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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페셜] <맹크> 깊이 보기 - 할리우드는 진보? 처음엔 아니었다네
이주현 2020-12-04

<맹크> 알고 봅시다③ 1930년대 미국의 정치·사회

대공황기의 미국. 사진제공 SHUTTERSTOCK.

미국의 대공황

<맹크>의 배경인 1930년대는 대공황으로 진통을 겪으면서도 동시에 영화산업은 꾸준히 성장했음을 확인할 수 있는 시대다. 1929년 10월 24일 주가 대폭락을 신호탄으로 미국은 사상 최대의 경제 대공황을 겪는다. 미국의 거리는 실업자들로 넘쳐났다. 할리우드 영화산업도 타격을 받을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부익부 빈익빈은 그때나 지금이나 마찬가지. 가난한 영화인들은 일자리를 얻기 위해 스튜디오 주변을 맴돌았지만 스튜디오의 고위층은 호화로운 생활을 유지했다. 대공황 시절 할리우드는 막 유성영화 시대를 맞이하고 있었고, 삶이 힘들어지자 영화라는 마법은 대중에게 더 짙은 호소력을 띠었다. <킹콩>(1933), <오즈의 마법사>(1939) 같은 영화가 모두 대공황기에 탄생했다.

한편 <맹크>에도 나오지만, MGM은 회사 사정이 어려워지자 직원들의 임금을 삭감한다. 임금 삭감을 발표하면서 MGM의 루이스 B. 메이어 회장은 말한다. “나라의 경제 위기로 우리도 어려운 상황입니다. 평범한 사람들은 영화를 볼 여유가 없죠. 가족 여러분에게 임금 삭감이라는 힘든 부탁을 드리겠습니다. 돈 때문에 가족이 흩어져선 안되겠죠.” 정작 회장은 그 고통을 나눠지지 않는다. 맹키위츠가 쓴 <시민 케인>은 그런 권력자들에 대한 조롱을 기반으로 한다.

파시즘과 자유민주주의

제1차 세계대전과 제2차 세계대전 사이 유럽을 휩쓴 건 파시즘이었다. 이탈리아의 무솔리니와 독일의 히틀러에 의해 유럽은 파시즘 광풍에 휩싸이는데, 1929년 미국발 대공황의 여파 속에 히틀러는 독일의 부흥을 외치며 인종주의, 즉 반유대주의 정책을 본격적으로 펼치기 시작한다. 유럽 사회는 즉각 공포에 빠졌고, 미국 또한 자유민주주의가 도전받을까 걱정한다. <맹크>의 회상 신인 1933년 장면, MGM 메이어 회장의 생일 파티 자리에서도 할리우드 부유층들의 대화는 자연스레 히틀러와 나치 얘기로 흐른다. “미국이 어떻게 해야 하지 않나?” “강제수용소에서 책을 불태운다는데 그다음은 뭘까? 영화?” 이들은 루스벨트 대통령이나 캘리포니아 주지사 선거에 후보로 나선 업튼 싱클레어 등을 조롱할 때 “무능력한 악당” 히틀러와 무솔리니의 이름을 언급한다.

업튼 싱클레어. 사진제공 SHUTTERSTOCK.

1934년 캘리포니아 주지사 선거

<맹크>의 서브 플롯에는 1934년 캘리포니아 주지사 선거가 중요하게 등장한다. 캘리포니아 주지사의 민주당 후보는 업튼 싱클레어였고 공화당 후보는 프랭크 메리엄이었다. 업튼 싱클레어는 <정글> <오일> 등을 쓴 소설가이자 대공황기에 캘리포니아 빈곤 퇴치 운동을 조직했던 사회운동가다. 할리우드의 부자들은 싱클레어를 불편한 존재로 여기며 공공연하게 싱클레어 당선 반대 운동을 펼쳤다. MGM은 어빙 솔버그를 주축으로 소속 배우와 스탭들에게 공화당 지지 기금을 모금했고, 싱클레어를 공격하는 가짜 뉴스를 만들었다.

<맹크>에도 등장하는 가짜 정치 광고 제작엔 감독과 배우들이 동원됐다. “프랭크 메리엄에 투표하는 이유는, 지금 방식대로 살고 싶기 때문이죠. 메리엄은 지난 150년간 미국이 지켜온 모든 기반과 원칙을 잘 지킬 것 같거든요.” 적어도 1934년 주지사 선거 때는, 싱클레어가 당선되면 사적 재산권은 종잇조각이 될 거라는 믿음을 심어주는 교묘한 정치 캠페인이 적중한다. 싱클레어는 낙선하지만 이를 계기로 할리우드의 진보적 영화인들이 목소리를 내기 시작한다. 지금의 할리우드의 진보적 정치 지형은 1930년대부터 서서히 다져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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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제공 SHUTTERSTOCK.