 할리우드의 황금시대, 어떤 일이 있었나
임수연 2020-12-04

<맹크> 알고 봅시다② 1930년대 할리우드

<오즈의 마법사> 사진 제공 SHUTTERSTOCK.

“사람들이 극장에 오게 만드는 방법이 뭘까?”(<맹크>의 루이스 B. 메이어 대사 중) 지금 우리에게 익숙한 내러티브 구조와 할리우드식 제작 시스템 그리고 장르 문법은 <맹크>의 시대에 구축됐다. 할리우드의 황금시대를 이끌었던 메이저 스튜디오 5개사 MGM, 20세기 폭스, 워너브러더스, 파라마운트, RKO는 배우 및 스탭들과 장기 계약을 맺어 영화를 만들고 소유한 극장을 통해 배급·상영해 이윤을 극대화했다. 돈을 버는 것을 최우선시하는 제작자 입장에서 그 목표를 가장 충실히 달성할 수 있는 수직적인 통합 구조를 만든 것이다.

1920년대 초부터 1950년대까지 할리우드를 이끌었던 이 시스템에 대해 토머스 샤츠는 <할리우드 장르>에서 ‘스튜디오의 천재성’이라 일컬었다. “이 시스템은 관객의 반응에 따라 자신의 작업을 측정 가능케 하기 때문에 성공적인 스토리와 테크닉의 반복을 촉진시킨다. 스튜디오들은 개별적인 상업적 노력과 함께 영화의 기존 관습에 또 다른 변형을 보여주고, 관객은 그 창조적 변형이 반복적 사용을 통해 관습화될 것인지의 여부를 지시하는 셈이다.”

이른바 할리우드 황금시대는 유성영화의 등장을 기점으로 정의된다. <맹크>에서 윌리엄 랜돌프 허스트(찰스 댄스)가 '말'을 다루는 시나리오작가 맹크(게리 올드먼)에게 “유성영화가 미래다. 황금시대가 오면 자넨 셰익스피어가 될 것”이라고 말하는 맥락이 여기에 있다. 이후 시스템은 더욱 견고해져 1940년대 중반, 5대 메이저 스튜디오가 25개 대도시의 163개 개봉관 중 126개를 통제하는 수준에 이른다. 스튜디오와 관객의 상호작용하에 자리 잡은 내러티브 관습은 오늘날까지 이어지는 웨스턴과 드라마, 뮤지컬, 갱스터 같은 장르도 만들었다. 극중 윌리엄은 “요즘 영화는 갱스터 아니면 막스 형제가 하는 것 같은 코미디”라며 당시 유행하던 장르에 대해 언급한다.

<맹크>에 등장하는 첫 플래시백은 그가 헤드 작가진으로 활동했던 1930년의 파라마운트 촬영소다. 여러 작가들이 한데 모여 이후 <스타탄생>(1937),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1939) 등을 만들게 되는 거물 제작자 데이비드 O. 셀즈닉(알리스 하워드)의 차기 프로젝트 스토리를 함께 구상한다. 관객에게 친숙하면서도 전과 다른 변형이 있는 내러티브는 개인의 영감보단 집단 창작에 의해 확보됐다. 한 작품 안에서도 특정 내러티브 관습에 특화된 작가가 존재했으며, 많은 작가가 릴레이처럼 작업한 까닭에 정식 크레딧에 오르지 못하는 경우도 많았다. 이 시퀀스에는 찰리 레더러(<오션스 일레븐>(1960), <그의 연인 프라이데이>(1940)), 조지 S. 코프먼(극작가로서 막스 형제의 <파티 대소동>(1930)등의 원작 연극 각본을 썼다), 벤 헥트(<스펠바운드>(1945), <오명>(1946)), 찰리 맥아더(<그의 연인 프라이데이>, <폭풍의 언덕>(1939), 벤 헥트와 함께 <악당>(1935)으로 오스카를 받았다), S. J. 페럴먼(<몽키 비즈니스>(1931), <풋볼 대소동>(1932), <80일간의 세계일주>(1957)) 등 고전기 할리우드를 대표하는 작가들이 한데 등장해 시네필의 호기심을 끈다.

<맹크>의 초반부, 맹크는 자신의 아내 세라에게 <오즈의 마법사>(1939)가 스튜디오를 말아먹을 것이라 말한다. 당시 영화인이라면 쉽게 짐작했을 만한 이야기다. 디즈니의 <백설공주와 일곱난쟁이>(1937)의 성공에 자극받아 MGM이 야심차게 착수한 <오즈의 마법사>는 제작 과정에서 잡음이 많았다. 맹크를 포함한 수많은 작가가 스토리를 뜯어고치고 우여곡절 끝에 시나리오가 완성된 후에도 감독이 4번이나 교체됐다. 특히 촬영 당시 18살이었던 주인공 주디 갈런드가 제작진으로부터 심한 학대를 받았다는 사실이 뒤늦게 알려져 논란이 됐다. 화려하게만 비쳐졌던 할리우드 스타 시스템의 민낯을 보여준 사건이었다.

영화에는 워너브러더스나 메이저 회사에는 속하지 못했던 컬럼비아 픽처스 얘기도 잠시 등장한다. 1940년대의 워너브러더스는 <카사블랑카>(1942), <나우, 보이저>(1942) 같은 멜로는 물론 <성조기의 행진>(1943) 같은 선전영화를 만들어 전쟁 자금을 모았다. 1948년, 미국 연방대법원이 이같은 수직적 통합 체계가 위법이라는 이른바 ‘파라마운트 판결’을 내리면서 할리우드의 황금시대는 ‘종말’을 맞았다. 더이상 제작과 배급, 극장은 통합될 수 없었다. 역설적으로 스튜디오의 쇠퇴는 보수적인 영화계가 텔레비전업계와 손을 잡는 계기가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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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제공 SHUTTERSTOCK.